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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신도비(柳珩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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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京畿道 高陽市 德陽區 幸信洞) 698에 자리한 유형 묘소(柳珩 墓所) 밑 50m 지점에 있는 유형의 신도비이다. 본래의 신도비는 이정구(李廷龜)가 글을 짓고,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써서 1618년(광해군 10)에 세웠는데, 1874년(고종 11)에 이정구의 비문을 정학교(丁學敎)가 다시 글씨를 쓰고, 전액(篆額)을 이남식(李南軾)이 새로 쓴 것이다. 비문은 이정구의 문집인 『월사집(月沙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유형(1566~1615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휘하에 들어가 강화에서 활동하다가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598년(선조 31)에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도와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도 공을 세워 1601년(선조 34)에 충무공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었다. 이후 충청도·황해도병마절도사(忠淸道·黃海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용병술(用兵述)에 능하였고, 통제영(統制營)의 기계 설비와 축성(築城) 등 군사시설을 확립하는데 힘썼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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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증보조공신(贈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예문관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진산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 領經筵 藝文館 弘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晋山府院君) 행가의대부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行嘉義大夫 三道統制使 兼慶尙右道 水軍節度使) 시충경(諡忠景) 유공신도비명(柳公神道碑銘) 병서(幷序)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使) 이정구(李廷龜)는 글을 짓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의홍위 사맹(義興衛 司猛) 김현성(金玄成)이 글을 쓰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전예조판서(前禮曹判書)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하다.
병란이 시작된 후로 여러 장수들이 전후하여 전공을 세운 것이 무척 많으나 도원수 권율(權慄)의 행주 싸움과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순천 앞바다 싸움이 가장 큰 것이다. 적은 행주에서 패하여 한양을 버리고 도망갔고 순천에서 패하여 그 무리를 거두어 그 소굴로 돌아갔으니, 이 양 대첩이야 말로 나라를 중흥시키는 위대한 전적인 것이다.
이때에 한 현감(縣監)이 있어 통제사를 도와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사움에 항상 선봉이 되어, 마침내 전공으로 크게 이름을 세우고 몇 해 아니 되어 상장군에 임명되었으니 그분은 누구인가? 성(姓)은 유씨(柳氏)이고, 이름은 형(珩)이며 사온(士溫)은 그 자(字)이다. 사람됨이 체구가 크고 훤칠하며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하고 얽매이지 않아서 동네의 아이들과 놀 때에 소년들이 모두 어려워하며 받들고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아버님을 여의었고 가계는 날로 기우니 어머니 임씨(林氏)는 가난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런데도 공(公)은 말 달리고 칼 쓰는 일에만 열중하고 생업을 돌보지 않았으며 또 책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어머님이 울면서 말씀하기를, “내가 죽지 못한 것은 오직 네가 있기 때문인데 지금 너의 타락함이 이와 같으니 누굴 의지하여 살겠는가?”라고 하시니, 공(公)이 “제가 꼭 입신하여 어머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겠으니, 어머님께선 근심하지 마소서, 또 제가 있는데 어찌 가난을 걱정하십니까?”하고 물러 나와 울면서 말하기를, “태어나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또 어머니로 하여금 곤란을 겪으시게 하니 사람이 아니로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집안을 돌보아서 가계는 날로 늘었다. 또 스승을 찾아 수학하고 생각을 바꿔 글을 읽고 예의를 익히어 지난날의 호방한 생활을 버리고 독실하게 행하는 선비가 되었다. 문득 탄식하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그 재능을 발휘함에 있어 어찌 반드시 글의 문장에만 속박 받을 필요가 있겠는가?”하며, 아침이면 나가 활 쏘고, 저녁에 돌아와 글을 읽었다. 고금의 치란을 이야기 하고, 뛰어난 공적과 장한 절개를 사모하여 비분 강개하며 나라 위해 몸 바칠 의지를 키웠다.
