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환조 정릉 신도비(朝鮮桓祖定陵神道碑)
2
태조건원릉비(太祖健元陵碑) [제액(題額)]
유명 시강헌조선국태조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건원릉신도비명 병서(有明 諡康獻朝鮮國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健元陵神道碑銘 幷序)
추충익대좌명공신 숭정대부 길창군 집현전대제학 겸판내섬시사지경연춘추관사 세자이사(推忠翊戴佐命功臣 崇政大夫 吉昌君 集賢殿大提學 兼判內贍寺事知經筵春秋館事 世子貳師) 신(臣) 권근(權近) 봉교찬(奉敎撰)
수충동덕익대좌명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판이조사 수문전대제학 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창녕부원군(輸忠同德翊戴佐命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判吏曹事 修文殿大提學 領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傅 昌寧府院君) 신(臣) 성석린(成石璘) 봉교서(奉敎書)
자헌대부 지의정부사 집현전제학 지경연춘추관사(資憲大夫 知議政府事 集賢殿提學 知經筵春秋館事) 신(臣) 정구(鄭矩) 봉교전(奉敎篆)
임금이 즉위(即位)한 2년(태조 2, 1393년) 봄 정월 신미일(25일)에 신(臣) 정총(鄭摠)에게 명하기를,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아 처음으로 국가를 세웠으니, 조종(祖宗)의 쌓은 덕을 힘입었다. 삼가 이미 사대(四代)를 추시(追諡)하여 모두 왕(王)의 작위를 올린 바 있다. 그대는 내 선열고(先烈考, 공훈이 큰 돌아가신 아버지)의 정릉비(定陵碑)에 비명(碑銘)을 지어 영원토록 밝게 보이게 하라.” 하셨다. 신 총(摠)이 명령을 받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문사(文辭)의 변변치 못하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사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맹씨(孟氏, 맹자)의 말을 살펴보건대, ‘5백 년 만에 반드시 왕자(王者)가 일어나게 된다.’ 하였습니다. 고려 왕조는 시조(始祖) 왕씨(王氏) 이후로 거의 5백 년이 되었습니다. 국운(國運)이 이미 쇠퇴(衰頹)해지자 공민왕(恭愍王)이 후사(後嗣)가 끊어졌는데, 요망스런 중 신돈(辛旽)의 아들 우(禑)가 성(姓)을 속여 왕위를 도적질하고는 주색(酒色)에 빠지고 포학하였습니다. 무진년(1388년)에 그 재상(宰相) 최영(崔瑩)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경거망동(輕擧妄動)하여 장차 천자의 국경을 범하려고 하였으니, 백성의 화(禍)가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대의(大義)에 따라 군사를 돌이켰습니다. 우(禑)가 그제야 죄를 알고서 아들 창(昌)에게 왕위를 사양했습니다. 이듬해에 천자(天子)께서 이성(異姓)이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되었음을 책망하니, 전하(殿下)께서 시중(侍中)으로서 국정(國政)을 맡고 있었으므로, 여러 장상(將相)들과 서로 의논하여 왕씨(王氏)의 후손인 요(瑤)를 세워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당초 우(禑) 때부터 정권이 권신(權臣)에게 있게 되었으므로, 돈을 받고 벼슬을 팔며, 송사(訟事)로 인하여 뇌물을 받아 조정을 흐리고 어지럽혔으며, 토지를 빼앗아 산야(山野)를 농락(籠絡)하였으며, 기강(紀綱)이 크게 무너져서 해독이 날로 심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서로 원망하면서 이제나 저제나 다스려진 세상이 오기를 생각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재상(宰相)이 되어서는 옛 폐단을 고쳐 없애고 정치의 도리를 다시 새롭게 하여, 사전(私田)을 폐지하여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용관(冗官, 쓸데없는 관직)을 도태(淘汰)시켜 명기(名器)를 소중히 하고, 준량(俊良)을 등용시키고 완흉(頑兇)을 내쫓았으며, 무위(武威)를 떨쳐서 변방의 외구(外寇)를 물리치고, 인정(仁政)을 베풀어 백성의 생업을 넉넉하게 하였으며, 기강(紀綱)을 정돈하고 예악(禮樂)을 수명(修明)하였습니다. 이에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였습니다. 요(瑤)는 혼미(昏迷)한 자질이라서 대체(大體)에 어두워, 간사한 무리를 믿어 쓰고 충직한 신하를 내쫓으며, 부녀와 환관(宦官)의 말을 듣고 전제(田制)의 바른 제도를 어지럽히고, 사친(私親)과 근신(近臣)을 임용하여 명기(名器)의 공정함을 문란케 하며, 정령(政令)을 일정하게 내지 않아서 국법(國法)을 무너뜨리고, 용도(用度)는 절차가 없어서 백성의 재물을 해롭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소인들이 헐뜯어 차츰차츰 사태를 악화시키는 참소를 그대로 믿고, 나라를 광복(匡復)시킨 전하(殿下)의 공로는 잊어버리고서, 그 재상(宰相)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늘 전하를 모함(謀陷)하였습니다. 