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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침신도비(安琛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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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1523년(중종 18)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에 건립된 안침(安琛)의 신도비이다. 이 비의 찬자는 이행(李荇)이고 제액(題額)과 글은 남공제(南公濟)가 썼다. 비의 상태는 앞뒷면 모두 마멸이 심해 일부 판독이 난해한 곳이 있다. 묘소는 정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와 쌍분이다. 비문에 의하면 안침(1445~1515년)의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아버지는 부윤 지귀(知歸)이며 어머니는 형조참판 박이창(朴以昌)의 딸이다. 1466년 왕이 강원도에 행차해 시행한 고성별시문과(高城別試文科)에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된 후, 1506년 평안도관찰사로 있다가 중종반정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 후 1514년(중종 9)에 특별히 공조판서에 발탁되었다가 바로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필법은 송설체(松雪體)로서 해서에 뛰어났으며, 영의정 유순(柳洵) · 이손(李蓀) 등과 교우가 깊었다. 시호는 공평(恭平)이다. 이 비문을 통해 연산군·중종 때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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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효경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 판서(工曹判書) 안공(安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이사 이행(李荇)은 글을 짓고, ▨▨대부 이조 판서 신공제(申公濟)는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액(篆額)하다.
정덕(正德) 갑술년(중종 9, 1514년)에 공조 판서 안공(安公) 곧 이름은 침(琛)이고, 자(字)는 자진(子珍)인 분이 병을 이유로 들어 사직(辭職)을 청해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교체되었다가 그 이듬해 을해년 봄 2월 초 1일에 작고(作故)하니, 광주(廣州) 영장산(靈長山)에 장사(葬事)를 지냈다. 이곳에 장사를 지낸 것은 선영(先塋)의 곁에 안장(安葬)하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6년 뒤인 기묘년(1519년) 정월 초 7일에 부인 이씨(李氏)가 또 작고하니, 같은 무덤에 장사를 지냈다. 그 아들이 덕수(德水) 이행(李荇)에게 묘도문(墓道文)을 지어달라고 청하였는데, 아무리 사양해도 되지 않기에 삼가 그 행장(行狀)에 의거해서 다음과 같이 서문(序文)을 쓰고 명(銘)을 하는 바이다.
우리 동방(東方)에서 대대로 선비로 두각을 드러내고, 이어서 명망과 품위를 간직해온 가문으로는 순흥 안씨(順興安氏)를 최고로 꼽는데, 그 현달(顯達)은 고려시대의 문성공(文成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문성공은 이름이 유(裕)인데, 학교의 건립과 영재의 교육을 자신이 꼭 해야 하는 임무로 삼았다. 그는 또 임금에게 건의해서 섬학전(贍學錢)의 제도를 마련하였고, 따라서 자기의 노비를 공공기관에 헌납하였다. 그는 또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의 화상(畫像) 및 제기(祭器), 악기(樂器), 육경(六經), 자(子), 사(史) 등을 중국에서 구해 왔고, 학교는 이를 힘입어서 크게 진흥되었다. 그는 어사(御史), 승지(承旨),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차례로 거쳐서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작고하였는데, 사후(死後)에는 문선왕(文宣王)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성공(文成公)은 우기(于器)란 분을 낳았는데 검교 찬성사(檢校贊成事)를 지냈고, 찬성공은 목(牧)이란 분을 낳았는데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는 문숙(文淑)이었다. 문숙공은 원숭()이란 분을 낳았는데 역시 정당문학을 지냈다. 문학공은 원(瑗)이란 분을 낳았으니,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를 지냈고 시호는 경질(景質)이었는데, 공에게는 고조(高祖)가 된다. 경질공 이상은 모두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실려 있다. 증조부(曾祖父)는 이름이 종약(從約)인데 이조 참의에 추증(追贈)되었고, 조부(祖父)는 이름이 구(玖)인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아버지는 이름이 지귀(知歸)인데 의정부 좌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이 추증들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된 덕분이었다. 공의 형제는 총 다섯 명이었는데, 공은 그들의 중간이었다.
공은 어릴 때부터 출중하게 영리하였으므로 공부할 때에 가서는 지도하는 스승을 괴롭히는 일이 없었다. 18세 때에는 중형(仲兄)인 선(璿)과 함께 천순(天順) 임오년(세조 8, 1462년)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 양시(兩試)에 합격하였는데, 참찬공이 아직 생존해 있었으므로 그 경사를 보았던 것이다. 성화(成化) 병술년(세조 12, 1466년)에 세조(世祖)는 강원도(江原道)에 행행(行幸)하여 그 곳에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그때에 공은 그의 장형(長兄)인 참판공 호(瑚)와 함께 나란히 급제(及第)해서 돌아오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다. 공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補任)되었다가 의정부 사록(議政府司錄)으로 선발되었고, 무자년에는 사헌부 감찰로 승진되었으며, 신묘년에는 성종(成宗)의 집현전(集賢殿) 고사(故事)를 써서 예문관(藝文館)을 설치하고 한 시대의 명사(名士)들을 뽑아 채웠는데, 공 또한 그 선발에 뽑혀서 부수찬(副修撰),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知製敎兼經筵檢討官)이 되었다. 계사년에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고, 갑오년에는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으며, 을미년에는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정유년에는 다시 예문관 교리(藝文館校理)로 들어왔고, 얼마 지난 뒤에는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임명되었다.