임진년 난이 일어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의병을 일으켜 강도(江都 : 강화도)에 주둔하니 공(公)은 검을 짚고 이에 따랐고, 이어 서쪽 행재소(行在所 : 임금의 임시거처, 의주)에 이르러 선전관에 임명되었고. 갑오년에 무과에 등제하여 다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선조께서 일찍이 무신들을 불러 활을 쏘게 하시었는데, 공(公)의 외모와 기상이 출중한 것을 보고 이미 눈여겨 보았는데 한번 활을 쏠 때마다 정곡을 맞추니 임금께서 불러 공(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물으셨다. 공(公)이 무릎 꿇고 대답함에,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라 일에 힘써서 너의 조상을 욕되게 하지 말라!”라고 하시며 특별히 말을 내리시어 장려하셨다. 이 때부터 항상 감격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소신(본인)이 어떤 사람이라고 임금께서 기대하신다는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단 말인가?”라고 하며 마침내 등에 ‘진충보국(盡忠報國 :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함)’이란 네 글자를 새겨서 스스로 맹세하였다.
훈련도감에서 장관(將官 : 장교)을 선임하는데 공(公)이 포함되어, 여러 규칙을 신중히 하고 위엄을 밝히니 군사들의 마음이 분발되고 진작되어 간사한 무리들이 깨끗이 없어졌다. 중앙 관직으로부터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보임되었는데, 한음(漢陰) 이상공(이덕형)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백성을 다스리고 군사를 지휘하는 것 등 못하는 것이 없으니 마땅히 큰 고을을 주어야 할 것인데 잘못되어 작은 벼슬을 주어 보내는구나!”라고 하였다. 현은 매우 먼 지방의 바닷가로 토호(土豪)들의 횡포가 백성들의 폐가 되는데도 수령들이 감히 이를 바로잡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 공(公)은 부임하자마자 모든 일을 법률에 따라 결정하고 불쌍한 백성을 은혜로 돌보는데 힘썼다.
한산도(閑山島)에서 수군이 무너지고 원균(元均)이 패하여 죽자 공(公)은 이를 듣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수군을 잃은 것은 곧 양호(兩湖 : 호남과 호서지방)를 잃은 것이니, 나라 일을 어찌 할 수가 없구나. 신하된 자로서 나라를 위하여 죽을 때가 바로 오늘이다.”라고 하며 마침내 피를 뿌리며 백성들에게 맹서하고 여러 고을의 앞장을 섰다. 통제사 이공(公)과 더불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바다의 입구를 지킴에, 이공(公)이 군대의 중요한 업무를 공(公)에게 맡겼으니, 계획하는 것이 모두 시의에 적절하여 군의 진용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천장(天 : 명나라 장수) 제독 진린(陳璘)이 일찍이 공(公)과 함께 왜구를 추격하여 포구로 들어가 혼전중에 조수가 물러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명나라 큰 병선 세 척이 주저앉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적들이 불로서 공격하니 제독과 통제사가 모두 발을 구르며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이 때에 공(公)이 모든 배에 명령을 내려 닻줄을 던져 세 병선의 선미에 묶게 하고 전군에게 힘을 다하여 끌어당기게 하니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이에 전군이 모두 탄복하였다. 순천(順天)의 적과 사천(泗川)의 적이 불로 서로 호응하니, 공(公)이 말하기를, “적이 구원을 청하여 우리와 싸우려 함은 스스로 탈출하여 돌아갈 계획인 것이니, 사천의 적을 맞아 싸워서 퇴로를 끊는 것만 같지 못 합니다.”라고 하며 크게 소리 지르고 앞으로 나가 힘겹게 싸웠다. 이날 적의 탄환 여섯 개가 공(公)에게 맞혔는데, 그 중 셋은 관(冠)을 뚫고, 둘은 바지를 뚫었으며 하나는 오른쪽 갈비뼈에 맞았으나, 공(公)은 오히려 또바로 서서 적을 공격하니 그 의기가 태연하였다. 피가 흘러 엉겨서 살덩어리 같으니 비로소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대장이 어디 계시는가를 물었으나 이미 통제사는 적탄에 맞아 세상을 떠난 뒤였다. 공(公)이 통곡하며 독전에 박차를 가하니, 적의 시체가 바다를 덮고 살아 도망간 자 얼마 되지 않았다.