몽주(夢周)는 그의 무리 가운데 대간(臺諫)의 직에 있는 사람을 몰래 사주(使嗾)하여, 공신(功臣)과 직언(直言)하는 사람에게 죄를 가하려고, 죄를 꾸며 법망(法網)에 끌어넣으려는 글을 올려서, 장차 전하(殿下)에게 미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화(禍)가 에측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게 되었으니, 나라 사람들 가운데 분개하고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홍무(洪武) 25년(1392년) 7월 16일 좌시중(左侍中) 배극렴(裵克廉)·우시중(右侍中) 조준(趙浚) 등 52인이, 천명(天命)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인심이 어디로 돌아가는 바를 살펴서, 대의(大義)로써 먼저 주창하니, 백관(百官)과 부로(父老)들이 의논하지 않고서도 의견이 서로 같게 되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거듭거듭 사양하였지만, 여러 사람의 뜻이 아주 견고하므로 마지못해 보위(寶位)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저자[市]는 가게[肆]를 변동하지 않고, 군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하루아침에 청명(淸明)하게 되었기에,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즉시 지중추(知中樞) 신(臣) 조반(趙胖)을 보내어 이 사실을 황제에게 주문(奏聞)하니, 황제께서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李氏)를 높였는데, 백성은 병화(兵禍)가 없고 사람마다 각기 하늘의 즐거움을 즐기게 되었다. 이는 곧 상제(上帝)의 명령이다.”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추사(中樞使) 신(臣) 조임(趙琳)이 잇따라 돌아왔는데, 또 조칙(詔勅)을 내리기를, “나라는 무슨 이름으로 고치는가? 빨리 달려와서 보고하라.” 하였습니다. 이에 즉시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신(臣) 한상질(韓尙質)로 하여금 국명(國名)을 주청(奏請)하니, 조선(朝鮮)을 국호(國號)로 내려 주고, 또 말하기를,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서 후사(後嗣)를 영구히 번성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위로 하늘과 아래로 사람의 도움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이른바 5백 년의 시기에 응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선원(璿源, 왕실의 世系)의 소자출(所自出)은 전주(全州)의 명망(名望)이 있는 집안입니다. 사공(司空) 휘(諱) 이한(李翰)은 신라(新羅)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 김춘추)의 십대손(十代孫)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가서 시중(侍中) 이자연(李自延)을 낳았습니다. 시중은 복야(僕射) 이천상(李天祥)을 낳고, 복야는 아간(阿干) 이광희(李光禧)를 낳고, 아간은 사도(司徒) 이입전(李立全)을 낳고, 사도는 이긍휴(李兢休)를 낳고, 긍휴는 이염순(李廉順)을 낳고, 염순은 이승삭(李承朔)을 낳고, 승삭은 이충경(李充慶)을 낳고, 충경은 이경영(李景英)을 낳고, 경영은 이충민(李忠敏)을 낳고, 충민은 이화(李華)를 낳고, 화는 이진유(李珍有)를 낳고, 진유는 이궁진(李宮進)을 낳고, 궁진은 대장군(大將軍) 이용부(李勇夫)를 낳고, 대장군은 내시 집주(內侍執奏) 이인(李璘)을 낳고, 집주는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가서 장군(將軍) 이양무(李陽茂)를 낳았습니다. 장군은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가서 지의주(知宜州) 휘(諱) 이안사(李安社)를 낳았는데, 뒤에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남경 오천호소(南京五千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숩니다. 이 분이 곧 우리 전하의 황고조(皇高祖)이십니다. 지금 목왕(穆王)으로 봉해졌으며, 능(陵) 이름은 덕릉(德陵)이라 하였습니다. 배위(配位) 이씨(李氏)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로서, 지금 효비(孝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안릉(安陵)이라 하였습니다. 황증조(皇曾祖) 휘(諱) 이행리(李行里)는 천호(千戶)를 습봉(襲封)했는데, 지금 익왕(翼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지릉(智陵)이라 하였습니다. 배위(配位)는 등주 최씨(登州崔氏)로, 지금 정비(貞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숙릉(淑陵)이라 하였습니다. 황조(皇祖) 증 찬성사(贈贊成事) 휘(諱) 춘(春)은 지금 도왕(度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의릉(義凌)이라 하였습니다. 배위(配位)는 문주 박씨(文州朴氏)로, 경비(敬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순릉(純陵)이라 하였습니다.
