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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천장(士林薦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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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유생(儒生) 김연정(金演政) 등이 삼척(三陟) 김인섭(金仁燮)의 처(妻) 심씨(沈氏)의 효행(孝行)과 열행(烈行)에 대한 정려(旌閭)를 바라며 관아(官衙)에 올린 사림천장(士林薦狀)이다.심씨는 신재공(信齋公)의 후손인 심관(沈寬)의 셋째 딸로, 일찍이 남편을 여의어 장례를 마치는 날에 목을 매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시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늙은 시아버지를 지성으로 봉양하며 어린 자녀들을 잘 양육하였다.이 사림천장에는 그녀가 시아버지의 병환을 구한 일화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자녀를 훈육(訓育)하며 경계한 그녀의 말도 소개되고 있다.현재 탁본은 관동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시기는 1970년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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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
노효경
사림천장(士林薦狀)
대저 선행(善行)을 드러내어 표창하여 풍교(風敎)를 세운 것은 조정(朝廷)의 성대한 은전(恩典)이요, 계술(繼述)한 것을 널리 펼쳐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은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이다.
삼척군(三陟郡) 도하면(道下面) 지흥리(智興里)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삼척(三陟) 김인섭(金仁燮)의 아내 심씨(沈氏)는 신재공(信齋公)의 후손인 심관(沈寬)의 셋째 딸이다. 원래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 산골짜기의 외딴 촌구석에 살아서 이미 스승에게서 부도(婦道)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고 예법(禮法)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온유하여 이를 갈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기색을 얼굴에서 볼 수가 없었으며, 어리석고 악한 말은 입 밖으로 내지를 않았다. 비록 봄과 여름의 짧은 밤일지라도 감히 먼저 잠들지 않았으며, 비록 남매가 자리에 죽 벌여 앉아야할 일이 있더라도 일찍이 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일체의 행위와 행동거지가 스스로 옛 선비의 부인들이 남겨놓은 규범(閨範)과 좋은 행실을 합당함이 있었다. 이것을 보면 가히 인성(人性)의 양지양능(良知良能 : 교육이나 경험에 의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행할 수 있는 마음의 작용)을 알 수가 있으니, 비록 산골짜기의 웃음거리가 될 만한 사람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있다. 그래서 모두들 말하기를, “특출하고 기이하도다!”라고 하니, 기린(麒麟)이 숲이 우거진 곳에서 나고 교룡(蛟龍)이 수초(水草)가 무성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시집 갈 때가 되어서는 부녀자의 도리를 다할 수가 있었으니, 가까이로는 시부모를 섬기는 데에 있어서 혼정신성(昏定晨省 : 밤에는 부모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이른 아침에는 부모의 밤새 안부를 묻는다는 뜻으로, 부모를 잘 섬기고 효성을 다함을 이르는 말)의 도리를 행할 수가 있었고, 멀리로는 종족(宗族)을 처우(處遇)하는 데에 있어서 화목(和睦)하게 하는 의리를 지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운수(運數)가 불행하여 일찍이 남편을 잃었으니, 얼굴빛의 근심스러움과 통곡하고 가슴을 치는 애통함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급기야 염습(殮襲 :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에 옷을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을 하고 이미 성복(成服 : 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음)이 지나서 장례(葬禮)를 마치자, 그날 깊은 밤에 스스로 상궤(喪几)의 곁에서 목을 매었다. 거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젖먹이 아이가 놀란 목소리로 다급하게 사람들을 불렀기 때문에 온 집안이 갈팡질팡 어쩔 줄 몰라 하며 급하게 가서 구하고 진정시켰다. 잠시 있다가 그의 시아버지가 울면서 타일러 말하기를, “내 나이가 60여 살이 되었으니 죽는다한들 무슨 한(恨)이 있겠는가? 이 변고(變故)의 상사(喪事)를 당하고도 죽지 않는 사람은 조상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니, 너는 늙은 시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고 자결(自決)하려 하였는가?”라고 하니, 즉시 눈물을 가리고 소리를 죽이고 흐느끼다가 울음을 그쳤다. 이때부터는 비록 피눈물을 흘리며 베개와 이불을 적실지라도 늙은 시아버지에게는 근심하는 낯빛을 보이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경신년(철종 11, 1860년)에 시아버지가 오랫동안 학질(瘧疾)에 걸려서 여러 달이 지나도 병세에 차도(差度)가 없었고 의술(醫術)과 약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영험하다는 술사(術師)에게 물으니, ‘숭상(崇尙)해야 할 아무개가 아무개 방향에 있으니 밤이 되어 제사를 지내면 효험을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로 밤이 되기를 기다렸는데 마침 사나운 호랑이가 크게 울부짖는 소리가 있었으므로, 10여 명의 사람들이 감히 앞서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심씨가 그 형제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무당과 점쟁이를 진실로 믿을 수는 없으나 이미 효험을 본다고 말하였으니, 효험을 본다면 그것은 바로 늙은 시아버지의 병환일 것이다.”라고 하고는 즉시 그 방향에 있는 호랑이를 향하여?모래와 돌을 던지고 나아가 앞으로 가니, 호랑이가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흔들면서 가 버렸다. 생각에 매우 괴이한 일이라고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호랑이가 약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모래와 돌이 있는 곳에 가보니 근초(根草)가 하나 있었다. 곧바로 삶아서 시아버지에게 바치니, 마침내 효험을 보게 되었다.
어린 자녀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데에 있어서는 그들로 하여금 스승에게 나아가 힘써 배우게 하였으며, 몸소 가산(家産)을 지켜서 그들로 하여금 양생(養生)할 수 있도록 하였다. 부모를 봉양하는 범절(凡節)에 있어서는 반드시 술과 고기를 준비하였고, 매번 제삿날이 되면 옷을 가지런히 바로하고 제사 음식을 청결히 마련하였다. 그리고 항상 그의 자식들에게 경계하면서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세상을 버리신 뒤에 내가 구차하게 지금까지 오래 산 것은 위로는 집에 살아계셨던 늙은 시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서였고, 아래로는 너희들이 자라지 않은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운운하였다.
이와 같이 효행(孝行)과 열행(烈行)을 두루 갖춘 행실에 대해서는 자취가 아주 사라지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감히 우러러 호소하오니 특별히 가상히 여기는 제사(題辭 : 관부에서 백성이 제출한 소장(訴狀)이나 원서(願書)에 쓰던 관부의 판결이나 지령)의 은혜를 입게 하여서 임금님께 칭찬하여 장려하시는 은전에 대해 진달(進達)할 수 있게 해주소서.
무인년(고종 15, 1878년) 12월 일에
유생(儒生) 김연정(金演政), 최덕상(崔德祥), 홍용섭(洪龍燮), 홍규남(洪圭南), 심능모(沈能模), 홍기섭(洪驥燮), 김원심(金源心), 김원대(金源大), 김원태(金源台), 김병모(金秉謨), 홍규정(洪圭貞), 홍언섭(洪彦燮)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