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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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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 묘지의 원명은 「대당고특진천군묘지(大唐故特進泉君墓誌)」이며 전서(篆書)로 3행으로 쓰여져 있다. 묘주인 천남생(泉男生)은 고구려 연(천)개소문(淵(泉)蓋蘇文)의 장남이다. 연개소문에게는 남생(男生)·남건(男建)·남산(男産) 등 세 아들이 있었다. 그는 장자로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17년(634, 당 태종 정관(貞觀) 8년)에 나서 당 고종 의봉(儀鳳) 4년(679)에 46세의 나이로 죽었다. 『신당서(新唐書)』권110에 본전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권27 천지천황(天智天皇) 3년 10월조에 보면, 개문이 죽을 때, 그 아들들에게 “너희 형제들은 어수(魚水)와 같이 화목하여 벼슬 자리를 다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개문이 죽기 전에 이미 그의 아들 사이에는 어떤 불화의 조짐이나 가능성이 있었는지 모른다. 고구려 보장왕(寶藏王) 24년(665) 소문이 죽고 장자인 남생이 그 뒤를 이어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국정을 총리하였다. 『구당서(舊唐書)』고구려전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사후 장자 남생이 정사를 두 아우에게 맡기고 지방의 제성진(諸城鎭)을 순찰하던 중 어떤 자가 남건·남산에게 “남생은 두 아우가 자기의 지위를 뺏을까 염려하여 그대들을 제거하려 하니 먼저 도모하라”고 하였다. 또 어떤 자는 남생에게 “두 아우는 형이 돌아와 정권을 뺏을까 하여 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려 한다” 하였다.
이리 하여 형제간에 싸움이 벌어져 남생은 두 아우에게 패하여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곳을 근거로 하여 그 아들 헌성(獻誠)을 당에 보내어 원조를 청하였다. 당은 고구려의 내홍(內訌)을 호기로 삼아 남생 부자에게 관작을 주는 동시에 계필하력(契苾何力) 등 군사를 보내어 남생을 구원하게 하고 이에 이세적을 주장으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이 묘지는 당 고종 의봉 4년(679)에 만들어졌으며, 왕덕진(王德眞)이 찬(撰)하고, 구양통(歐陽通)이 썼다. 1921년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북교(北郊)에서 출토된 이것은 종(縱) 2척(尺) 8촌(寸) 6분(分), 횡(橫) 2척(尺) 9촌(寸)의 크기로서, 해서체(楷書體)의 47행(行), 행당 47자이다. 현재 중국 하남성(河南省) 개봉도서관(開封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묘지와 문헌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천남생의 연보는 아래와 같다.
唐 太宗 貞觀 8年(634, 高句麗 榮留王 17); 泉蓋蘇文의 長子로 출생.
貞觀 16年(642, 9세); 先人
貞觀 22年(648, 15세); 中裏小兄
高宗 永徽 2年(651, 18세); 中裏大兄
顯慶 2年(657, 24세); 兼授將軍
龍朔 元年(661, 28세); 莫離支 兼授三軍大將軍
麟德 2년(665, 32세); 太莫離支
乾鳳 元年(666, 33세); 子 獻誠 唐에 入朝, 당으로부터 ‘平壤道行軍大總管兼使持節安撫大使’로 임명되어 고구려 침략에 참여.
總章 元年(668, 35세); 使持節遼東大都督 上柱國 玄菟郡開國公. 李勣과 함께 귀환하자 右衛大將軍 卞國公 食邑三千戶, 兼檢校右羽林軍 仍領仗內供奉하게 됨.
儀鳳 4年(679, 46세); 死亡.
대당(大唐)의 고(故) 특진(特進), 행우위대장군(行右衛大將軍), 겸(兼) 검교우우림군(檢校右羽林軍) 장내공봉(仗內供奉), 상주국(上柱國), 변국공(卞國公), 증병주대도독(贈幷州大都督) 천군(泉君)의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
중서시랑(中書侍郞), 겸(兼) 검교상왕부(檢校相王府) 사마(司馬) 왕덕진(王德眞)이 찬(撰)하고, 조의대부(朝議大夫), 행사훈랑중(行司勳郞中), 상기도위(上騎都尉), 발해현개국남(渤海縣開國男) 구양통(歐陽通)이 서(書)하다.