황고(皇考) 영록대부 판장작감사 삭방도만호 증 문하시랑(榮祿大夫判將作監事朔方道萬戶贈門下侍郞) 휘(諱) 이자춘(李子春)은 여러 번 변방에서 공을 세워 만부(萬夫)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지정(至正) 경자년(1360년) 4월 갑술일에 병으로 삭방도(朔方道)에서 훙(薨)하니, 연세가 46세였습니다. 그해 8월 병신일에 함주(咸州)의 동쪽 귀주(歸州)의 언덕에 장사했는데, 지금 환왕(桓王)으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정릉(定陵)이라 하였습니다. 비(妃) 최씨(崔氏)는 증 판문하 영흥백 정효공(贈判門下永興伯靖孝公) 최한기(崔閑奇)의 딸로, 의비(懿妃)로 봉해졌으며, 능 이름은 화릉(和陵)이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대대로 훈공(勳功)과 은덕(恩德)을 쌓아서 비로소 왕업(王業)의 기초(基礎)를 닦았으며, 선행(善行)이 쌓여지고 경사(慶事)가 모여져, 근원이 깊어서 덕이 후세에 전하여 성철(聖哲)을 거듭 낳아서 큰 왕업(王業)을 세우게 했습니다. 하늘이 덕이 있는 이를 돌보아 도와주심이 지극하였던 것입니다. 딸은 삼사좌사(三司左使) 조인벽(趙仁璧)에게 시집갔습니다.
전하(殿下)의 배위(配位) 한씨(韓氏)는 증 문하부사(贈門下府事) 한경(韓卿)의 딸인데, 먼저 훙(薨)하고, 절비(節妃)라 증시(贈諡)하고 능 이름은 제릉(齊陵)이라 하였습니다. 아들 이방우(李芳雨)는 진안군(鎭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과(李芳果)는 영안군(永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의(李芳毅)는 익안군(益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간(李芳幹)은 회안군(回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원(李芳遠)은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연(李芳衍)은 일찍 별세했는데 원윤(元尹)을 증직(贈職)하고, 딸 두 사람은 모두 어립니다.
계실(繼室) 강씨(康氏)는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인데, 현비(顯妃)로 책봉되었습니다. 아들 이방번(李芳蕃)은 무안군(撫安君)으로 봉해지고, 이방석(李芳碩)은 어립니다. 딸은 경산 이씨(京山李氏) 제(濟)에게 시집갔는데, 흥안군(興安君)으로 봉해졌습니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복근(李福根)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입니다. 영안군(永安君)은 증 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에게 장가갔습니다. 익안군(益安君)은 증 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석근(李石根)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입니다. 회안군(懷安君)은 증 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에게 장가가서 아들 이맹종(李孟宗)을 낳았는데, 벼슬은 원윤(元尹)입니다. 정안군(靖安君)은 예문관 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에게 장가갔습니다. 무안군(撫安君)은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에게 장가갔습니다.
신이 가만히 보옵건대,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 조종(祖宗)의 적루(積累, 덕을 쌓음)가 오래고 본지(本支, 본손과 지손)의 번연(蕃衍)의 많은 예로는 주(周)나라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후직(后稷, 주나라 선조 棄)으로부터 수십 세(數十世)를 거쳐 문왕(文王)·무왕(武王)에 이르러 왕업(王業)을 일으켰습니다. 인후(仁厚)한 후비(后妃)의 덕화에 자손이 또한 인후(仁厚)하고, 후비(后妃)가 질투하지 않음으로써 자손이 많아져서, 실로 창희(蒼姬)의 역수(曆數)가 8백년을 이어지게 하는 터전을 잡았던 것이되, 또한 선대(先代)의 인후(仁厚)한 덕이 그러한 것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국가는 사공(司空)으로부터 환왕(桓王, 桓祖)에 이르기까지 적선(積善)을 오래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영명(英明)한 자질과 신무(神武)의 지략(智略)으로써 멀리 전해 온 공렬(功烈)을 계승하고 큰 경사(慶事)를 빛나게 받아 억만 대(億萬代)의 영구한 경사(慶事)를 개시하여, 금지(金枝, 왕족)의 퍼짐이 이미 무성하여졌습니다. 진실로 주(周)나라와 나란히 융성(隆盛)합니다. 이것은 그 쌓인 것이 오래 된 까닭에 나타나는 것이 크게 되고, 심은 것이 튼튼한 까닭에 전하는 것이 머리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아아, 참으로 성대합니다.
신 총(摠)은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고 명(銘)을 바칩니다.
아아! 아름다운 오얏나무[李氏]는 근본이 튼튼하고 뿌리가 깊었습니다.
