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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임씨묘갈(長興任氏墓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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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성석동에 자리한 장흥임씨 묘소에 있는 장흥임씨묘갈(長興任氏墓碣)이다. 1684년(숙종 10)에 세워진 이 비는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최운혁(崔雲赫)이 글씨를 쓴 것이다.임씨부인(任氏夫人)은 대사헌(大司憲) 임헌(任獻)의 딸로, 판승추부사(判承樞府使) 박순(朴淳)과 결혼하였다. 태종조에 태조가 함경도에 있을 때, 박순이 운검(雲劒)으로 자청하여 함경도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자, 부음을 들은 임씨부인은 자결을 하였고, 이에 태종은 임씨에게 묘지(墓地)를 내리고, 아들 박흔(朴昕)에게는 참판(參判)을 증직(贈職)하였다.비문에는 박순이 함경도에 가서 태조의 귀환을 요청하여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받고 돌아오는 길에 태조의 측근에게 살해되는 과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판승추부사(判承樞府使) 박순(朴淳)이 돌아가니 태종(太宗, 1400~1418년)께서 그 부인 임씨(任氏)에게 묘지를 하사하시고 예로써 장례를 모시도록 하명하시었다. 임씨는 대사헌 헌(獻)의 따님이다.
우리 태종조 때에 태조(太祖, 1392~1398년)대왕께서 함경도 함흥(咸興)에 거처를 옮겨 계셨다. 태종께서 전후 여러 차례에 걸쳐 문안사(問安使)를 보냈으나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에도 마땅히 문안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어 태종께서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시며 “누가 감히 이곳에 가겠는가?”고 물으셨다. 승추공은 성품이 충직하고 청백하여 항상 의기심이 강하여 스스로 임금을 섬김에 신하된 절개를 다할 것을 자처하더니 이때를 당하여 임금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가기를 청합니다”고 했다. 공은 태종께서 평소에 측근에 두어 중히 여기시던 터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공이 또 왕께 나아가 가기를 청하면서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죽는 것이 그 직분이니 임금의 옷을 입고 임금의 밥을 먹으면서 난국에 처하면 누차(屢次)히 죽음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신이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고 하였다. 공은 그전부터 태조와 포의(布衣)의 교분이 있었던 바, 이때를 당하여 모든 성의를 다하여 태조의 마음을 감동시켜 서울로 모시고 돌아오고자 함이었다. 마침내 왕의 윤허를 받아 길을 떠나게 되었다.
함흥땅에 이르러 멀리 행재소(行在所)가 보이니 공은 그간에 일부러 새끼 말이 딸린 말을 타고 왔는데 그곳에서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 두었다. 이에 어미 말과 새끼 말은 서로 돌아보고 머뭇거리며 울부짖으니 해가 한나절이 되도록 가지를 못하였다. 태조께서 멀리서 이를 보시고 기이하게 여겼다. 마침내 공이 태조를 뵈게 되니 태조께서 반가워하시면서 옛날이야기도 하며 주식(酒食)도 하사하시며, “그대는 어찌하여 이렇게 먼 곳까지 나를 찾아 왔는가?”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견마(犬馬)의 정이 간절함을 이기지 못하여 한번 천안(天顔)을 뵈옵고 죽고자 하여 신이 왔습니다”하였다. 태조께서 또 “그대는 어찌하여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 놓았는가?” 물었다. 대답하기를, “길을 가는데 방해가 되어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 두었던바, 어미와 새끼가 차마 서로 떨어지지 못하고 울부짖었습니다. 비록 미물이라 할지라도 모자간의 정은 지극한 데가 있었습니다”라 하였다. 이것은 공께서 이를 이용하여 은연히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고자 함이었다. 이에 태조께서는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나타내시었지만 석연치 않은 빛을 띠었다. 이에 공은 목이 메이도록 슬프게 통곡하니 또한 눈물을 흘리셨다. 태조께서는 공을 만류하여 보내지 않았다.
하루는 왕이 공과 같이 바둑을 두고 있는데, 마침 쥐가 새끼를 추녀에서 떨어뜨려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어미 쥐와 새끼 쥐는 서로 놓치 않고 있었다. 이를 보고 공이 다시 바둑판을 밀어 치우고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왕도 또한 이를 측은히 여기면서 “그대는 울음을 멈추어라, 나 또한 생각을 해 보겠노라” 하시고는 곧 이어 서울로 돌아오실 뜻을 말해 주었다. 이에 공이 왕명을 받고 이를 사례하고 돌아갈 즈음에 왕께서 “그대는 빨리 가라”하시었다. 얼마 후 행재소에 있는 모든 신하들이 찾아와 서로 앞을 다투어 공을 죽이도록 청하였다. 왕이 허락지 않고 있다가 그가 이미 용흥강(龍興江)을 건넜을 것으로 생각하고 비로소 허락하며 사자에게 칼을 주어 보내면서 “만일 이미 강을 건넜으면 쫓아가지 마라”하였다. 그러나 공은 도중에 우연히 폭질(暴疾)을 얻어 그때까지 강 북쪽에 있어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사자가 돌아가 복명(復命)하니 왕이 크게 놀라 묻기를 “순이 죽을 때에 무슨 말을 하더냐”하니 사자가 “순이 엎드려 행재소를 향하여 크게 외치기를 ‘신은 죽으나 다만 소원은 왕께서 앞에 가지신 뜻을 고치지 마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왕께서는 눈물을 흘리시었다.
