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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윤신도비(韓孝胤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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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가마섬(京畿道 驪州郡 康川面 釜坪里 佳麻島)에 자리한 한효윤 묘소에 있는 한효윤의 신도비이다.1626년(인조 4)에 세워진 이 비는 류근(柳根) 이 글을 짓고,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쓴 것이다.한효윤(1536~1580)은 1570년(선조 3)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1574년(선조 7)에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어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며,경성판관(鏡城判官)과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등을 역임했다. 그는 예빈시정(禮賓寺正)신건(申健)의 딸과 결혼하여 3남6녀를 두었는데, 한백겸(韓百謙),한중겸(韓重謙),한준겸(韓浚謙)세 아들 모두 문재(文才)가 있어 학문에 힘쓰는 집안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1579년(선조 12)에 둘째한 중겸을 잃고 크게상심한 나머지 지병이 심해져 한효윤은 이듬해 45세로 생을 마쳤다.
유명조선국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행봉훈랑경성도호부판관겸춘추관기주관한공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行奉訓郞鏡城都護府判官兼春秋館記注官韓公神道碑銘 幷序)
충근정량 효절협책 호성공신 보국 숭록대부 진원부원군 유근(忠勤貞亮效節協策 扈聖功臣輔國崇祿大夫晋原府院君柳根)은 글을 짓고,
통정대부 병조참지 지제교 오준(通政大夫兵曹參知知制敎吳埈)은 글을 썼으며,
보국 숭록대부 행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사 세자우빈객 오위도총부 도총관 김상용(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知 經筵事 世子右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金尙容)은 전액을 올리다.
우리 전하께서 천리와 인심에 순응하여 선조 대왕의 기서(基緖)를 이으니 이륜(彛倫)이 다시 펴지고 일월이 다시 밝아지게 되었다. 이때에 도원수(都元帥) 유천(柳川) 한(韓)공은 준례에 따라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제수되고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조정 공론이 국구가 밖에 나가있음은 마땅치 아니하니 소환(召還)하라 하였다. 서평이 돌아오자 맨 먼저 나를 찾아 선군자(先君子)의 묘비(墓碑)를 청한 일을 되풀이 하였다. 지난 정유년(1597년)에 선군자에게는 이조참판이 증직되었고 을사년(1605년)에는 좌찬성(左贊成)에 증직 되었다. 모부인(母夫人)에게도 이미 정부인(貞夫人)이 제수되었다가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올려졌는데 지금에 와서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에 가증 되었으니 모두 유천(柳川)으로 인하여 추은된 것이다. 경술년(1610년)에 유천에게 함경감사를 제수하였는데 떠나면서 백씨(伯氏) 참의(參議)공과 의논하고, 내가 일찍이 하의(荷衣) 홍(洪)학사와 종유하면서 선군자를 뵈온 일이 있었다. 드디어 나에게 부탁하기를, “내선인의 비는 자네가 명을 쓰게”하였다. 그 후 십수년간 유천(柳川)은 충원(忠原)에 귀양 가 있었고 나도 성밖에서 죄를 기다리고 있는데 매양 자질(子姪)을 시켜 서신을 보내면서 이 일을 말하였었다. 그가 재기하여 원수(元帥)가 되었을 때 나는 먼저 수문(脩門)에 들어가 있었는데 헤어지면서 승낙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또 울며 뜻을 보이면서 이르기를, “옛날 사람들은 약속을 묵혀두지 않았다 하는데 자네는 어떻게 끝내 우리집 부자형제를 유명(幽明)간에 버려 둘 수 있다고 보는가?”하였다. 그 말은 오로지 간장에서 울려나온 소리였으니 감히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할 수만은 없어 삼가 나의 친구 참찬(參贊) 만취(晩翠) 오억령(吳億齡)이 찬한 행장(行狀)을 근거로 서술하였다.
