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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묘표(李集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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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京畿道 城南市 中院區 下大院洞)산 7-1번지에 자리한 이집묘역(李集墓域)에 있는 이집묘표이다. 이 비는 비두(碑頭)가 없는 비좌원수(碑座圓首)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대석(臺石)은 문양이 없어 단조롭다. 비문은 이집의 11대손인 이휴징(李休徵)이 지었고, 글씨는 이상진(李象震)이 썼다. 비 뒷면의 경우 마멸이 심해 판독하기 힘든 곳이 많다. 이집(1314~1387년)은 1368년(충목왕 3)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로(官路)에 들어섰지만, 1368년(공민왕 17)에 신돈(辛旽)의 미움을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가족과 함께 영천(永川)으로 피하였다가 1371년(공민왕 20)에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하였고, 곧 사직하고는 여주 천녕현(驪州川寧縣)에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는 당시의 많은 문사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는데,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는 그가 조선조에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1611년(광해군 3년)에 8대손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주청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바로 잡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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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득
이집묘표(李集墓表)
둔촌선생 이공휘집지묘(遁村先生 李公諱集之墓)
정화택주영주황씨부장(貞和宅主郢州黃氏祔葬).
우리 조상은 광주(廣州)에 적을 두고 오직 우리 둔촌 선생을 시조로 모시는데, 이 분은 고려 말기에 태어나셔서 사도(斯道)를 지키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셨고, 문장과 지절(志節)이 한 세대에 으뜸을 차지하셨으니, 이것은 전해지는 여러 기록을 상고하면 환하게 볼 수 있다.
일찍이 문경공(文敬公) 안보(安輔)에게 수업하셨으니, 그 학문에 연원이 있었으므로 좇아 배우는 자가 많았다. 모든 사람들이 “선생은 도를 깨달았다.”고 하니, 도은(陶隱)이 “사람을 잘 알아보았다.”고 하였고, 목은(牧隱)은 문경공의 묘지를 쓸 때에 그 문인들을 죽 서술하면서 제일 먼저 선생에게 “황야(荒野)로 잘 도피했다.”고 허여하였다.
당시 왕실은 장차 기울어져가고 사변(事變)은 잇따라 일어났는데, 선생께서는 충성과 효도가 극진하셨고, 의리에 불타는 마음이 안색에 드러나셨고, 꾹 참는 인내심을 기르셨고, 인정과 사리를 세밀하게 아셨고, 의지는 족히 쇠와 돌을 뚫을 듯하셨고, 기백(氣魄)은 족히 하늘을 찌를 듯하셨던 것이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참으로 선생의 성대한 덕에 대하여 형용하지 못할 점이 있다. 그러나 편언척자(片言隻字)가 어찌 거친 자취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하물며 한 시대의 명류들 중에 선생을 공경하지 않은 이가 없었음에랴? 포은(圃隱) 선생 같은 분은 동방(東方)에 있어서의 백세의 스승이었는데, 도학으로 다른 사람을 추중(推重)하지 않다가 오직 우리 선생에 대해서만은
“맹자(孟子)의 교훈 공순히 이어받아,
조장도 잊지도 않고 꾸준한 노력하였네.
천년을 이 마음 동일하게 가졌으니,
솔개 날고 고기 뛰듯 양양(洋洋) 자득하였네.“
라고 하였으니, 선생이 함양한 공정(功程)과 궁지에 처하신 역량을 더욱 징험할 수가 있다.
선생의 부친 당(唐)은 본래 지방의 향리(鄕吏)로서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어진 행실이 있었다. 다섯 아들을 두셨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 선생은 둘째 아들이 되신다. 처음 이름은 원령(元齡)인데, 태정(泰定) 정묘년(1327년)에 태어나셨다. 지정(至正) 7년 곧 고려 충목왕(忠穆王) 3년인 정해년(1347년)에 과거에 급제하셨고, 벼슬은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전교시사(判典敎寺事)에 이르렀다. 황명(皇明) 홍무(洪武) 20년인 정묘년(1387년)에 작고하시니, 향년 61세였다.
