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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신신도비(盧思愼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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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백석리(京畿道 坡州市 坡州邑 白石里)에 자리한 노사신 묘역에 있는 노사신의 신도비이다. 묘소는 본래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에 있던 것을 1940년에 현 위치로 옮긴 것이며, 조부(祖父) 노한(盧閈)과 아들 노공필(盧公弼) 등 4대에 걸친 묘가 조성되어 있다. 1501년(연산군 7)에 세워진 노사신신도비는 홍귀달(洪貴達)이 글을 짓고, 임사홍(任士洪)이 글씨와 전액(篆額)을 쓴 것이다.노사신(1427~1498년)은 1453년(단종 1)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바로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에 임명될 정도로 뛰어난 문재(文才)를 나타냈다. 이후 세자우문학(世子右文學),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와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등을 역임하였고, 『경국대전(經國大典)』 ,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95년(연산군 1)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고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는데, 평소 독서를 좋아하여 경서(經書), 사서(史書), 백가서(百家書) 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에 관련된 서적까지 널리 통하였다고 한다. 노사신은 첨지(僉知) 경유근(慶由謹)의 딸과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추충정난익대순정명량좌리공신(推忠定難翼戴純誠明亮佐理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 文館春秋館觀象監事)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 증시문광(贈諡文匡) 노공신도비명(廬公神道碑銘) 병서(幷序)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좌참찬 겸 동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 의금부사(議政府左參贊 兼 同知經筵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 成均館 義禁府事) 홍귀달(洪貴達)이 글을 짓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의흥위 상호군(行 義興衛 上護軍) 임사홍(任士洪)이 글을 쓰고 아울러 전액(篆額)을 함.
하늘에서 위인을 세상에 낼 때는 대개 쓸모가 있어서인데, 이것은 우리 선성공(宣城公)에게서 증명이 되었다. 공(公)의 학문 · 도량 · 도덕 · 공명을 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네 분 임금의 다스림이 사실은 공(公)으로 연유한 것이니 하늘이 우리 공(公)을 낸 것이 어찌 헛된 것이겠는가?
삼가 살펴 보건데 공(公)의 휘(諱)는 사신(思愼)이요, 자(字)는 자반(子胖)으로 교화현(交河縣) 사람이다. 증조부의 휘는 균(鈞)이며 천우위(千牛衛)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한 후, 영의정부사를 증직 받았다. 조부의 휘는 한(閈)으로 의정부 우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를 공숙(恭肅)이라 하였다. 부친 휘 물재(物載)는 동지돈녕부사를 지냈으며, 의정부 영의정과 교양부원군(交陽府院君)으로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따님이니 곧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이며, 교양군(交陽府院君)은 영의정 심온(沈溫)의 따님에게 장가갔으니 또한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선덕(宣德) 정미년(1427년)에 공(公)이 태어났다. 공이 비록 화려한 가문에서 생장하였으나 전혀 사치한 습성이 없었고 가르쳐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서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어려서 의정(議政) 홍응(洪應)과 함께 공부할 적에, 홍응의 외숙인 참찬 윤형(尹炯)은 사람보는 눈이 있었는데 공을 한번 보고 특출함을 알고서 홍응에게 이르기를, “노씨(廬氏)집 아이는 참으로 큰 인물 감이니 필경은 그 명예나 지위가 마땅히 너와 더불어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후에 과연 그러했다.
경태(景泰) 신미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계유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박사(博士)가 되었다. 이후 부수찬으로 승진하였다가, 여러 차례 전보되어 성균관 직강 겸 예문관 응교(應敎)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국가의 사명(詞命 : 문체의 한 가지)을 관장한 것으로 문관의 큰 영예이다. 이후에 사헌부 지평(持平)과 세자 시강원 우문학(右文學)을 역임하였다.
세조가 공을 현명하다고 여겨 빨리 등용하고자 하니, 일년 동안에 오품계를 승급하여 좌문학(左文學)을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고, 이어서 우부승지 · 도승지로 승진하게 되었으니 무릇 나라의 중요한 일이 모두 공에게 맡겨졌으며 재상에 임명되기에 이르러서도 또한 매사를 자문하였다.
항상 내전으로 불려 들어가 경사를 강론할 때에는 공(公)이 분별하여 대답하는 것이 매우 민첩하여서. 왕이 매일 밤중까지도 피곤함을 잊게되니 공(公)이 궁중에서 유숙하는 날이 많았다. 때로는 공이 휴목(休沐 : 집에 가서 목욕을 하는 것=관리의 휴가)한다는 이유로 궁 밖으로 나오다가, 급히 부름에 응하여 되돌아 들어가기도 하였으니, 하루라도 한가하게 집에서 보낸 적이 없었다. 왕이 재정과 군정을 중요하게 여긴지 오래되어서, 공을 발탁하여 호조판서에 임명하고 이어서 도진무사(都鎭撫使)를 겸하게 하였다. 이때 상정국(詳定局)을 설치하고 경국대전을 편찬함에 있어 대신들에게 명하여 각전의 찬술을 나누어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호전(戶典 : 호조에 관련된 법전)은 공이 편찬한 것이다.