공의 이름은 효윤(孝胤), 자(字)는 근숙(謹淑), 청주가 본관이다. 청주의 한씨는 대성(大姓)이다. 고려개국 때에 종신(宗臣) 휘(諱) 난(蘭)으로부터 크게 드러났다. 대대로 이름난 공경(公卿)이 있었으니 휘(諱) 강(康)은 문혜공(文惠公), 휘(諱) 악(渥) 사숙공(思肅公), 휘(諱) 공의(公義) 평간공(平簡公) 등이 있고, 문경공(文敬公) 휘(諱) 수(修)에 이르러서는 도덕과 문장이 일세의 긍식(矜式)한바 되었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 휘(諱) 계희(繼禧)는 의정부 좌찬성에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인데 여러 서적을 두루 섭렵하여 학문이 정수하였고, 다섯 임금을 내리 섬기면서 총우(寵遇)가 매우 깊었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이시다. 증조(曾祖)는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지내고 좌참찬(左參贊)에 증직된 휘(諱) 사무(士武)이시다. 할아버지는 정선(旌善)군수를 지내시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된 휘(諱) 승원(承元)이다. 아버지 휘(諱)는 여필(汝弼)은 문천(文川) 군수를 지내시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문화 유(柳)씨는 고려 대승(大丞) 차달(車達)의 후예인 사도시 정(司導寺正) 엄(渰)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병신년(1536년) 8월 갑진(甲辰)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신정건(申正健)에게 종유하였으며, 외구(外舅)에게 배웠다. 나이 20세 미만에 연중 해액(解額)하면서 자못 성칭이 있었다. 정묘년(1567년)에는 상사(上舍)에 들어가 경오년(1570년)에 대과에 등제하였는데 신은(新恩)의 3일간은 유가(遊街)라 하지만 공만은 우인(優人)을 대동하지 않았었다. 괴원(槐院)에 선발되어 들어갔는데 성친(省親)하기 위하여 하향(下鄕)을 청하니 동료들은 하급자의 풍기를 단속하며, 허가하지 않았으나 그대로 귀향하였더니 예에 따라 고과의 성적이 최하위가 되었었다. 신미년(1571년)에는 의정공의 상을 당하였고 계유년(1573년)에 복을 마치니 즉시 서용이 되어 갑술년(1574년)에는 부정자가 되고 한원(翰苑)에 천보되어 검열(檢閱) 대교(待敎)를 거처 봉교(奉敎)에까지 이르렀다. 병자년(1576년)에는 수조(水曹)의 좌랑이 되었다가 조금 후에는 전중(殿中)으로 옮겼다가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경사에 가게 되니 성균관 전적(典籍)을 체수(逮授)하였다. 중국에 가서 회동관(會同館)에 있을 때에 제독(提督)의 주사(主事) 당학징(唐鶴徵)한테서 본조의 종계(宗系)가 바야흐로 신증(新增)하여 찬수(纂修)되고 있음을 듣고 고본(稿本)을 보기를 청하니 제독이 사신(使臣)들을 불러 앞에 대하고 내보이고는 곧바로 덮어버리니 사신이나 서장관이 모두 망연(茫然)하여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는데 공만이 암송(暗誦)하여 써냈다. 그 후에 원본(原本)을 입수하여 대조해 보니 관연 한 글자도 그르침이 없었다. 정축년(1577년)에는 본직에다 종학(宗學)의 사회(司誨)를 겸하였다. 경성(鏡城)판관이 비자 세 번을 연이어 제수하였으나 조의가 거듭 탄핵하여 논체되니 공은 그 소임을 잘한 것이라 하여 의차(擬差)하였다. 그때에 조정에는 바야흐로 사론이 둘로 나눠지는 판국 이였으나 공은 평심으로 당색을 주장함이 없었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선용(選用)을 바래서 하루아침에 멀리 나가게 되니 아쉬워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만류치는 못하였다. 공은 명을 받은 즉시 떠나 임지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신칙을 하니 열진(列鎭)이 경탄(敬憚)하였다. 공은 본래부터 깡마른 증세에다 비만증마저 있었는데 풍토에 시달리고 보니 숙병(宿病)이 더하여 ~일자결~ 하니 대관이 이것을 꼬투리로 잡고 탄핵하여 파직시켰는데 사실은 공을 아껴서 그리한 것이다. 기묘년(1579년) 가을에는 둘째 아들을 잃고 매우 상심하여 병이 더하였기에 공직 할 수가 없어 종부시(宗簿寺)주부에 제수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경진(庚辰) 5월 3일에 영영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춘추는 45세였다. 치상은 먼저 의정공의 치상과 한결 같았으니 유의(遺意)에 따른 것이다. 이해 7월에 원주(原州)의 읍치 서쪽 가마도(佳麻島) 선영 아래에 장사지냈다가 29년 뒤에 자리가 좋지 못하다 하여 묘를 옮겨 □□산 외록(外麓) 손향(巽向)의 언덕에 부인과 합장하였다.