공민왕(恭愍王) 무신년(1368년)에는 역적(逆賊) 신돈(辛旽)에게 미움을 사서 화(禍)가 장차 미치게 되니, 부친을 업고 난을 피해서 조령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 영천(永川)군에 있는 동년(同年)인 최원도(崔元道)의 집에 피신해 있다가 부친이 돌아가시자, 영천군의 남쪽(…10자결…) 나현(蘿峴)에 장사지냈다. 신돈이 주살(誅殺) 당한 뒤에 세상에 나와서 이름을 집(集), 자(字)는 호연(浩然)으로, 호(號)를 둔촌(遁村)으로 하셨으니, 그 뜻은 목은(牧隱)이 쓴 「자설(字說)」과 「둔촌기(遁村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6년 후인 임신년(1392년)에 본조(本朝)가 혁명(革命)을 하였는데, 선생의 자손 중에서 경(卿)이 되거나 재상(宰相)이 된 분들이 서로 줄을 이었고, 선생에게는 의정부 좌찬성이 추가(追加)되었다. 선생의 아들 셋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장남 지직(之直)으로 곧은 법도와 청절(淸節)이 있고, 벼슬은 형조 참의와 보문각(寶文閣) 직제학을 지내셨으며, 둘째 아들 지강(之剛)은 벼슬이 좌참찬을 지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시며, 셋째 아들 지유(之柔)는 목사(牧使)를 지내셨다.
참의공은 세 아들을 두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장남 장손(長孫)은 사인(舍人)을 지내셨고, 둘째 아들 인손(仁孫)은 우의정(右議政)으로 세조(世祖)를 도와 공훈을 세우고, 시호는 충희(忠僖)이시며, 셋째 아들 예손(禮孫)은 관찰사(觀察使)를 지내셨다. 사인 장손은 아들 하나를 두셨으니, 극규(克圭)로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참의를 지내셨는데, 청명(淸明) · 직절(直節)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셨다. 충희공 인손은 아들 다섯을 두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맏아들 극배(克培)는 영의정으로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익평(翼平)이시며, 둘째 아들 극감(克堪)은 형조 판서로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셋째 아들 극증(克增)은 판중추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공장(恭長)이시며, 넷째 아들 극돈(克墩)은 좌찬성으로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익평(翼平)이시며, 다섯째 아들 극균(克均)은 좌의정으로 광남군(廣南君)에 봉해지셨다. 세간에서 “광주 이씨의 다섯 아들이 2번 과거에 급제하였다.”라고 일컫는 것은 선생의 5형제와 충희공의 아들 5형제를 가리킨 것이다. 그리고 극기(克基)는 예손(禮孫)의 아들로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고,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그 뒤에도 대대로 법도를 지키어 이름을 날린 자손이 있었으니, 윤경(潤慶)은 병조 판서를 지내셨으며 덕량(德量)을 갖추었으며, 시호는 정헌(正獻)이셨는데, 명호(名號)가 명나라 역사책에 나타나고 있으며, 준경(浚慶)은 영의정을 지내셨으며 국조(國朝)의 어진 재상이 되어서 선조(宣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받았다. 연경(延慶)은 교리를 지내셨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시어 학자들이 ‘탄수선생(灘叟先生)“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약빙(若氷)은 이조 정랑을 지내셨으며 어질다는 이름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극감(克堪)의 증손들이다. 영부(英符)는 장령을 지내셨고, 영현(英賢)은 참판을 지내셨는데, 모두 예손(禮孫)의 증손들이다. 이 중에서 연경 · 약빙 · 영부는 아울러 기묘명현(己卯名賢)에 올라 있다. 또 세전(世銓)은 벼슬이 부사를 지내고 예조 참판에 추증되셨으며, 세정(世정)은 이조 참의와 도승지와 관찰사를 지내셨는데, 극돈(克墩)의 아들이시다. 덕형(德馨)은 영의정을 지내셨으며 목묘(穆廟 선조) 때에 있어서 나라를 중흥시킨 명성 높은 정승으로 시호는 문익(文翼)이신데, 극균(克均)에게 5대손이시다. 광길(光吉)은 상의원 정(正)을 지내셨는데, 극배(克培)에게 현손이 되시고, 상안(尙安)은 시호가 충민(忠愍)이신데, 극돈(克墩)에게 5대손이 되시고, 정립(廷立)은 광림군(廣林君)에 봉해지셨는데, 극배에게 5대손이 되신다. 근세(近世)에 와서 필형(必亨)은 홍문관 교리를 지냈고, 필영(必榮)은 우참찬을 지냈고, 필행(必行)은 홍문관 응교를 지냈는데, 모두 준경(浚慶)에게 증손이 된다. 또 여황(如璜)은 관찰사를 지냈는데, 덕형의 아들이다. 윤우(潤雨)는 참의를 지냈는데, 예손에게 6대손이다. 도장(道長)은 응교를 지냈는데, 윤우의 아들이다. 선생 이후로 연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혈통이 영화롭고 존경받는 문벌은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로다. 그 사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 재상의 지위에 오른 분과 무과에 합격한 분들이 줄줄이 이어진 것은 이 숫자뿐만이 아닌데, 우선 그 중에서 나타난 분들만 이상과 같이 열거한 것이다.