대저 돌에 담긴 무지개 빛(보석)이면 흙에 따라 산을 빛나게 하고, 물결에 잠긴 진주조개 빛깔 또한 냇물에 의하여 물을 곱게 하나니, 붉은 궁궐문 밀어 열고 보라색 수레덮개로 올라왔네. 오랜 등휘(騰輝 : 가문의 빛나는 전통?) 화헌(華軒 : 貴人의 수레)보다 열 수레 뛰어넘고, 덧보태어진 표가(表價 : 泉男生 當代의 역할 중요성?) 좋은 땅(혹은 변두리 땅?) 다섯 성(城)을 나누었도다. 게다가 동방성차(東方星次)의 각(角)과 저(氐) 두 별이 좋은 별자리 그 자리에 떨어지고, 뒤덮은 파란 바다 명산(名山)의 기색(氣色)에 감응(感應)하구나. 유순(柔順)한 경지(境地)로 발돋움하여 군자(君子)의 근원(根源) 그 실마리를 마련하였으니, 제기(祭器 : 禮儀)를 안고 율려(律呂)를 엿보고 금수(錦繡 : 아름다운 뜻?)를 품어 낭묘(廊廟 : 正殿, 政事를 하는 곳)에 올랐네. 뿌리를 옮겨 구렁에 자리 잡으니 대하(大廈)의 훌륭한 재목되고, 직(職)을 바꾸어 궁중(宮中)으로 들어오니 큰 장군(將軍)의 절기(切寄 : 빼어난 資質?)를 받들도다. 아아, 좋은 보배와 (그것을 싼) 천촉(薦襩?), 좋은 구슬과 (그것을 묶은) 관(棺) 끈을 어떻게 똑같이 이야기할까? 변국공(卞國公)에게서 이것이 드러나는구나!
공(公)의 성(姓)은 천(泉)이며 휘(諱)는 남생(男生)이고 자(字)는 원덕(元德)으로서, 요동군(遼東郡) 평양성(平壤城) 사람이다.
멀리 계보를 살펴보면 원래 천(泉)에서 생겨나왔으니, 이미 신(神)에 의탁하여 퇴지(隤祉?)하였으므로 마침내 생겨난 데에 따라 그 족(族)을 불렀다. 마치 봉(鳳)이 단혈(丹穴)에서 나서 아홉 가지 색깔의 깃털에 기묘한 무늬를 드러내고, 학(鶴)이 청전(靑田)에서 나와 천년(千年)동안 신령스러운 모습을 지니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공상(空桑?)이 의(懿)를 낳고 허죽(虛竹)이 파(波)를 따르듯이 (霍光의 고사가 있을 것 같으나 未詳) 아울러 하늘의 정기(精氣)를 받아 인걸(人傑)을 드러내어 뽑아 결국 홍원(洪源)으로 하여금 끌어당겨 그 모습이 금구(金樞 : 군주의 大權?)를 가리고(혹은 적시고?), 일찍이 집을 넓혀 그 세(勢)가 경함(瓊檻 : 군주의 영화를 의미?, 典故 未詳)에 이르렀던 것이다. 증조부(曾祖父)는 자유(子遊)이며 조부(祖父)는 태조(太祚)로서 다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하였고, 부(父) 개금(蓋金)은 태대대로(太大對盧)였었는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쇠를 잘 부리고 활을 잘 쏘아 군권(軍權)을 아울러 쥐고 모두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 하였다. 이것은 계루(桂婁)의 성업(盛業)이 뚜렷이 바뀌는 자(資 : 바탕?)이었고, 봉래산(蓬萊山)에서 높이 볼 때 확실히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의 임무를 가졌다.