공은 천자가 법도(法道)에 가까워 어려서부터 열심히 공부하였고 글의 뜻을 매우 투철하게 보았기에 또래들이 경전의 난해한 곳을 만나면 바로 공에게 물어 바르게 하였다. 참판 박민헌(朴民獻)이 서화담(徐花潭)에게 주역을 배우고 중년에 경기의 별장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공이 찾아가 배워 정묘한 뜻을 탐색하고 발명한 바가 많으니 박공이 자주 공의 성취를 칭찬하였다. 공은 스스로 말하기를 “무오년(1558년)간에 외가의 서적을 열람하다가 『근사록』 한질을 얻어 그때부터 이 책을 존신(尊信)하기 시작하였다”하면서 『근사록』과 『심경(心經)』을 항상 책상위에 올려놓고 손에는 잠시도 책을 떠나지를 아니하였다.
대체로 기묘년(1519년) 을사년(1545년)이래로 여러 차례 사화를 겪다 보니 선비라는 사람들이 사우(師友)와 상종하면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하고 익히는 것을 크게 꺼려왔는데 공만은 홀로 분발하여 사귀어온 사람들은 모두가 이름난 명인과 으뜸가는 선비들이었으니 그중에서도 남언경(南彦經)과 한윤명(韓胤明)이 가장 지취를 같이하고 어울려 즐겁게 지내온 사이였고, 한수(韓脩) 같은 이는 공보다 몇 십 년이나 나이가 많은 처지였으나 나이를 잊고 교유를 허락하기까지 하였다. 공이 삼청동의 고상(故相) 유(柳)공의 집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는데, 전한(典翰) 오(吳健)건이 대단한 명인이었으나 아직껏 한번도 만나 본 일이 없었는데 그가 느닷없이 달밤에 찾아와서 서로 토론해 보고서는 마침내 절구(絶句) 한수를 써주고 갔는데 거기에는 ‘주인청탈속(主人淸脫俗 주인은 맑고 세속에서 벗어났다.)’의 글귀가 있었고 그로부터는 서로 즐겁게 사귀었다 하니 사류(士類)들의 알아줌을 이와 같이 받았다. 공은 일찍부터 수립한 바가 있어 유속을 따르지 아니하였고 말씨나 동작은 고인을 본받았으니 남에게 유달리 보이려는 행위가 없어 사람들이 현 불초를 막론하고 모두가 공을 사모하고 따랐다. 당시 시속에서 예(禮)를 모르는 것을 공은 병통으로 여기고 자녀의 가취(嫁娶 시집보내고 장가들임)에는 반드시 예대로 친영(親迎)을 하니 인하여 가법(家法)이 되었고, 계자(季子)의 가관(加冠)을 할 때에도 청빈(請賓)과 삼가(三加)의 예에 따랐다. 또 내간(內艱)을 당하여서는 치상(治喪)하는 절차를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의하여 하고 졸곡(卒哭)까지는 좁쌀죽만을 먹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거상(居喪)하면서 잠을 안잘 수는 없으나 이불을 덮고 평인처럼 자는 것은 불가하다”라 하고, 「향당편(鄕黨篇)」의 ‘재숙의(齋宿儀)’를 모방하여 침의(寢衣)로 상기를 마쳤으며, 남녀를 막론하고 대공(大功)이상의 복에는 최질(衰絰)을 갖추어 성복(成服)하였고, 부인의 상에도 질장(絰杖)을 『예경(禮經)』에 준하여 행하였는데, 이어 장자가 첫 번째 부인의 상을 당하여 재최(再衰)로 기년복(朞年服)을 입으니 처상(妻喪)에 복을 갖추어 입음이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공에게는 실녀(室女)가 하나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그의 현숙함을 듣고 아들과의 혼인을 청함에 승낙치 아니하니 위협을 하려 하였다. 