며칠 후에 모든 신하를 불러 말하기를 “박순은 나와 젊었을 때부터 좋은 친구였다. 그러니 내가 끝내 그와 약속한 전말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다”하셨다. 곧 남쪽으로 돌아갈 뜻을 더욱 굳게 결정했다. 당초에 공이 길을 떠날 적에 태종이 공에게 묻기를 “경이 하고자 하는 말이 있는가?”하였다. 이에 대하여 공은 “오직 이번에 맡은 직책을 수행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옵고 달리 할말은 없습니다”하였다. 이에 태종은 “경은 처자의 뒷걱정은 하지 마라”하고 곧 저택과 다른 물건도 하사하시었다. 이때를 당하여 태종은 크게 슬퍼하며 “그는 반드시 죽을 것을 알고도 가기를 청하였으니 그 충성과 용맹이 비할 데가 없도다”하고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다만 그 상반신만 그려 그 실적(實蹟)을 나타나게 했다.
부인 임씨는 공이 북으로 함흥에 감에 밤낮으로 한달을 빌더니 흉보(凶報)를 듣고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태종께서는 가위같이 아름답고 함께 아름다운 일이다 하고 전중(殿中) 벼슬에 있는 아들 흔(昕)에게 뒤에 참판(參判)을 증직하였다. 대사헌 채수(蔡壽)가 그 묘갈명에 공의 행적을 기재하기를, “태종께서 공이 나라를 위하여 순결한 것을 슬프게 여겨 공을 기록하고 벼슬을 증직하고 겸하여 전답과 노복을 주었다”하였으며 현손(玄孫) 유경(惟敬)의 묘표(墓表)에도 또한 “태조가 북에 계실 때 문안사 가기를 자청하여 회천(回天)의 공이 지극하였도다”고 기록하였다. 공의 모든 후손에게는 음직(蔭職)의 교지(敎旨)가 내려졌는데, 이는 모두 공이 몸을 버리고 또 처액한 실적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법전을 참고하면 공의 행적을 가히 볼 수 있다. 지금 숭정(崇禎) 기원의 계축년에 공의 8세손 호원(浩遠) · 징원(澄遠)이 나에게 청하기를 “우리 선조(先祖)가 태조의 명에 죽고 그곳에 묻혔으나 이제는 가히 증거할 것이 없으니 그 누가 우리를 위하여 띠를 묶어 위를 표하겠는가? 오직 임씨 묘가 고양(高陽)고을 고봉(高峯) 서쪽 부사문(府事門) 손향원(巽向原)에 있으니 이제 비갈(碑碣)을 세우고 아울러 선조의 사적을 기리고자 한다”하고 가승(家乘)을 나에게 주고 또 공의 외손 첨정(僉正) 이우(李寓)도 와서 나를 보고 자기 어머니가 항상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공의 신주(神主) · 화상(畵像) · 녹권(錄券) 등을 봤는데 임진왜란 때 집이 파괴될 때 다 잃었다”는 말을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당시의 일은 대략 야사나 소설(小說)에 나타나나 그때 공께서 하신 일이 그 난을 피하지 않고 성조(聖祖)의 인성(仁聖)에도 마침내 그 죽음을 구원치 않고 또 행재소에 있는 모든 신하들이 다투어 죽이기를 청하여 기어이 죽고 만 것은 그 연유가 무엇인가?” 공은 음성인(陰城人)이니 증조의 휘는 재(로 공부상서요, 조의 휘는 현주(玄柱)로 전리총랑(典理總郞)이요, 고의 휘는 문길(文吉)로서 고려조에 벼슬을 했다고 전한다.
이해 계축년(현종 14, 1673년) 9월 은진(恩津) 송시열(宋時烈)이 지음
금상 2년 병진(숙종 2, 1676년) 상이 내외자손이 소원하여 진술하는 바에 따라 공의 8세손 호원(浩遠)으로 하여금 공사(公祀)를 주관하게 하였다. 또한 태종조 당시 받은 전지를 관에 이속시켰는데 자손들이 또한 청하니 상은 교시하기를 박순풍(朴淳諷)의 간하여 임금의 마음을 돌림은 포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다른 한전(閒田)을 특별히 지급하라 하였다. 경신 대신 김석주(金錫冑)가 병조판서가 되어 상에게 아뢰기를 “신이 본조문서를 상고해 보니 박순(朴淳)의 자손은 이미 사용(司勇)의 품계에 의한 적이 있는데 지금 또 그 전거에 의해 종손인 호원에게 사용의 자리를 주는 것은 어떻게 된 것 입니까” 하였다. 상은 특별히 허락하고 또한 다시 정려문을 세울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사전(賜田)의 명은 오랫동안 시행되지 않았다. 임술년에 검토관 이언강(李彥綱)이 또한 상언하니 상은 또한 획급(劃給) 할 것을 명하였다. 성조의 숭보지전(崇報之典)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다시 감명스럽다.
숙종 12년2 갑자(1684년) 겨울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좌의정 송시열이 후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