공(公)은 선조(先祖)로부터의 물려받음으로 경사(慶事)를 이어 그 변책(弁幘 : 신분?)이 왕공(王公 : ?)의 후손과 같았고, 조상(祖上)의 덕택으로 영화(榮華)를 계속 누려 그 패추(沛鄒 : 벼슬?)가 순령(荀令?)의 아들과 같았다. 더벅머리 어릴 때 장난이 없었고, 북상투한 젊었을 때는 무리짓지 않았다. 좋은 수레를 타고 가면 거리에서 옥수(玉粹)를 빛내었으며, 도겸(陶謙)의 비단을 이어서 마을에서 주도(珠韜)를 밝혔다(?). 마음 속의 생각은 산랑(散朗)하고 뚜렷한 긍지가 굉장히 컸으므로, 넓고 뛰어남이 물의(物議)를 빚어내지 않았으며 통분(通分?)이 때와 기회에 막히지 않았다. 서(書)와 검(劍)을 쌍전(雙傳)하여 제자(提蔗?)와 절포(截蒲?)가 모두 묘(妙)하였고(정확한 의미 미상), 금(琴)과 기(碁)를 양완(兩翫::TEXT)하여 안행(雁行)과 학렬(鶴迾?)이 함께 기울었다(?). 인(仁)에 바탕하여 용(勇)을 이룸으로써 갑작스러운(?) 빠른 번개를 잠재웠으며, 신(信)을 안고 진심으로 함으로써 우착(禹鑿 : 黃河?)에서의 놀란 파도를 다스렸다. 천경(天經)이 다하지 않으니 가르침이 이에 생겼고, 왕도(王道)가 무사(無私)하니 충(忠)이 훌륭한 덕(德)으로 되었던 것이다. 만경(萬頃)의 맑은 호수에서 노니는 이는 그 깊이를 잴 수가 없고, 구인(九仞)의 바깥담에서 말하는 이가 그 집(의 규모)를 헤아릴 수 없다. 나이 9살이 되자 선인(先人)의 지위를 주었다. 아버지가 낭(郞)으로 임용하여 바로 입진지변(入榛之辯)을 토(吐)하였고(?), 하늘의 교묘함을 대신하여 바야흐로 결애지영(結艾之榮)을 올렸다(?). 15세에 중리소형(中裏小兄)을 주었고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을 주었으며, 23세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으로 고쳐 임용하였고 24세에 나머지 관직(官職)은 그대로 하면서 장군(將軍)을 겸하게 하였다. 28세에 막리지(莫離支)로 임용하고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을 겸하여 주더니, 32세 때 태막리지(太莫離支)로 더하여 군국(軍國)을 총괄하는 아형원수(阿衡元首 : 阿衡은 재상, 元首는 軍師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선조(先祖)의 유업(遺業)을 이으니 선비들의 마음(?)이 열복(悅服)하였으며, 위태로운 나라의 권력을 잡아 사람들의 논란이 없었다.
이때 당(唐) 천자(天子)의 치세는 문치(文治)를 위주로 하여(?) 호시(楛矢 : 楛는 화살, 전쟁의 의미?)는 건기(褰期 : 褰은 縮과 통하니, 짧았다는 의미?)하였다. (그런데 당시) 공(公)은 형제간의 정(情)을 살펴보아 안으로 없애기 어려운 잡풀이 있었고, 나라의 근본을 세우려 함에 밖으로 엎어지려는 나무가 있었으니, 마침내 도해지빈(桃海之濱?)으로 하여금 예양(禮讓)에서 8조(八條)의 가르침이 어그러지게 하였고, 소장(蕭墻 : 담장 혹은 君臣間의 가까운 장소?) 안에서는 간과(干戈)에 사우(四羽)가 떨어지게 하였다(?). (따라서) 공(公)은 내심 내관(內款)을 생각하였으나 일이 중앙에서 집권적으로 되지 않아(?), 바야흐로 나가 변경(邊境)의 백성들을 어루만져 달래려고 하여 밖으로 황전(荒甸 : 邊方?)을 순정(巡征)하였으니, (고)조선((古)朝鮮)의 옛 땅을 다스려 동방(東方)을 통치하는 새로운 관직(官職)을 (唐에) 요청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外征의 틈을 타서) 두 아우 천남산(泉男産)과 천남건(泉男建)은 하루아침에 흉패(兇悖)하여져서 능히 무친(無親)의 차마 못할 짓을 하여 병사를 내어 안에서 저항하였다. 금환(金環 : 금팔찌, 어린?) 