이에 공이 피해서 절간으로 들어가 일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매 모두 위험스럽게 여겼으나 결국 무사하게 되니 사림(士林)들이 공의 조수(操守)를 높게 평가하였다. 공의 막내 외숙인 시직(侍直) 유광찬(柳光纘)이 숙부(叔父)인 유관(柳灌) 정승의 뒤를 이었는데 을사의 참화(慘禍)에 부자가 다 화를 당하고 그 아내도 적몰(籍沒)되어 관비(官婢)가 되고 의지할만한 자녀마저 없으니 시직 공의 여러 조카에서 공을 가려서 그의 누이로 아내를 삼게 하여 사후를 부탁하려 하니 공은 지성을 다하여 봉양하였고, 유 정승이 설원(雪冤)이 되니 공은 힘써 동종의 자손을 취하여 뒤를 이어 집안을 맡길 것을 권하고 자기는 관여하지 아니하였다. 무릇 학문을 가림이 정하고 자득(自得)함이 깊으며 신고(信古)가 독실함은, 사람마다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공만은 용감스럽게 하여 냈으니 그 성취한 바가 의당 여기에 그치지만은 아니하였을 터이나 하늘이 나이를 주지 아니하여 지위가 덕기에 걸맞지 않았으니 아마도 후세를 기다리느라 그러함일까?
부인 평산 신(申)씨는 고려 태사 휘(諱) 숭겸(崇謙)의 후손인 예빈시 정(禮賓寺正) 휘(諱) 건(健)의 따님이다. 어머니는 순흥 안(安)씨 회양부사 처명(處明)의 따님으로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예이다. 부인은 가정(嘉靖) 임진년(1532년) 5월 계축(癸丑)일에 태어나 나이 18살에 의정(議政)공에게 시집왔다. 의정공은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는데 부인도 유덕자의 배필로서 어김이 없었다. 먼저 의정공이 벼슬을 그만두고는 원주(原州) 섬강(蟾江)의 별장(別莊)에서 노년을 보내면서 종가(宗家)의 가사(家事)를 모두 의정공 부인에게 전해버렸는데 부인은 근실하게 모든 것을 받들어 선령의 봉제사에서 부엌일까지 도리를 다하였다. 집안 살림이 청한(淸寒)한데다 의정공은 살림살이에 마음을 쓰지 않아서 비록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으나 부인은 부지런히 모으고 경영하면서 오직 의정공의 앞날만을 걱정하였다. 의정공이 관사(館舍)에서 세상을 뜰 때에도 부인은 상제 두 사람을 데리고 묘 옆에 여막을 치고 친히 제전을 맡았고 묘소에 올라가 호곡(號哭)하면서 3년을 마쳤다. 이때에 세 아들은 성취를 하고 큰딸도 시집을 갔으니 남은 것은 출가하지 않은 딸들만 있었지만 그래도 숫자가 많았는데 부인은 밤낮으로 헤아려 예를 갖추어 모두 혼사를 마쳤다. 또 부인은 나이 이미 늙어서 시어머니 유(柳)씨의 상을 당했는데 제수를 마련하는데 정성을 다하여 시종 해이함이 없었다. 부인의 친정 부모의 신주(神主)가 병화를 만나 보전치 못하게 되었고 서손으로 승중(承重)한 사람도 후사가 없어 부인이 두 아들에게 부탁하기를, “여자는 비록 친정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지만 세상에는 더러 외손(外孫)에 의탁하여 제사를 받는 사람도 있느니 나는 나의 부모님을 위하여 신주(神主)를 고쳐 만들어 내가 죽은 후에는 중겸(重謙)의 아들 선일(善一)에게 전하여 그의 당대(當代)만 지내게 하고 싶으니 그것은 중겸이 나의 부모님에게 다른 손자들보다 유난히 거둠을 받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두 아들들은 그 지극한 뜻에 감동하여 한결같이 그의 부탁한대로 하였다. 유 시직의 부인은 곧 부인의 언니로 후사를 부탁하였던 사람이며 30년을 함께 살면서 부모처럼 섬겼다. 