하루는 공이 조대(朝對)에서 공주(公主)의 집이 규제를 무시하고 지어진 점에 대해 극론(極論)하였다. 이때 임사홍(任士洪)은 사간원의 장(長)으로 있었고, 그의 아들 광재(光載)는 공주에게 장가들어 있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사홍은 몹시 언짢게 생각하고 즉시 양사(兩司)를 조방(朝房)으로 소집시켰다. 이 자리에서 사홍은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대간(臺諫)은 의논이 일치되어야만 아뢰는 법이니, 혼자 아뢰는 것은 마땅하지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공이 말하기를, “언관(言官)은 마땅히 품고 있는 생각을 각자 털어놓아야 한다. 만일 의논의 일치를 기다리게 되면 반드시 언로(言路)에 장애(障碍)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홍은 더욱 고집을 부리고 굽히지 않았으며, 이로써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은 즉시 소대(召對)하여 상황을 진언(陳言)하게 하였고, 사홍과 공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처지임을 알아차리고 아울러 체직(遞職)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다시 교리가 되었다가 경자년에는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 이때에 사홍은 승정원 도승지가 되어 대단히 기세(氣勢)를 부리고 있었다. 공이 동료들과 함께 사홍의 간교함을 논계(論啓)하자, 임금은 몹시 진노하여 사홍을 논박(論駁)하던 관원들은 모두 파직(罷職)을 당하였다. 그런데 종실(宗室) 주계 정(朱溪正) 심원(深源)이 사홍의 음사(陰邪)한 진상을 극력 진언하였으므로 그 일을 힘입어 임금은 크게 깨닫고 즉시 사홍을 물리치고 공 등을 복직(復職)시켰다.
공은 신축년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승진되었고, 계유년에는 군기시 정(軍器寺正)으로 말미암아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 임명되었고, 갑진년에는 품계(品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라 부제학(副提學)이 되었으며,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어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다가 모(某) 사건에 연류되어 파직되었다. 경오년에는 서반직(西班職)으로 관압사(管押使)에 충원되어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정미년에는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임명되었다가 임기가 차자 예조 참의로 소환되었고, 다시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그리고 계축년에는 이조 참의로 말미암아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가 가자(加資)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고, 천추사(千秋使)에 충원되어 북경에 다녀왔다. 갑인년에는 성균관 대사성 겸 세자빈객(成均館大司成兼世子賓客)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지난 뒤에 이조 참판 겸 도총부 도총관(吏曹參判兼都摠府副摠管)에 임명되었다. 성종 임금이 승하(昇遐)하자 겸 동지춘추관사(兼同知春秋館事)로서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정사년에는 오랜 동안 정조(政曹)에 있었던 이유로 해서 사임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으며, 무오년에는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기미년에는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교체되었다가 얼마 뒤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되었다. 경신년에는 동지중추부사를 거쳐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나아갔고, 임술년에는 한성부 좌윤으로 교체되었다가 호조참판 겸 예문관 제학에 제수되었다. 계해년에는 형조 참판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아갔고, 갑자년에는 예조 참판으로 교체되었으며, 을축년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정덕 병인년에는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아갔다가 금상(今上)이 즉위(卽位)한 그 이듬해인 정묘년(1507년)에 병으로 사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무진년에는 성균관 동지사(成均館同知事)를 겸하였으며, 경오년에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갑술년에는 나이가 많은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해 겨울에 공은 특별히 공조 판서에 제수되다가 사직(辭職)을 허락받았는데, 사직을 허락받은 지 석 달이 못되어서 공은 작고하였다. 부고(訃告)가 전해지자 상은 그를 위하여 조회(朝會) 보는 일과 시장(市場) 여는 일을 중지시키고, 부의(賻儀)를 하는 일과 증직(贈職)을 하는 일을 아울러 예제(禮制)대로 거행하였다.