유자(幼子)는 갑자기 살륙당하였고, 옥선(玉膳 : 좋은 요리?)과 장연(長筵 : 좋은 자리?)는 머쟎아 고복(顧復 : 부모가 자식을 보살핌?)을 사(辭)하였다(이상의 구체적 의미는 未詳). 공(公)은 형제간의 관계가 소원함으로써 눈물을 머금고 격문(檄文)을 사방으로 보내니 동맹(同盟) 세력이 많이 모여 마침내 단단한 각오로 창을 들었다. 장차 평양을 함락시켜 악(惡)의 근원을 사로잡으려고, 먼저 오골(烏骨)의 교외에 이르러 곧 슬견(瑟堅)의 누(壘)를 깨뜨리려 하여, 그 도둑질을 밝히며 북을 울리면서 나아갔다. 이에 대형(大兄) 불덕(弗德) 등을 보내어 표(表)를 받들고 입조(入朝)하여 그 일들을 알리려 하였는데 마침 이반(離反)이 있어 불덕(弗德)은 (그 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공(公)은 이로 인하여 요동(遼東)으로 깃발을 돌려 군사를 해북(海北?)으로 옮기고, 그 마음을 천자의 궁궐로 달려 현토성(玄菟城)에서 수신(修身)하면서, 다시 대형(大兄) 염유(冉有)를 보내 정성(精誠)스러운 효명(效命)을 거듭 알렸다. 광림(曠林)에 쌓인 형제간의 원망(怨望)에서 먼저 알백(閼伯)의 창을 찾으니, 홍지(洪池)가 가까이에서 노닐며 어찌 우숙(虞叔)의 칼을 탐내겠는가? 황제께서 청구(靑丘)를 밝혀 보시어, 그 (泉男生의) 진실한 간절함을 헤아리시며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의 죄를 살피시고, 번개와 천둥 같은 위엄을 내셨다. 환산(丸山)에 아직 새기지 않았으나 득래(得來)는 먼저 깨달음을 드러내시고, 양수(梁水)에 재앙이 없지만 중모(仲謀)는 그것이 반드시 망하리라고 걱정하였음과 같은 것이다(唐의 올바르고도 빠른 조처를 말하는 듯하나, 典故 未詳).
건봉(乾封) 원년(元年 ; 666) 공(公)은 또 아들 헌성(獻誠)을 입조(入朝)시켰다. 황제가 가상(嘉賞)히 여겨 멀리서 공(公)에게 특진(特進), 예전과 같은 태대형(太大兄), 평양도행군대총관겸사지절안무대사(平壤道行軍大摠管兼使持節按撫大使)를 배수(拜授)하여, 본래 번병(蕃兵)을 거느리고 대총관(大摠管) 계필하력(契苾何力) 등과 함께 경략(經略)을 책임지게 하였다. 공(公)은 국내(國內) 등 6성(城)의 10여 만호(萬戶)의 서적(書籍)과 원문(轅門 : 陣, 軍師의 의미?)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목저(木底) 등 3성(城)이 교화(敎化)를 바라 정성(精誠)을 함께 하니, (唐에 저항하던) 조무래기들은 위태로와지고 날로 달로 궁박해졌다. 건봉(乾封) 2년(667) 칙(勅)을 받들어(?) 공(公)에게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총장(總章) 원년(元年 : 668) 사지절요동대총관(使持節遼東大都督), 상주국(上柱國), 현토군개국공(玄菟郡開國公)으로 식읍 2,000호(戶)를 주고 나머지 관직은 예전대로 하였다. 소맥(小貊)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지만 바야흐로 소연(巢燕)의 막(幕 : 고유명사 혹은 제비둥지 같이 작은 적의 군영?)이 뒤집어지려 할 때, (唐의) 천자(?)의 명이 있어 개마(蓋馬)의 영(營 : 고유명사 혹은 큰 아군의 군영?)으로 되돌아왔다. 그해 가을 칙을 받들어 사공(司空),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과 함께 서로 경략(經略)을 책임지고 바람처럼 달리며 번개같이 내쳐서 막바로 평양성(平壤城)에 다다르니, 앞에서 노래부르고 뒤에서 춤추며 멀리 높은 성벽의 성가퀴를 깨뜨렸다(?). 