또 친정으로 언니가 되는 분 하나가 난리로 서로 헤어졌었는데 동쪽 군(郡)의 산골 속에 우거하고 있음을 듣고는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사람을 보내어 데려다가 의식과 거처를 함께 하기를 그가 세상을 마치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부인에게는 속량하지 못한 서제(庶弟) 한사람이 있어 남에게 매여 있었는데 부인이 그 주인을 후하게 대하고 속량 해다가 자기가 낳은 자식과 다름없이 무양(撫養)하였다. 자손을 대하여서는 고루 사랑하였고 친척을 대함에는 은애가 있었다. 전후로 두 아들을 따라 봉양을 받기를 5읍(邑)과 3영(營)에 이르렀으나 한번도 공사에 간여한 일이 없었고, 매양 설, 명절이나 기일이 되면 받쳤던 음식을 남김없이 그 자리에서 나눠주면서 항상 천은에 감축하였다. 참의(參議)가 과거로 발신(發身)함이 아니었는데 일찍이 승선(承宣)에 의망된 일이 있었다. 부인이 듣고 못마땅해 하면서 이르기를, “분수대로 고을살이나 얻어 하는 게 너의 본분(本分)이니라”하였다. 서평(西平)공이 오랫동안 재상(宰相)의 지위에 있으면서 근친을 위하여 말미를 얻으면 선대왕께서는 여러 차례 약제(藥劑)를 내렸으며, 더러 중국에 가는 사신의 의망(擬望)에 오르면 바꾸라고 명하기까지 하였는데 모두 부인을 위해서 그러한 것이다. 부인이 관서의 관아에 있을 때 병이 매우 심하였으나 선대왕께서 빈천(賓天)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밥상에 고기를 물리치면서 이르기를, “내가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어찌 감이 임금의 상사를 듣고도 음식을 바꾸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고 하였다. 참의공이 몸소 시탕(侍湯)을 하고 있었는데 인산(因山)이 가까워지자 기일에 되서 빨리 떠나도록 권하여 보냈으니 대의를 훤히 이해함과 한결같이 섬길 줄 아는 것이 부인들의 식견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었다. 무신년(1608년) 5월 27일에 기성(箕城)의 영아(營衙)에서 돌아가시니 이해 7월에 의정공의 옛 묘를 천장하여 신천(新阡)에 부인과 합장하였다.
아들은 셋을 두었으니 맏이 백겸(百謙)은 호조 참의(參議)인데 학행이 있어 천거를 받아 관계에 들어갔었으나 늙을수록 지키는 바는 더욱 견고하였다. 다음은 중겸(重謙)인데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아버지보다 1년 앞서 죽었다. 끝은 준겸(浚謙)인데 곧 서평부원군이다. 딸은 여섯을 두어 맏이는 사헌부 집의(執義) 홍적(洪迪)에게 출가하였는데 홍적은 이른바 하의학사(荷衣學士)이다. 다음은 예문관 대교(待敎) 심흔(沈忻)에게, 다음은 의정부 사인(舍人) 권흔(權盺)에게, 다음은 사인(士人) 서용갑(徐龍甲)에게, 다음은 해주판관 황유길(黃有吉)에게 각각 출가하고, 다음은 집에 있다가 요절 하였다.
참의는 구(具)씨에게 장가들어 후손이 없었고, 다시 김(金)씨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흥일(興一)로 예문관 대교이고, 딸은 사인 홍비(洪棐)에게 출가하였다.
생원은 이(李)씨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선일(善一)은 삭령(朔寧)군수요, 덕일(德一)은 사섬시(司贍寺) 봉사이며, 딸은 진사 심대형(沈大亨)에게 출가하였다.