보고가 올라가니 부산첨사(釜山僉使)에 임명되었는데, 미처 부임하기 전에 경상좌수사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서 한음공(漢陰公)이 이통제사(李統制使)에게 “누가 그대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하고 물으니, 이공(李公)이 대답하기를, “그 충의와 지략이 이 세상에서 유모(柳某)에 비할 자가 없습니다. 관직은 비록 낮지만 크게 쓸만합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니, 이번에 한음(漢陰)이 조정에 아뢰어 이와 같이 임명되었던 것이다. 충청 · 전라수사를 역임하고, 임인년에 통제사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충청병사에 임명 되었다.
북쪽 여진족이 변방을 어지럽히니 조정에서 회령(會寧)이 적을 막는 요충지라 하여 공(公)을 부사로 부임시키고, 곧 북병사(北兵使)로 승진시키었다. 기유년에 경상병사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관서의 오랑캐 노추(老酋 : 누루하치)가 준동한다 하여 평안병사로 옮기어 임명 되었다. 신해년에 갑자기 중풍에 걸리니 병 때문에 교체되었으며, 임자년에 이르러 병이 낳자 마침 황주(黃州)에 적을 방어하는 성을 쌓자는 의논이 있어 공(公)을 황주병사로 임명하였다. 부임할 때에 임금께서 친히 부르시어 원성을 참고 견디며 피하지 말라고 격려하셨다. 공(公)은 심혈을 기울이다가 지쳐 병을 얻게 되어, 을묘년(1615년) 이월에 마침내 황주 임지에서 돌아가셨다. 공(公)은 병인생으로 연세가 겨우 50세이었으며, 고양(高陽)에 장사지냈다.
공(公)의 조상은 휘(諱) 차달(車達)이니 본래 유주(儒州)의 큰 성씨였다. 그 후 휘 언심(彦琛)이 있어 공훈으로 진주에 봉하여지니, 이때부터 진주 유씨(晋州柳氏)가 시작되었다. 조부는 진동(辰仝)으로 공조판서로 있었으며 장상(將相 : 장군과 재상)의 재주가 있었다. 부친 용(溶)은 무과에 올라 경원부사(慶源府使)로 있었는데, 청빈하고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으며, 공(公)으로 인하여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어머니 선산임씨(善山林氏)도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공(公)은 군수 이구순(李久洵)의 딸을 맞이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충걸(忠傑)은 먼저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의 딸을 맞이하여 2남을 낳았으며 뒤에 다시 이원영(李元英)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둘째 아들은 효걸(孝傑)이니 무과에 장원하여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병사 남이흥(南以興)의 딸을 맞이하여 3남을 낳았다. 셋째 신걸(信傑)은 김응하(金應河)의 딸을 맞이하였고, 딸은 진사 윤극에게 시집갔다. 또 공(公)은 측실에서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공(公)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서 의를 중히 여기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며 강직하여 스스로 믿는 바는 반드시 행하였다. 가정에 있어서는 효행이 지극하여, 삼년상을 지내며 죽만 마시면서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서모(庶母)를 모심에 정성을 다하였다. 친척을 돌보는 것은 가깝고 먼 것에 구애됨이 없었으며 혼사는 모두 공(公)이 주선하여 이루어지게 하였다. 해남에 있을 때에 일찍이 공무로 통제영(統制營)에 나갔는데 영(營)의 하급관리가 공(公)에게 불손하게 대하자, 공(公)이 곤장을 치며 말하기를, “종놈이 감히 소속을 믿고, 나를 업신여기느냐!”라고 하였다. 안에 들어가 통제공(統制公)을 뵙고 사실을 아뢰며 사과하니, 통제공이 내심 인물됨을 알아보고 마침내 서로 사귀어 지기(知已)가 되었다.