선생의 묘소는 광주(廣州)의 읍치 서쪽 음촌(陰村) 유향(酉向) 언덕에 자리하였다. 부인은 정화택주(貞和宅主) 영주(郢州) 황(黃)씨이시다. 옛날에 짤막한 비갈(碑碣)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파손되었다. 여러 후손들 중에서 첨지인 형윤(亨胤) · 전 현감 정망(廷望) · 흡곡(歙谷)현령 필성(必成) · 의금부 도사 지하(祉遐) · 부사과 도빈(道彬) · 예조 정랑 휴징(休徵) · 봉사 상정(象鼎) · 진사 신징(信徵) · 승문원 정자 상진(象震) · 유학(幼學) 두익(斗翼) · 갑과(甲科)에 급제한 원정(元禎) · 진사 의징(儀徵) · 생원 건징(健徵) 등 160여인과, 외손(外孫)으로는 능천(綾川)부원군 구인후(具仁垕) · 이조 판서 정세규(鄭世規) · 사헌부 집의 송준길(宋浚吉) · 세자시강원 진선 송시열(宋時烈) · 홍문관 교리 윤집(尹鏶) · 사헌부 장령 조충(趙沖) 등 170여 인이 그 비문이 인멸되어 전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힘을 합해서 큰 비석으로 고쳐 세우기로 의견을 모으고 불초한 후손인 이 휴징(休徵)에게 그 전말(顚末)에 대해 대략 기술하도록 부탁하였다. 그러나 휴징은 지식이 없고 견문이 적은데 어떻게 예전 사람의 행적과 조상의 덕을 기술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아! 선생께서는 도덕을 이미 마음속에 쌓여서 밖으로 세상에 드러내셨고, 출처에 보이신 큰 절의는 여유작작하셨으며, 후세에 전한 명성은 세대가 더욱 멀면 멀수록 더욱 드러나고 있도다. 행실과 학문의 조예에 대해서는 목은과 포은 같은 여러 현인들께서 반복해서 상세히 말하였으니, 다시 더 말할 것이 없도다. 선생의 거취와 행장에 대해서는 마땅히 『고려사』에서 그 실상을 확인해야 할 것이고, 보계(譜系)와 지망(地望)에 대해서는 마땅히 『여지승람』에서 그 사실을 상고해야 할 것이다. 문장(文章)과 시영(詩詠)은 권축이 남아있어 해와 별처럼 빛을 내고 있으니, 바로 『중용』에서 말한 “백세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다.”는 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 뿌리가 깊게 박히고 근원이 멀리 내려있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흐름이 장원하는 법이니, 면면이 창대하고, 계속 이어져 침체되지 않는 것은 우리 조상이 만 자손들을 침체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신 덕분이 아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너희 조상을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그 덕을 닦을 지어다”고 하였으니, 불초 등이 돌을 깎아 비석을 세움에 있어서 어찌 감동이 없을 수 있겠는가?
통훈대부 예조 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 11대손 휴징(通訓大夫禮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十一代孫休徵)은 삼가 글을 짓고,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 상진(상진)은 삼가 글씨를 쓰다.
숭정기원 25년 임진년(1652년) 상한(上澣)에 비석을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