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비묘지(泉毖墓誌)
- 시대
- 고구려
- 연대
- 733년(성덕왕 32)
- 유형
- 묘지
- 재질
- 돌
- 크기
- 세로 2尺5寸5分, 가로 2尺5寸5分
- 소재지
- 미상
- 출토지
- 하남성(河南城) 낙양(洛陽)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각자/서자
- 천은(泉隱) / 미상 / 미상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천비(泉毖)의 고조는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이며, 증조는 천남생(泉男生), 조부는 천헌성(泉獻誠)이며, 부는 천은(泉隱)이다. 천남생과 천헌성의 묘지명은 발견되었으나 천은의 묘지명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천비의 묘지명은 그 부(父)인 천은의 찬으로 되어 있는데, 천은에 대해서는 천헌성의 묘지명에 구시(久視) 원년(700) 8월에 내려진 이른바 천헌성에 대한 ‘소설(昭雪)’을 명령하는 조칙에 “其男 武騎尉 柳城縣開國男玄隱 可遊擊將軍 行左玉鈐衛 右司階 員外置同正員 勳封竝如故”라고 하였는데 보듯이 천현은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같은 묘지에 ‘有子 玄隱 玄逸 玄靜’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본 묘지명에는 ‘父 光祿大夫 衛尉卿 上柱國 卞國公 隱 撰文’이라 되어 있으니 변국공이라는 작위는 헌성의 증시(贈諡)를 (현)은이 습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천비의 자(字)는 맹견(孟堅)이며, 경조(京兆) 만년인(萬年人)으로 되어 있으니, 천씨는 입당 후 본관을 ‘경조(京兆)’로 바꾼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음보로 겨우 2세에 치천현개국남(淄川縣開國男)으로 봉해졌지만, 22세에 요절한 짧은 인생을 보낸 자이다. 그리고 다른 묘지명에는 잘 보이지 않는 혼인관계가 보이고 있으니 그가 곧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조선왕(朝鮮王) 고장(高藏)의 외손이며 태자첨사(太子詹事) 태원공(太原公)인 왕위(王暐)의 자서(子壻)이다. 따라서 입당 후에도 고구려인들 사이에 연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묘지명은 그 조부인 천헌성의 묘지명과 동시에 출토되었다. 그리고 높이, 넓이 각각 2척 5촌 5분의 크기이며, 25행 행당 25자로 정서체로 되어 있다. 唐 中宗 景龍 3年(709, 2세); 淄川縣開國男으로 봉함. 곧이어 淄川子로 進封. 食邑 400戶. 또 다시 驍騎尉로 제수받고 蔭으로 太廟齋郞에 補任. 마침 邊方에 일이 있자 宣德郞을 제수받음. 放選(科擧)에 뽑힘. 玄宗 開元 17년(729, 22세); 京兆府 興安里 私第에서 臨終. 開元 21년(733, 26세); 河南府 洛陽縣의 印山 舊塋에 옮겨 묻음.
판독문/해석문
| 해석문 | 박한제 | ||
| 판독문 | 박한제 | ||
| 판독문 | 이난영 | ||
| 판독문 | 羅振玉 |
참고문헌
| 단행본 | 2002 | 『한국고대금석문종합색인』 |
| 논문 | 2001 | 金賢淑, 2001, 「中國 所在 高句麗 遺民의 動向」『韓國古代史硏究』23 |
| 단행본 | 1995 | 國史編纂委員會, 1995, 『韓國古代金石文資料集』Ⅰ, 國史編纂委員會 |
| 단행본 | 1992 |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
| 단행본 | 1984 | 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古代篇, 亞細亞文化社 |
| 논문 | 1982 | 羅振玉, 1982, 「唐代海東藩閥誌存」『石刻史料新編』(第2集 第15冊), 新文豊出版公司(臺北) |
| 단행본 | 1968 | 『韓國金石文追補』, 中央大出版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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