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흔석각(崔忻石刻)
- 시대
- 발해
- 연대
- 714년(고왕 16)
- 유형
- 석각
- 재질
- 돌
- 크기
- 정면 가로 300.0 두께 200.0 현재 지표에 나와 있는 높이 180.0
- 소재지
- 일본 궁중의 건안부 앞뜰
- 출토지
- 중국 요령성(遼寧省) 대련시(大連市) 여순구(旅順口) 황금산(黃金山) 기슭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각자/서자
- 미상 / 최흔(崔忻) / 미상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최흔석각(崔忻石刻)은 원래 중국 요령성(遼寧省) 여순구(旅順口) 황금산(黃金山) 기슭에 있던 것이었으나 러일전쟁으로 이곳에 진주한 일본군이 전리품으로 간주하여 1911년 일본 궁중의 진천부(振天府)로 가져갔다. 현재 석각은 건안부(建安府) 앞뜰에 보존되어 있다. 석각에 3행 29자의 글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이것을 홍려정비(鴻臚井碑)라고도 부른다. 석각은 타원추형(楕圓錐形)으로 정면은 가로 300cm, 두께 200cm이다. 석각의 내용은 최흔(崔忻)이 우물 두 개를 파서 영원히 증거로 남기고자 하며, 714년(당 개원(開元) 2) 5월 18일에 글자를 새겼다는 것이다. 최흔(崔忻)은 713년 2월에 당나라 황제 현종(玄宗)의 명령을 받고 발해로 가서 발해 시조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左驍衛員外大將軍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한 사람이다. 이때부터 당과 발해 사이에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석각은 최흔(崔忻)이 발해에서 당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새긴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발견된 장소가 요동반도의 끝인 여순(旅順)이라는 점에서 나중에 발해의 압록 조공도(鴨淥 朝貢道)가 된 길을 거쳐서 최흔(崔忻)이 당나라로 귀환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판독문/해석문
전체 2개
| 해석문 | 송기호 | ||
| 판독문 | 송기호 |
참고문헌
전체 9개 / 페이지 ( 1 / 1 )
| 단행본 | 2002 | 『한국고대금석문종합색인』 |
| 단행본 | 1995 | 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Ⅲ, 國史編纂委員會 |
| 단행본 | 1992 |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
| 논문 | 1986 | 趙評春, 1986, 「崔?出使渤海時間考」『北方文物』3 |
| 단행본 | 1982 | 明 李輔 등,『全遼志』권1, 山川志 金州衛; 羅福?,『滿洲金石志』권1; 1982, 『石刻史料新編』23, 新文豊出版公司, 臺北 |
| 논문 | 1982 | 羅繼祖, 1982, 「旅順·唐開元崔?題名」『吉林大學學報』1 |
| 논문 | 1980 | 陳顯昌, 1980, 「唐崔?題名石刻」『求是學刊』1 |
| 논문 | 1979 | 孫紹華, 1979, 「旅順鴻?井題記刻石-唐與渤海關係的信物」『社會科學集刊』4 |
| 논문 | 1968 | 渡邊諒, 1968, 「鴻?井考」『東洋學報』51-1 ; 姚義田 譯, 1991, 「鴻?井考」『遼海文物學干』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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