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의왕청계사 청계사사적기비(義王淸溪寺 淸溪寺事蹟記碑)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1유형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개관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京畿道 儀旺市 淸溪洞) 산 11번지에 자리한 청계사(淸溪寺) 안에 있는 청계사사적기비(淸溪寺事蹟記碑)이다. 청계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는데, 대찰(大刹)이 된 것은 1284년(고려 충렬왕 10)에 조인규(1237~1308)가 사재를 들여 중창하고 원찰(願刹)로 삼은 이후이다. 그 때부터 100명이 넘는 수도승이 상주하였고, 자손들이 이곳에 조인규의 사당을 짓고 전장(田莊)과 노비를 두어 대대로 제사를 지내며, 500여 년간 조인규 가문의 원찰로서 중창을 거듭하였다.
1689년(숙종 15) 6월에 세워진 이 사적비는 조인규(趙仁規)의 11대손인 조운(趙橒)이 글을 짓고, 윤창적(尹昌績)이 글씨를 쓴 것으로, 이곡(李穀:1298~1351)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에는 조인규사당기(趙仁規祠堂記)가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는 조인규의 생애와 청계사 창건의 과정, 그리고 1689년(숙종 15) 3월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6월에 재건했던 사정들이 기록되어 있다.
청룡산(靑龍山) 청계사(淸溪寺)는 바로 고려조의 시중 조정숙공(趙貞肅公)의 별장이다. 공의 휘는 인규(仁規, 1227~1308년)요 자는 거진(去塵)인데, 평양부(平壤府) 상원군(祥原郡) 사람이다. 어머니 토산군(土山郡)부인 이씨의 꿈에 해가 품에 들어와서 임신하여 원나라 태종 9년 정유(1237년)에 공을 낳았다.
공의 많고 넉넉한 덕과 공적은 가승(家乘)과 국사에 실려 있으므로 다시 논해 저술한 바 없다. 그래서 잠시 고인이 공을 칭송한 바를 들어 증명하면,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년)이 쓴 사당기이다. 사당에 이르기를 “공은 나면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명민(明敏)하였고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말이 적고 풍채는 수려하였는데 4대의 왕을 보필하여 아름다운 대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비로소 관을 쓰고 띠를 매 조정에 나아가 빈객과 논하였고 마침내 국왕을 존중하고 백성을 보호하여 국가의 중요한 신하가 되었다. 또 이르기를 “권간(權奸)을 몰아내어 명분을 바르게 하고 도읍을 회복하여 국가를 안정시키고 우리나라(고려) 백성들로 하여금 화목하고 편하게 살게 하였다”고 하였다. 원나라 세조 역시 일찍이 공을 보고 탄복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고려인 같지 않도다. 어찌 그 진술하고 접대함이 그리 상세하고 분명한가. 언사와 행동거지가 고려인과는 같지 않도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릇 가정이 사람들에게서 들은 바이다. 원나라 세조와 같은 영주(英主)도 이와 같이 삼가 탄복하였으니 공의 현명함을 엿볼 수 있다.
고려말에 북방에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원에 이를 진주할 때마다 공을 보냈고 공이 가면 일이 잘 해결되어 얻은 바가 많았다. 필마(匹馬)로 원으로 간 것만도 수십여 회나 되었다고 한다. 대덕(大德) 을사년(1305년)에 충렬왕(忠烈王)은 공을 평양백(平壤伯)에 봉하고 관료들을 배치하여 조회 때는 홍개(紅蓋)와 옥대를 갖추도록 하였으니 왕은 지극한 의례로써 공을 총애하심이 이러하였고 나라에 일이 있을 때에는 공에게 자문을 받아 일을 결정하였다.
공은 일찍이 청계산에 별장을 짓고 또 소당을 지어 그곳에서 시를 읊었다. 또 청계사를 창건하여 왕을 위하여 축원하였다. 정미년(1307년) 4월 25일을 지나자 병이 위독해져,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단정하게 앉아 운명하니 나라 안의 선비와 백성들이 다 분주히 달려와 통곡하였다. 공이 졸한 뒤에 자손들이 공과 흥양군(興陽郡)부인 조씨의 초상을 그려 별장 소당(小堂)에 간직하고 뜰에 비석을 세워 그 공덕을 새겼으며 전답과 노비를 두어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 후 공의 장남 장민공(莊敏公) 휘 서(瑞)와 부인 상당(上黨)한씨, 차남 충숙공(忠肅公) 휘 연(璉)과 상락군(上洛郡)부인 김씨, 충숙공의 아들 문정공(文靖公) 휘 덕유(德裕)와 변한국(卞韓國)부인 오씨, 문정공의 아들 문충공(文忠公) 휘 준(浚)과 부인 고성(固城)이씨의 초상도 아울러 소장하였다. 공의 아들 가운데 또한 벼슬이 참의(參議)에 이르렀으나 출가하여 승려가 된 분이 있었는데, 이는 호가 현오대선사(玄悟大禪師)인 삼중대광(三重大匡) 자은군(慈恩君)이다. 이가 일찍이 이 별장에서 살았는데, 이의 초상 역시 여기에 있다.