사공(司空)으로부터 대대로 덕음(德音)이 무성하더니, 길이 그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환왕(桓王)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현명한 군주(태조)를 낳으시어 문득 동방을 차지하였습니다.
역수(曆數)의 돌아가는 바이었으므로 군복을 걸쳐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혁신(革新)하여 덕을 밝게 선포하였습니다.
이에 임금께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불선(不善)한 내가 천록(天祿)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이 경사(慶事)를 기른 힘에 말미암은 것이로다.
이에 예전에 시행하던 전장(典章)을 상고하여, 왕(王)을 추시(追諡)하니,
숨어 있던 덕행이 이에 나타나게 되매, 그 광채가 크게 빛나게 되리라!
3”
인후(仁厚)한 공성(公姓, 公孫. 즉 王侯의 손자)은 즉시 그 경사를 두터이 하여,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만세(萬世)까지 영구히 존속할 것입니다.
저 귀주(歸州)를 보건대, 높다란 언덕이 솟아 있어,
왕기(王氣)가 울창하여, 한량없이 아름다울 것입니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오니, 저의 명(銘)은 과분한 칭찬이 아니옵니다.
이 비석(碑石)에 새겨서, 후세의 사람에게 보이자는 것입니다.
[추기(追記)]
만력(萬曆) 39년 신해(辛亥)는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신 4년이다. 함경도 관찰사 한준겸(韓浚謙)이 보고하였다. “아아, 우리 선왕과 선후(先后)의 능이 함흥에 있는 것이 모두 여섯입니다. 신(臣)이 왕명을 받들어 이 땅으로 와서 다스리면서 삼가 고사(故事)를 준수하여 여러 능을 경건하게 배알하였습니다. 그 정릉(定陵)이라는 것은 곧 환조(桓祖) 연무성환대왕(淵武聖桓大王)의 침원(寢園)입니다. 그 화릉(和陵)이라는 것은 곧 환왕의 비(妃)이신, 의혜왕후(懿惠王后)의 침원입니다. 그 둘은 모두 귀주(歸州) 동일원(洞一原)에 있습니다. 실로 성조(聖祖, 여기서는 태종)을 탄생하셔서 우리 동방의 억만년에 이르도륵 무한한 아름다운 복을 여신 분들입니다. 능 아래에 옛날에는 신도비가 있어서, 신(臣)은 부로(父老)의 집에 유전(流傳)하는 등본(謄本)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홍무(洪武) 26년에 세운 것입니다. 순충좌명개국공신 예문관춘추관학사 도평의사사 서원군(純忠佐命 開國功臣 藝文館春秋館學士 都評議司使 西原君) 정총(鄭摠)이 찬(撰)하고, 문하시랑 찬성사 집현전대학사(門下侍郞 贊成事 集賢殿大學士) 성석린(成石磷)이 썼으며, 문하시랑 찬성사 집현전대학사(門下侍郞 贊成事 集賢殿大學士) 권중화(權仲和)가 전(篆)을 쓴 것입니다. 왕도의 기업을 일으키고 터전을 처음으로 열었던 자취와 선계(璿系)의 본손과 지손의 상세한 사실이 여기에 모두 갖추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임진(壬辰)의 난에, 적(賊)이 부수어 깨어버려서,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무너진 귀부(龜趺)와 깨어진 바위를 보고는 길 가는 사람들아 서글퍼하고 한숨을 쉽니다. 신(臣)은 바라건대, 새 돌로 바꾸어 옛 장소에 세워서, 부디 표창하여 드러내어 사람들이 바라보고 우러러보아 영원히 전하여 실추하지 않게 되게 하여 주십시오. 신(臣)은 지극히 구구한 존재이옵니다만, 비석의 재료를 마련하고 다듬어서, 왕명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삼가 이러한 사실을 갖추어 적어 보고하는 바입니다.” 상(上)이 예부(禮部)에 내려 보내시매, 의론한 결정을 보고하자, 곧바로 명하시어 결정대로 시행하라 하셨다. 연길(涓吉, 길일을 점쳐서 고름)하여 비석을 고쳐 세우고, 글은 옛날의 찬(撰)한 것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오익(吳翊)에게 가서 빗돌에다 글을 쓰게 하였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김상용(金尙容)에게 명하여 그 비액(碑額)에 전(篆)을 쓰게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신(臣) 정구(廷龜)에게 그 대강의 자초지종을 비음(碑陰, 빗돌의 뒷면)에 기록하게 하셨다. 때는 만력 40년 9월이다.
숭록대부 행예조판서 겸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세자좌빈객(崇祿大夫 行禮曹判書 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賓客) 신(臣) 이정구(李廷龜)는 교명(敎命)을 받들어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