공은 죄인을 벌하여 백성들을 위로한다고 해서 (오히려) 피로 땅을 물들일 일을 안타깝게 여겨 몰래 은밀히 계략을 꾸며 그 기름진 땅을 구제하려 하였으니, 마침내 승려(僧侶) 신성(信誠) 등과 안팎으로 상응하였다. 조성(趙城)을 함락시켜 깃발을 빼앗았는데 어찌 한신(韓信)의 군대를 수고롭게 할 것인가? 업의 성문을 밀어제낀 것은 원담(袁譚)의 장수(將帥)들이 스스로 초래하였던 일인 것이다(?). (평양성이 저절로 함락되자) 그 왕 보장(寶藏)과 (천)남건((泉)男建) 등이 다 포로가 되었으며, (高句麗의) 높은 산과 깊은 바다가 함께 (唐의) 경계로 들어왔고, 5부(五部)와 삼한(三韓)이 모두 신첩(臣妾)이 되었다. 결국 능히 의(義)를 세우고 은혜를 끊음은 정백(鄭伯)이 준걸(儁傑)을 얻었던 것과 같았으며(?), 화(禍)를 도리어 복(福)으로 만든 것이 기자(箕子)가 공(功)을 이루었던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 해에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 등과 함께 서울로 개선하여 들어오니, 공훈을 기록하고 마땅한 의식을 행하였다. 승리를 아뢰는 날 남건(男建)을 바로 주살(誅殺)하려 했으나, 공은 안으로 (형제의) 천륜(天倫(을 절실히 느끼고 겹으로 된 궁궐문에 와서 채숙(蔡叔)의 예를 살필 것을 청하여(이 단락은 未詳), 상(上 : 하늘?)이 감동하고 황제께서 살피시어 관대한 처벌로 하여 (男建을) 공공(共工)(의 예)처럼 유배하였다. (이와 같은) 형제간 우애의 지극함으로 조야(朝野)에서 이것을 높이 여겼다. 그해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을 제수(除授)하고, 변국공(卞國公)으로 진봉(進封)하여 식읍(食邑) 3,000호(戶)를 주었으며, 특진(特進)과 훈관(勳官)은 예전처럼 하되 검교우우림군(檢校右羽林軍)으로써 장내공봉(仗內供奉)하도록 하였다. (천자가) 예를 낮추어 우대하였고(?) 고관(高官)으로 임용하였으니, (公은) 귀인(貴人)으로서 ‘중황지서(中黃之瑞)’(관료들?)를 모아 화합하게 하였고 근위(近衛)로서 천자의 자리를 빛나게 하였다. (公이) 천자의 곁에서 받들었고 주위에서 바빴으니, (천자의) 은총의 높음은 뒤질 바가 없었으며 진심으로 의지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의봉(儀鳳) 2년(677) 칙을 받들어 요동을 안무(按撫)하여 주현(州縣)을 개치(改置)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救恤)하여 그 아픔을 덜어주었는데, 강부(襁負)하여 돌아와 의지하는 이들이 들을 메웠고(?) 강역(疆域)을 소통하여 경계를 정함에 올바름을 알게 되었다(?).
의봉(儀鳳) 4년(679) 정월 29일 (公이) 병을 얻어 안동부(安東府)의 관사(官舍)에서 돌아가시니, 춘추(春秋) 46세였다. 진의(震扆 : 天子?)는 북소리를 마음 아파하고 삼공(三公)과 재상(宰相)이 피리 소리를 원통해 하였으며, 4군(四郡 :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未詳, 옛 고구려와 관련?)은 이로 인하여 파시하고 아홉 종족(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역시 未詳)들이 이로 인하여 농사일을 그만두었다. 조(詔)에서 말하기를 “많은 공(功)에 넘치는 상(賞)으로 생전(生前)에 총명(寵命)이 두루 있었으니, 갖은 예(禮)로 추증(追贈)함으로써 슬픔과 영화가 죽은 뒤에도 커게 하라. 충의(忠義)를 드러내어 밝힘에 어찌 삶과 죽음에 차이가 있겠는가? 