세월이 흘러 관리가 소홀하여 장민공과 그 부인의 영정은 자못 결손되고 더러워졌으므로 정통(正統) 정묘년(1447년)에 6대손 첨지(僉知) 인득(仁得)과 외현손 상국(相國) 남지(南智)가 여러 자손들과 더불어 초상을 다시 그렸다. 가정(嘉靖) 병인년(1566년) 겨울에는 공의 10대손 만종(萬鍾)과 문충공의 6대손 현령 현(玹), 현손 현감 창훈(昌勳), 공의 외운손(外雲孫) 상국 이준경(李浚慶), 상국 ▨▨ 등이 함께 중수하였다.
융경(隆慶) 정묘년(1567년)에 현과 판서 이부(李溥) 등이 영당에 제사하고 장차 역사를 일으키려 하였는데 마침 국상이 있어 즉시 행하지 못하고 무진년(1568년) 봄에 이르렀다. 이에 내외의 제손 1200여명을 동원하여 역사하였는데, 상국 권철(權轍), 상국 홍섬(洪暹)이 돈을 내고, 이상(二相) 오겸(吳謙)과 이상 이탁(李鐸) 이하 50여명이 유사(有司)가 되고, 판서 원곤(元混), 판서 조수언, 판서 홍담(洪曇), 판사 정종영(鄭宗榮) 등 모두가 이에 참여하였다. 기사년(1569년) 봄에 현이 우(瑀)·창훈(昌勳)·순빈(舜賓)·철명(哲命)·희생(喜生)·경복(景福)·응양(應亮) 등과 함께 공인을 모아 역사를 일으켜, 무릇 영정의 결손 되고 더럽혀진 곳을 깨끗이 고치고 기울어지고 허물어진 사우를 고쳤다. 또한 보관소 하나를 짓고 여섯 칸의 함을 만들어 정숙공 이하의 영정을 비단으로 싸서 함속에 안장하고 당우의 동쪽 따뜻한 방에 봉안하였다. 일이 있을 때에는 이를 받들어 당중에 내어 걸어 예를 올리고, 예가 끝나면 다시 함속에 봉안하여 자물쇠로 잠구어 두었으며 사사로이 열고 닫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공의 팔대외손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청계사 영당중수기를 짓고, 여성군 송인이 이를 기록하였으나, 만력(萬曆) 임진년(1592년)에 이르러 여러 영당이 전부 병화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광해군(1608~1623년) 때 청계사는 폐세자가 점유하고 있었고 또한 전답과 노비는 궁가나 토호들이 탈취하였다. 그리고 그 비석의 비문을 갈아버렸는데 이는 대개 그 전답과 노비를 비에 새겼기 때문이다. 숙종 15년(1689년)은 즉 청나라 강희(康熙) 28년인데, 이해 봄 삼월에 청계사에 화재가 나서 5백년 고찰이 흔적 없이 재가 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승려들만 함께 탄식함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공의 자손들 역시 심히 탄식하였으니, 불제자로서 성의가 있는 자가 있어 기부를 받아 재건을 도모하였다. 그 재화를 시주한 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고 또한 공의 정령(精靈)이 끝없이 빛나서 음으로 도와준 바가 아니겠는가. 이에 사찰의 전우(殿宇)와 낭무(廊廡) 등이 완연하고 한결같이 새롭게 되었고, 또 장차 청계사의 사적을 돌에 새겨 후세에 보이고자 나에게 기록을 부탁하니 내 비록 문사에 졸렬하나 공의 후손으로서 어찌 사양하겠는가. 삼가 기록한다.
정숙공 11대손 새로 급제한 운(橒)은 글을 짓고
생원 윤창적(尹昌績)은 글을 쓰다.
숭정 기원후 기사(숙종 15, 1689년) 6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