적과 싸워 연달아 두 척의 배를 노획하였는데 한 장수가 뒤 쫒아와 말하기를, “해남(海南 : 柳珩을 의미함)은 공적이 이미 많으니 배 한척을 나에게 주시오.”라고 하니 공(公)이 흔쾌히 배를 주었다. 그 사람이 공을 아뢰어 큰 상을 받게 되었으나, 공(公)은 이를 비웃을 뿐이고 끝내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관서에 있을 때 한번은 사열을 하는데, 한 기병의 말이 말을 듣지 않아 물러나니, 공(公)이 손수 검을 들어 그 말을 베면서 말하기를, “군중에서 말을 길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을 죽이게 된다.”하고 곧 자기가 타던 말을 내주었다.
북관에 있을 때 선조께서 병에 걸리자 임서인(臨庶人 : 임해군)이 남 몰래 용감하게 죽을 수 있는 병사들을 양성한다는 풍문이 서울과 지방에 파다하였다. 지금의 임금께서 등극하시어 교서(敎書)가 이르렀는데 공(公)은 곧 성문을 닫고 진용을 정비한 뒤 제장과 아전들을 모아 말하기를,“임금께서 승하하시었다는 부음이 전해오지 않았는데, 새로운 교서가 갑자기 다다르니 이는 반드시 서울에 변고가 있는 것이다. 나는 세자를 위하여 죽겠노라!”하고 먼저 사람을 시켜 교서를 보여주길 청하여 중전의 성씨를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성밖으로 나아가 영접하였다. 그 처사함이 비범하고 창황한 때에도 지조를 지키는 것이 평상시와 같았으니 관직에 있으면 맡은 책무를 다할 것과 어지러운 때에는 목숨 바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았던 것이다.
공(公)이 부임하는 곳마다 반드시 먼저 성과 무기를 수선하고, 군량과 물자를 비축하여 난시에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 통제영 및 각 진의 기계와 회령(會寧) 경성(鏡城) 창성(昌城) 삭주(朔州) 등의 성지(城池)는 모두 공(公)이 축성한 것으로 황주(黃州)의 성은 더욱 웅장하였다.
처음에 낙척하였다가 다시 임직에 나온 것을 보고 사람들이 혹 병을 걱정하나 공(公)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병이 난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입에서는 오직 성 쌓는 말 뿐이였다. 생활이 간소하여 비록 여러 차례 큰 진의 수령을 지냈으나 떠나는 날에는 쓸쓸하게 의관과 이부자리 뿐이였다.
공(公)이 돌아가신지 사년에 그 아들 충걸(忠傑)이 박자룡(朴子龍)이 쓴 행장을 가지고 와서 비명을 청하였다. 아! 자룡(子龍)의 행장이 아닌들 내 어찌 그대를 알겠는가? 나는 항상 옛적의 절개가 굳고 의협에 불타는 훌륭한 장수를 못 보는 것을 한탄하였는데, 오직 그대에게서 바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그대가 옛사람과 비견되기를 기대하였는데 그대는 홀연히 가버렸구나. 서북에 일이 생겨도 어찌 그대를 지하에서 일으킬 수 있겠는가? 나는 슬픈 심정으로 명(銘)하노니,
깨끗하게 수신함이 몸가짐인가. 정직하여 변함없음이 성실인가.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절의인가. 굽힐 수 없는 것이 강직인가.
덕양(德陽)의 언덕에 무지개 빛이 땅을 비추는데
답답하여 펴지 못하는 것은 공(公)의 뜻이 아니겠는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와서별제(行瓦署別提) 정학교(丁學敎)는 글을 쓰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종정경부사 한성부판윤 오위도총부 도총관 경연특진관 겸 지의금부사(知宗正卿府事 漢城府判尹 五衛都摠府都摠管 經筵特進官 兼 知義禁府事) 이남식(李南軾)이 전액(篆額)하다.
숭정(崇禎) 기원후오(紀元後五) 갑술 월 일 고쳐서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