특진행우위대장군(特進行右衛大將軍), 상주국(上柱國), 변국공(卞國公) 천남생(泉男生)은 5부(五部)의 우두머리이자 삼한(三韓)의 영걸로 신묘한 기지(機智)가 영오(穎悟)하고 갖추어진 식견(識見)이 심원(深遠)하였으며, 신비한 헤아림이 계책에서 드러났고, 큰 재능이 무예(武藝)에서 펼쳤더니, 변방(邊方)에 후미지게 살면서도 진실된 정성을 바쳤도다. 위태한 상황(혹은 나라?)을 떠나 편안한 지경(혹은 나라, 곧 唐?)으로 나아가서 진실로 변통(變通)의 도(道)에 합당(合當)하였고, (唐에) 순(順)함으로써 (泉男建 등과 같이 唐에) 역(逆)함을 도모하여 능히 요패(遼浿)의 끝까지 맑게 하였다. 훌륭한 공적이 멀리서도 두드러져 높은 관직(官職?)이 맡겨졌다. 들어오면 북군(北軍 : 近衛軍?)을 책임져서 궁중에서 사거(私居)하였으며, 나가면 동쪽 끝에까지 이르러 빛남이 청구(靑丘)를 진무(鎭撫)하였다. (그런데) 교화(敎化)를 오래 기다리다가 일찍 죽음에 갑작스럽기가 아침이슬보다 앞서니, 그 죽음을 말함에 천자의 슬픔이 진실로 깊어서, 마땅히 (그에게) 연솔(連率)의 반차(班次)를 더하여 추숭(追崇)의 모범을 삼가 기록하노라(?). 가히(그러므로?) 사지절대도독(使持節大都督), 변(幷)·분(汾)·기(箕)·남(嵐)의 4주제군사(四州諸軍事), 병주자사(幷州刺史)를 추증하며, 나머지 관직은 예전과 같이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을 맡은 관청에서는 예(禮)를 갖추었고, 책명(冊命)으로 견포(絹布) 700단(段)과 미속(米粟) 700석(石)을 주었으며, 상장(喪葬)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관급(官給)하였으며, 관청에서는 은전을 베풂이 두터워 동원(東園)의 비기(秘器)를 (빌려?) 주었다. 경관(京官) 4품에 해당하는 관리 1인을 차출(差出)하여 홍려소경(鴻臚少卿)의 관직을 대신하여 감호(監護)하게 하였고, 금군(禁軍)과 군악대(軍樂隊)를 묘소(墓所)에까지 보내어 돌아오게 하였으며, 5품의 관리 1인으로써 천자의 부절(符節)과 새서(璽書)를 가지고 가서 제사(祭祀?)에 조문(弔問)하도록 하였는데, (조정은) 3일 동안 일을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구(靈柩)가 이르는 날 이로 인하여 5품 이상의 관직을 가진 이들에게 그 집(묘소?)으로 가도록 하였다. 총증(寵贈)의 두터움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영화(榮華)를 더하였고 애송(哀送)의 성대함은 고금(古今)에 다시 없었는데, 효공(考功)을 여러 차례 행하여 시호(諡號)하기를 양공(襄公)이라고 하였다. 조로(調露) 원년(元年 ; 679) 12월 26일 임신(壬申)에 낙양(洛陽) 망산(邙山) 땅에 하관(下棺)하니, 예(禮)에 합당하도다. 슬퍼하는 아들 위위시경(衛尉寺卿) 헌성(獻誠)은 일찍이 가정교육을 받들어 이른 나이에 관료의 인끈을 늘어뜨렸다. 관직을 받기 전이나 뒤나 주로(周魯)의 은총(?)은 이미 높았고, 지생지사(知生知死?)하여 조증(弔贈)의 은혜가 두루 많았다. 나물을 데치며 가시나무 장작을 (불을 높이려) 불고 서리를 밟아 이슬을 옮기니(일의 진행을 의미?), 갈마드는 아픔은 없어지며 더욱 기울고 짐진 슬픔은 옮겨가며 안으로 깊어진다(이 문장은 구체적 의미 未詳). 위분(魏墳)의 낡은 칠(漆)이 벗겨지니 한대(漢臺)의 밑바탕이 드러나고, 취완(翠琬)을 깎아 전하는 향기는 저승에 이르러 영원하리라(이 문장은 구체적 의미 未詳).
그 사(詞)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삼악(三岳)의 신부(神府)와 십주(十洲)의 선정(仙庭)에서 곡왕(谷王)이 걸물(傑物)을 낳고 산신령이 신령(神靈)스러운 것을 배었네. 나라의 근간(根幹)을 크게 도모(圖謀)하고 인간의 법도를 환히 밝혀, 비단 의복 차려 입고 죄형(罪刑)을 상세히 의논하였도다. 첫번째.