공은 성품이 단아(端雅)하고 소탈하며 조용하였다. 그러므로 젊을 때부터 함께 교유(交遊)하던 자들에게서 추앙(推仰)을 받았고, 함께 어울려 노는 이는 모두 한 세대의 명사(名士)들이었다. 문장(文章)에서는 뜻이 잘 전달되는 것을 숭상하여 사물에 대해 구상을 할 경우 음운(音韻)이 저절로 맞았고, 필적(筆跡)은 전중(典重)하여 송설재(松雪齋)의 유법(遺法)을 터득하였다. 그래서 비갈(碑碣)의 글씨와 병장(屛障)의 글씨를 구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줄을 이었고, 성종 임금은 크게 칭찬을 가하고 자주 종이를 내려 보내 글씨를 써 올리도록 하였으니, 그가 대우를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은 교화(敎化)는 영재를 양성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고 가는 곳마다 반드시 학교를 일으키는 것에 힘을 썼다. 그가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을 때에는 영재를 교양하고 지도함에 있어서 모두 일정한 과정을 두었다. 그리고 학생들의 식당(食堂)이 협소함을 걱정한 나머지 식당을 터서 넓혔고, 또 학궁(學宮)이 여염집들과 서로 섞여있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마을 어귀의 민가(民家)를 사들여서 철거하되 서반수(西泮水)로 한계를 삼았다.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있을 때에는 창고를 지어서 학름(學廩)을 넉넉하게 하였는데, 지금도 그를 준수하고 폐지하지 않는다.
공은 평생 남의 과실을 말한 적이 없었으나 국사(國事)에 대해서는 직언(直言)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임사홍을 논박할 때에도 공이 강력하게 주장하였기 때문에 사홍은 공에 대해 더욱 깊이 앙심(怏心)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연산군(燕山君) 만년(晩年)에 와서 평소 사홍의 눈엣가시가 된 사람은 더러 온 집안이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공도 응당 화를 면치 못할 것을 염려하여 오직 세상과 더불어 부침(浮沈)하기를 힘쓸 뿐이었다. 성조(聖朝)가 중흥했을 때 공은 이미 병을 이유로 퇴직(退職)을 청하고 있었는데, 상은 오히려 원로(元老)라 해서 특별히 육경(六卿)으로 발탁하였으니, 또한 특별한 대우였다. 문성 유공 순(文城柳公洵)과 한산 이공 손(漢山李公蓀)이 남학(南學)의 친우(親友)들과 기년회(耆年會)를 만들 때 공은 나이가 아직 일흔이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사마(司馬)의 고사(故事)로써 공을 맞아 동회(同會)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수창(酬唱)하여 책을 이루고 모사(模寫)하여 그림을 만들었으므로 한때 아름다운 일로 전해졌다.
공은 천성적으로 효도하고 우애하였다. 공은 부모를 일찍 여읜 것을 가지고 늘 슬퍼하였는데, 형을 아버지처럼 섬기고 아우와 조카를 자식처럼 어루만졌다. 의지할 데 없는 친족들을 모두 가숙(家塾)에 모아놓고 질서 있게 교육을 시켰다. 막내아우 기(璣)가 죽자, 그 아들 처순(處順)을 자기가 낳은 아들 이상으로 양육하여 성취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남들은 이것을 가지고 더욱 훌륭하게 여겼다.
부인은 광릉 이씨(廣陵李氏)인데, 그의 증조는 이름이 양중(養中)으로 고려(高麗) 때 형조 좌참의(刑曹左參議)를 하다가 아조(我朝)가 혁명(革命)할 때에 이르러서는 고향으로 물러가서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작고하였으며, 그의 조부는 이름이 우생(遇生)인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이름이 수철(守哲)인데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양성 이씨(陽城李氏)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지냈고 이름이 맹상(孟常)이란 분의 딸이다.
찬성공은 2남 6녀를 두었는데, 부인이 막내였으므로 부모가 총애하여 배우자를 골라서 공에게 출가(出嫁)시켰던 것이다. 공과 부인은 문벌(門閥)이 비록 나타났으나 산업(産業)은 청빈(淸貧)한 집안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온 집안이 모두 부인의 경영으로 꾸려졌는데, 공이 친족을 무양(撫養)하는 일을 뜻대로 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그에 소요되는 물자가 떨어지지 않았으니, 역시 부인이 공을 잘 받들었기 때문이다.
공은 정통(正統) 10년인 곧 을축년 2월 12일에 태어나서 정덕(正德) 10년인 곧 을해년 2월 초 1일에 작고하였으니, 향년은 71세였다. 부인은 정통 14년인 곧 무진년 7월 27일에 태어나서 정덕 14년인 곧 기묘년 정월 초 7일에 작고하였으니, 향년은 72세였다.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처명(處明)은 병진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지금 안성군수(安城郡守)로 있고, 둘째아들 처선(處善)은 임자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정사년 문과(文科)에 뽑혀 벼슬이 병조 좌랑에 이르렀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그리고 셋째아들 처성(處誠)은 을묘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갑자년 문과에 뽑혔는데, 공의 상(喪)을 마친 해에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죽었다. 넷째아들 처신(處身)은 빙고 별제(氷庫別提)로 있다. 맏딸은 인천부사(仁川府使)인 신렴(申濂)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지금 승정원 우승지로 있는 남세준(南世準)에게 출가하였는데, 부인 먼저 죽었다.