왕이 일찍이 재상의 재목을 평론 할 때 공(公)을 보고 “제일 활달하다.”고 하셨다. 왕이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의 두 과거를 실시하자 공이 연이어 급제하였다. 성화(成化) 무자년에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함에, 남이(南怡)가 역모죄로 죽었는데 이때 공(公)이 공적이 있어서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翼戴功臣)으로 책봉되어 의정부 우참찬으로 전보되었다가 다시 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이에 명나라 사신 강호(姜浩)가 왔는데 공(公)이 접반사가 되어서 법도에 맞게 사신을 대접하니, 강호가 “공이 예를 알고 행한다.”고 칭송하였다. 그가 돌아갈 때 공이 치질이 있어서 도중에 말타기가 곤란함을 안 강호(姜浩)가 공(公)에게 자신의 수레를 타도록 하고, 자신은 말을 타고 갔으니 그가 공을 중히 여김이 이와 같았다.
성종이 즉위하여 그 보좌한 공훈을 기록하여 또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의정부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후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 임인년에 평안도에 심한 가뭄이 들고 계묘년에는 경기도에 또 기근이 드니, 공이 모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양도의 백성들이 공에게 의지하여 생명을 보존하였다. 황해도와 평안도는 지역은 넓으나 인구가 적어서 조정에서 사민(徙民 : 다른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킴)하여 그 땅을 채우는데, 공이 체찰사가 되어 이름을 기록하여 징발하는 것이 합당하니 이주하는 자의 원망이 없었다.
정미년에 지금의 황제(명나라 효종=홍치제)가 등극하자, 공(公)이 우의정으로 명나라의 수도에 가서 축하하였다. 홍치 신해년에 나라에서 장수를 보내어 여진인 니마거(尼麻車)의 죄를 문책할 때, 왕이 북방의 방비가 허술함을 염려하여 공(公)으로 하여금 변방으로 가서 그것을 단속하도록 하였다. 이어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금상(연산군)의 즉위 다음해인 을묘년에 영의정에 승진하여 얼마 있다가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는데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궤장(几杖 : 나이든 원로대신에게 하사하는 책상과 지팡이)을 하사 받았다.
무오년(1498년) 9월 임인일에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 72세이다. 처음 병이 들었을때 왕이 내의에게 치료를 명하였고 중사(中使 : 환관)를 보내 계속하여 병세를 살폈다. 이미 병이 깊어짐에 왕이 승지를 보내어 유언을 묻게 하니, “신이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으나, 다만 경연에 부지런히 임하시고 형벌과 시상은 법도에 맞게 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왕이 매우 슬퍼하여 삼일간 조회와 시장을 철폐하시고, 부의를 보통보다 더하였으며,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를 문광공(文匡公)이라 하였다.
공(公)의 마음이 너그럽고 도량이 커서, 세상의 번잡한 괴로움이나 걱정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일찍이 감찰분사(監察分司)가 되었는데 군자감(軍資監)에서 군량미를 비교하여 조사할 때 매우 시끄럽거늘, 공이 붓을 잡아 서안에 “대장부는 광명정대하여 평생의 뜻이 곡식의 출납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썼으니, 그 기상과 도량을 알 수 있다.
공(公)의 선조 소유의 노비 가운데 장부에서 누락된 노비가 해미현(海美縣)에서 살고 있었는데, 구씨(具氏) 성을 가진 읍인이 자신의 소유라 주장하며 관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사실이 아니므로 소송에 지게 되었다. 그러자 공(公)에게 와서 고개를 조아리며, “나는 달리 다툴 힘이 없고 이에 의지하여 살 뿐인데 이제 어찌 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이 불쌍히 여겨서 즉시 그 문서를 불사르자 그 사람이 감읍하였다. 공(公)의 관대함이 사물에 미치는 것도 대개 이와 같았다.