그 사람이 몰래 나와 집안을 잇고 복(福)을 쌓더니, 훌륭하다 봉황(鳳凰)의 아들 천리마(千里馬)의 자식. 지혜를 감추어 가짐이 천책(川積)같고 어짊을 품음은 악치(岳峙)같으니, 주목(州牧)은 칼을 받치고 교옹(橋翁)은 신을 주었네. 두번째.
소란(騷亂)을 없애는 일에 소관(消灌)하여 추로(鄒盧?)에 의지함이 깊었고, 추요(樞要)의 문관(文官)으로 권세 잡고 무직(武職)을 관할하여 요령(要領)을 쥐었도다. 형수(荊樹)에 물수리 날아오르고 노천(蘆川)에 기러기 잠기니, 슬픔을 당하여 눈물 닦으며 (형제간에) 서로 헤어짐을 한탄하였노라. 세번째.
인주(麟洲)에 숙연(肅然)한 그늘 드리우자 천자의 궁궐로 정성(精誠) 바치었고, 조명(朝命)은 은혜롭게 빛나 천위(天威)로써 정벌하였도다. 도적들을 괴멸시키며 별을 바라보니 군사를 움직인지 몇 달, 크게 춤추며 돌아와 바친 것은 개선의 노래와 보고였네. 네번째.
만호(彎弧)는 마주하여 울고 궁궐에 호소하며 황제께 기원하니, 가을날 잡풀이 갑자기 봄 산앵도나무로 다시 꽃피도다. 옥소리 울리며 높은 자리에 오르고 구슬을 머금어 천자를 근위(近衛)하여서, 보검(寶檢)을 연꽃 위에 놓고 향거(香車)를 계수나무에 매어두었다. 다섯번째.
경거(輕車)로 출무(出撫)하여 비단옷 겹쳐 입고 새벽에 나서서, 수혈(穟穴)을 억양(抑揚)하고 단주(亶洲)를 다스렸다. 위엄(威嚴)을 보고 은혜(恩惠)를 바라 햇빛 바라보며 유순(柔順)해졌더니, 처음 단정히 온 수레 얼마 안있어 갑자기 떠나버렸네. 여섯번째.
검혁(劍革)으로 근왕(勤王)하였으니 북소리 들으며 슬픈 천자, 구원(九原)의 용위(容衛)는 삼하(三河)의 병사(兵士)로다. 남으로 소실(少室)을 바라보고 북으로 태사(太史)에 이르니, 바다는 샘(泉이란 姓과 유관?)으로 통하고 산(山)은 (그의) 묘소(墓所)로부터 일어나는구나. 일곱번째.
서리와 이슬은 해마다 쌓이고 세월은 날로 가는데, 둥근 무덤과 만월(滿月)에 텅 빈 들과 소소(疎疎)한 바람 있으리니. 지하(地下)에 송가(頌歌)를 새기고자 좋은 돌에 글을 묻나니, 영원히 빛나라 일대(一代)의 구허(丘墟). 여덟번째.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본문에 나오는 ‘仗內供奉’에 의하면 특정 활동과 관련된 한 구절로 해석하여야 될 듯하나 그 구체적 의미는 미상(未詳)이다. ‘仗內’에 대하여서는 『신당서』권50, 1331쪽의 “高宗 龍朔2年, 始取府兵越騎・步射置左右羽林軍, 大朝會則執仗以衛階陛, 行幸則夾馳道爲內仗”의 구절을 참조하라(『구당서』권44에도 유사한 구절). 공봉(供奉)은 내공(內供)과 마찬가지로 내정(內廷)에서의 종관(從官)이다. ↩
본래 ‘知’란 관원(官員)에 결원이 생겼을 때 본기관(本機關) 혹은 타기관(他機關)의 관리로 그 관직의 일 전부 혹은 일부를 책임지게 하는 관제상(官制上)의 의미가 있고, 이렇게 되면 경략(經略)이란 경략사(經略使)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이 부분을 좀더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한다. ↩
‘折風’은 후한시(後漢時) 고구려의 소가주부(小加主簿)가 썼다는 변(弁) 비슷한 관(冠)이라는 용례가 확인되므로 저화절풍(佇化折風)을 고구려의 풍속 교화를 오래 기다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듯도 하지만, 여기서는 ‘折’의 요절(夭折)이란 뜻을 중심으로 이해한다. ↩
여러 나라를 지배하는 제후(諸侯), 군사지휘자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추증(追贈)된 4군(郡)의 지배 관직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