안성군수로 있는 분은 처음에 평창 이씨(平昌李氏)인 첨정(僉正) 미(薇)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셋을 낳았는데, 맏딸은 인동현감(仁同縣監) 이요년(李堯年)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신건(申健)에게 출가하였으며, 셋째 딸은 윤선(尹璿)에게 출가하였는데, 사위들은 모두 참봉(參奉)이다. 뒤에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인 사과(司果) 지영(之嶸)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름이 수(璲)로 아직 어리며, 맏딸은 유학(儒學) 최언후(崔彥厚)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유학 김연(金淵)에게 출가하였으며, 셋째 딸은 아직 어리다. 측실(側室)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이름이 무(珷)이다.
병조 좌랑으로 있는 이는 처음에 수성 최씨(隋城崔氏)인 상의원 정(尙衣院正) 윤신(潤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름이 정(珽)으로 병자년 생원시에 합격했는데 지금 귀양 중에 있고, 딸은 지금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로 있는 박세후(朴世煦)에게 출가하였다. 뒤에는 여산 송씨(礪山宋氏)인 부사(府使) 자강(自剛)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녀는 두지 못했다. 군자감 정으로 있는 이는 고령 박씨(高靈朴氏)인 곧 사도시 정(司䆃寺正) 담(聃)의 손녀에게 장가들었는데 자녀를 두지 못했다. 측실에서 낳은 아들은 이름이 옥(玉)이다. 빙고 별제로 있는 이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인 부제학(副提學) 경지(敬止)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우승지로 있는 이는 2남 2녀를 낳았으니, 맏아들은 응로(應老)이고, 둘째 아들은 응정(應井)이며, 맏딸은 종실(宗室)인 이희남(李希男)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딸은 아직 어리다.
나는 공의 여러 아들들과 모두 교분(交分)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두 중씨(仲氏)와는 학업도 같이 했고 벼슬도 같이 했으며 나이도 비슷하였기 때문에 서로 알아주는 정리(情理)가 더욱 깊었다. 아! 그런데 그들은 지금 모두 황천(黃泉)에서 일어날 수 없는 몸이 되었구려. 그러나 하늘이 한 일이라 그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죽계(竹溪)의 물은
그 발원(發源)이 이렇게 길기도 하니
장원(長遠)함 얼마이던가?
세대(世代)와 함께 무궁무진하리로다.
훌륭하신 문성공(文成公)은
우리들의 학교를 일으키셨네.
그 공로(功勞) 길이 빛나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셨네.
팔대(八代)가 줄줄이 이어서
각각 문헌(文獻)을 남겼도다.
우리 공 또한 그를 따라
아름다운 업적 이으셨네.
나타난 그 이름,
빛난 그 문장(文章)
무엇으로 처우할까
금제(金隄)와 옥당(玉堂)
무엇으로 비유할까
호련(瑚璉)과 규장(珪璋)
이를테면 저 천리마(千里馬)
달릴 길 찾아 높이 뛰는 격
하루 천 리를 달리는데
사방(四方) 가는 일 무슨 어려움 있으랴.
벼슬에 나가기도 집으로 물러오기도 하면서
기강(紀綱) 바로 세웠네.
위대한 성적(聲績)
그 몸이 있는 곳에 따라 드날렸네.
저 독사 같은 독, 그 서슬에 걸렸도다.
그러나 명(命)은 하늘에 매인 거라
살상(殺傷)을 당하지 않았네.
반성할 때 잘못이 없으니
시대와 함께 신축성 보였네.
남학(南學)이 기로회(耆老會) 구성하여
가영(歌詠)하며 한가히 노니셨다.
온 세상 사람 흠모하길
경성(景星)이나 봉황(鳳凰)을 우러러보듯
나이 많아서 사직(辭職) 청하였더니
임금의 특별한 은총 배려되었네.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니
정승(政丞)의 자리 눈앞에 다가왔도다.
천명(天命)이 멈추지 않았는데
타계(他界)를 하였으니
아! 저 창천(蒼天)이여.
장지(葬地)는 바로 영장산(靈長山)
그 양지쪽의 언덕이라네.
부인을 부장(祔葬)하였는데
봉분(封墳)은 같고 혈(穴)은 달리하였네.
내가 명(銘)을 지어 보이니
황천(黃泉)에서도 빛이 나리라.
가정(嘉靖) 계미년(중종 18, 1523년) 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