공(公)은 독서를 좋아하여 항상 손에서 서책을 놓지 않았으며, 무릇 경서 · 역사서 · 백가서(百家書 : 제자 백가의 책)로부터 불교 · 도교의 서적에 이르기까지 모두 널리 통하였다. 더욱이 성리학의 연원에 이르러서는 더욱 정밀하였으니, 당시 박학다식하고 정심 자세한 사람은 그 한 사람뿐 이였다. 성종이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볼려고 할 때 혹 강관(講官)이 구두에 능하지 않으면 공(公)에게 구결을 달도록 명하였다. 율여신서(律呂新書) ·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및 사람들이 해독하기 어려운 서책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아가 바로 잡도록 명하고, 혹 번역하여 그 뜻을 드러나도록 하니 사람들이 세남비서(世南秘書 : 당태종의 비서 우세남)에 비유하였다. 공(公)이 비록 문사(文詞)을 즐겨하지 않았으나, 구태여 시문을 지으면 그 솜씨가 문장의 자구나 수식하는 자가 미칠 바가 아니었다. 나라의 큰 의논이 있으면 공(公)이 옛날의 일을 인용하여 현재의 일을 증명하고 붓을 휘둘러 주석을 달면 곧 모든 것이 합당하여 행할 수 없는 것이 없었으니 일시의 논자 중에 그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
공(公)은 굴신영허(屈伸盈虛 : 구부러졌다가 다시 펴지고 가득 차면 다시 비게 됨)의 이치에 통하여 생과 사를 한가지로 보고 득과 실을 동일시하여 무릇 슬픔과 기쁨, 빈궁과 영달 등 외부로부터 이르는 것에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성품이 조용하고 한가하니 평생에 번잡한 도성과 시장을 싫어하여 도성 서쪽의 집에서 거처하기를 좋아하였다. 스스로 그 서재를 보진(葆眞)이라 이름 짓고, 그 당(堂)을 천은(天隱)이라 하여 방안에는 가득히 책 뿐이었다.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좌석을 벌이되 다만 취할 뿐이요, 진기한 것으로 호사를 과시하지 않았으며 재물을 위한 일에는 욕심이 없어 뜻을 두지 않았다.
공(公)은 첨지 경유근(慶由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공필(公弼)은 문과에 합격하여 의정부 우참찬이고, 차남 공저(公著)는 현릉 참봉을 지냈으며, 삼남 공석(公奭)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호조정랑이고, 사남 공유(公裕)도 사마시에 합격하여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는데, 공저(公著)와 공석(公奭)은 공(公)보다 먼저 죽었다. 딸은 종친부 전적(典籍) 구장손(具長孫)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2남 1녀를 두었으니 계년(繼年)과 계종(繼終)이고 딸은 정인년(鄭麟年)에게 시집갔다. 공(公)의 손자는 지금 남녀 공히 오십여명을 헤아릴 수 있으니, 평소에 선을 행한 보답이 어찌 거짓일 수 있겠는가?
이해 11월 갑진일에 금천(衿川) 고사리(高寺里)에 있는 공숙공(恭肅公)의 무덤 옆 언덕에 장례 지냈다. 슬프다! 시신은 흙으로 돌아갔으나 영혼은 가지 않는 곳 없으니 장차 상서러운 봉황과 신령스런 공작이 되어 세상을 경사스럽게 하려는가? 그 또한 상서러운 별과 경사스런 구름이 되어 하늘에서 빛나고 지상을 윤택하게 하려는가? 반드시 늘 변치 않을 것이다.
후일 공(公)의 풍도를 흠모하는 자가 있어 말갈기를 잡고 예를 다하여“공(公)이 홀로 여기 계시다.”라고 하리니, 어찌 공(公)을 아는 자가 공(公)의 덕업을 다 기술하지 않으리요? 그 대강은 위와 같다. 명(銘)하기를,
넓고 넓은 하늘에 원기가 충만하도다.
사람됨을 따름에, 오직 우리 공(公)을 생각하노라.
훌륭한 우리 공(公)이요, 동방의 으뜸이라
눈에는 천지가 들어있고, 가슴에는 큰 바다를 품었도다.
다듬지 않은 옥이요, 허심탄회한 마음이라
문으로 널리 통하고, 도에 나아감이 깊구나.
넓고 큰 식견이 아득히 깊은 뿐이로다.
훌륭한 임금이 즉위하심에 영웅의 힘을 다하였고
공(公)이 옆에서 도와 뜨을 함께 하며 눈과 귀가 되었네.
밤늦도록 도를 강론하고 내전에 유숙도 하였으니,
언행을 듣고 헤아림에 은덕이 흘러 넘치도다.
십사년의 다스림은 대부분 공(公)의 업적이구나,
아쉬워 붙잡아도 미치지 못하니 유상후성(留相後聖)이로다.
한마음으로 사조를 섬김에 온 힘을 다하였고
두 번의 공훈으로 공업이 이루어졌도다.
백발이 성성해도 충경(忠敬)은 쇠하지 않았구나.
성서(城西)에 저택이 있으니 한가롭게 요양하도다.
천은당(天隱堂) 깊은 곳, 사면에 도서로 가득 찼으니
다투어 기이한 것을 물으러 오니 구름처럼 보이는구나.
임종시에 왕도 사람을 보내어 후사를 물었으니
형벌은 마땅하게 하고 학업에 힘쓰라는 오직 이 말 뿐이로다.
아! 죽을 때까지 힘쓰는 공(公)의 충성심이여
널리 지난날을 보고 그 누가 시종(始終)을 덮으리요?
나의 명(銘)은 아첨이 아니요, 청사에 찬란히 빛나리라.
홍치(弘治) 13년 경신 5월 일 비석을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