서평은 황(黃)씨에게 장가들었으니 증 예조참판 성(珹)의 따님이다. 아들 회일(會一)은 통정대부 남양(南陽)부사요, 소일(昭一)은 일찍 죽었다. 맏딸은 종부시 정(宗簿寺正) 이유연(李幼淵)에게, 다음은 사간원 정언 여이징(呂爾徵)에게, 다음은 홍문관 응교 정백창(鄭百昌)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다음은 바로 당대(當代)의 중궁전하(中宮殿下)이시다.
집의 홍적은 2남 1녀를 낳으니 장남 여익(汝翼)은 돈령부 도정이요, 여량(汝亮)은 형조 정랑이다.
대교 심흔은 1남 2녀를 낳으니 장남 정화(廷和)는 청성군(靑城君)이다.
사인 권흔은 1남 3녀를 낳으니 장남은 한서(僩徐)이다.
사인 서용갑은 2남 1녀를 낳으니 장남 운준(雲駿)은 장악원 사평이요, 운기(雲驥)는 일찍 죽었다.
판관 황유길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남자는 입영(立潁), 입치(立緻), 입현(立顯)이요, 증손(曾孫) 이하는 다 기재할 수가 없다. 금년 봄에 왕세자를 책립(冊立)하였으나 선원(璿源) 옥첩(玉牒)에 실린 인지(麟趾) 인정(麟定)이라 감히 여기에 함께 기록할 수는 없다. 아. 성하도다! 어찌 천운이 아니랴? 명(銘)하여 이르기를,
하늘에는 분명한 징신이 있나니, 선을 도움이 두터움이도다.
그 당대에서가 아니라, 반드시 후손에게 갚아 주느니라.
공과 같은 재주는 하늘에서 점지하여 주심일 텐데.
그러나 지위도 없고 수명도 없었으니, 그 까닭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하늘은 기필코 어렵다 한다면, 더러는 정하지 못한 듯도 하지만,
이미 정함이 있기 때문에 메아리 울리듯 응한게 아니겠는가?
공은 일찍부터 학문을 즐겨, 기갈에 먹고 마심보다 더하였도다.
공은 맨 처음 석갈(釋褐)하면서부터, 사적은 한원(翰苑)에 통했었건만.
이군(貳軍)를 겨우 맴돌다가, 나이 사십여에 몰하였으니
선이 참으로 쌓이지 않았다면, 하늘이 어떻게 복을 내렸겠느냐?
틀림이 없도다! 경상을 끼친다는 것은, 덕을 심음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백씨는 바로 원방(元方) 이였나니, 정훈을 잘도 지켜왔도다.
중씨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성화만은 이미 널리 펴졌도다.
계씨는 곧 백미(白眉)였나니, 울연한 포부를 지녔었도다.
문무(文武)는 길보였으므로, 선후에게 은총을 받았었노라.
홍화(弘化)를 이 나라에 주신 것은, 오직 신명께서 수고하심일 터이나.
이에 부인에게까지, 난고를 받잡게 되었나니라.
자인한 품성을 타고 낳기에, 상수를 누리게 되었음이로다.
백씨는 여러 차례 고을을 맡았고, 계씨는 여러 도를 안찰하였도다.
반여에는 학발(鶴髮)을 실고, 내복으로 하상(霞觴)을 올리는구려.
세상에서는 영화롭게 여겼나니, 공은 죽었어도 죽음이 아니였노라.
천계 3년(1623)의 봄에 이르러, 성상(聖上)께서 즉조(卽祚)하시니,
방명은 더욱 새로워졌도다. 공은 성손을 두어서,
곤극(坤極)에서 모의(母儀)를 떨치게 되었나니, 실인즉 하늘의 돌보심이지,
어떻게 인력으로 이룰 일이던가? 계씨는 서평에 봉해지고,
지금은 바로 국구(國舅)이니라. 공에게도 가융(可隆)의 은총 내리니,
백료(百僚)의 우두머리 되었노라. 공의 공근으로 인하여,
복리가 이토록 이어옴이니, 나는 공의 사적 기술하여,
후세에 밝게 보이고자 함이로다.
천계(天啓) 6년(1626년) 10월 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