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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한백겸묘및신도비(久菴韓百謙墓및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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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년 지금의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가마도에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이다. 정경세(鄭經世)가 글을 짓고 오준(吳竣)이 글을 썼으며, 김광욱(金光煜)이 전을 하였다.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판관 효윤(孝胤)이며, 어머니는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민순(閔純)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79년 생원시에 합격였다. 158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경기전참봉·선릉참봉 등에 제수되었다. 1589년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 임진왜란 때 대사면령으로 석방되었는데, 귀양지에서 적군에게 아부해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로로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었다. 역학(易學)에 해박해 선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했던 『주역전의 周易傳義』의 교정을 보았다. 전부인은 능성 구씨(綾城具氏)로서 사인(士人) 사중(思仲)의 딸이며, 후부인은 함창 김씨(咸昌金氏)로서 병절교위(秉節校尉) 정준(廷俊)의 딸이다. 김씨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비문의 내용을 통해 한백겸의 이력과 당시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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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
박원자
유명조선국 통정대부 호조참의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 구암선생 한공 신도비명 병서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 성균관사 동지 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세자좌부빈객 정경세(鄭經世)는 글을 짓고, 가의대부 한성부좌윤 겸 동지 의금부사 세자좌부빈객 오준(吳竣)은 글을 썼으며, 가선대부 행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세자우부빈객 김광욱(金光煜)은 전액을 하다.
만력 43년 을묘 가을에 구암(久庵) 한공이 한경의 서교 물이촌 사제에서 고종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공경 대부들을 같은 일을 하는 동도(同道)로서 서러워하고, 경생(經生) 학자들은 고덕으로서 슬퍼하며, 비록 평일에 서로 알지 못했던 사람들도 모두 슬픔을 머금고 아까워하기를,“착하고 좋은 사람이 죽었다.”라고 하였고, 재임하였던 군읍의 나이 많은 어른들과 선비들이 다투어 찾아와 술을 따르고 부의하면서 매우 서럽게 곡을 하니, 군자들은 공이 이처럼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은 것은 필시 도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바탕은 단아하고 기상은 화평하며, 말씨는 온순하고 모습은 공손하며, 자상스러움은 족히 남에게 도움을 주고, 정성스러움은 족히 사람을 감동케 하며, 마음가짐의 평서함은 이른바 한사람에게도 원망과 해악이 없다는 경지에 거의 가까우니, 이토록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죽은 후에까지 잊지 못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오호라! 이는 가히 공을 잘 알았다 할 수 있을 터이지만 공이 지니고 있던 바에 있어서는 이 말로써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 또 있었을 것이다.
공의 휘는 백겸(百謙)이요, 자는 명길(鳴吉)이니 그 선대는 청주 사람이었다. 이름하여 난(蘭)은 고려가 일어날 초기에 책훈은 벽상삼한이요, 관작은 삼중대광이며 직위는 태위였는데, 자손들도 관면으로 대를 이어 공업으로 현달하기도 하고 덕행으로 저명하기도 하면서 고려의 역사에 잇달아 있었다.
아조에 들어와서 이름하여 상경(尙敬)은 개국훈에 책봉되어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고 시호는 문간인데, 의정이 함길도 관찰사 혜(惠)를 낳고, 관찰은 좌찬성 계희(繼禧)를 낳았으며, 찬성은 한성부 판윤 휘 사무(士武)를 낳았으니 이 분이 공에게는 고조가 되는데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증조의 휘는 승원(承元)이니 정선 군수에 증 좌찬성이오, 조의 휘는 여필(汝弼)이니 문천 군수에 증 영의정이며, 고의 휘는 효윤(孝胤)이니 예로써 몸을 단속하여 일시의 추중한 바 되었는데 불행히도 일찍 별세하여 졸할 때 벼슬은 경성판관 겸 춘추관기주관에 그쳤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비 정경부인 신씨는 고려조의 충신인 장절공 숭겸(崇謙)의 후손인 예빈시정 건(健)의 따님이다.
공은 낳으면서부터 훌륭한 바탕을 지녀 어려서부터 글에 탐닉하였고, 나이 십칠팔 세 때에는 개연히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승정 민공 순(純)이 은거하면서 행의가 있고 옛 도로써 후진들을 가르치고 있음을 듣고 그의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민공이 공과 더불어 담론을 하여보고는 애중하게 여겨 일러주기를,“자네는 주부자의 말을 듣지 못했는가? 수신하는 대법은 『소학』에 갖추어져 있고 의리의 정미함은 『근사록』에 자세히 실려 있어 성인을 이루는 근기가 이 두 가지 책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선비가 학문을 하려면 마땅히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하네.”라고 하니, 공이 비장하게 감돌하고 드디어 민공을 좇아 학업을 마치기로 하여 학문의 공정과 사우(師友)의 연원을 매우 친절하게 얻어 들었다. 비록 일찍이 중론을 따라 과거를 보아서 상사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소중하게 여긴 바는 없었다.
경진년에는 외간을 당하였고 복을 벗은 지 겨우 한 해가 지나서 또 조모의 상을 당하여 몇 해를 외로움과 슬픔 속에 지냈으나 절대로 외적인 유혹에 빠진 일이 없이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함에 전념했다. 그리하여 먼저 계몽하는 책을 가지고 침잠하며 보기를 밤낮없이 하여 상수(象數)의 원리와 변화의 묘리에 마음으로 융합하고 정신적으로 획득함이 있어 그만둘래야 그만두지 못하는 취미가 있었다. 이로부터는 과업을 버리고 문을 닫고 휘장도 내리고 크게 의리에 관한 공부에 힘을 써 위로 육경과 어맹의 오지에서부터 아래로 염락관건의 말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젖어 들고 차츰 풀어 나가며 반복하여 참고하여 갔으니 그 연구의 정함과 견식의 투철함은 이미 세상 선비들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로지 위기학에 힘써 남에게 알려짐을 부끄러워하며 항상 감추기에 힘썼기에 남들은 공이 독학하는 선비임을 아는 이가 적었다.
병술년에 천거한 사람이 있어서 중부 참봉에 제수되었고, 얼마 후에는 경기전으로 옮겼으며, 조금 뒤에는 또 선릉으로 바뀌었으나 병으로 취직하지 못하였다. 기축의 역옥이 일어나니 옥사를 다스리는 실권자가 사람을 끌어들이기에 힘써 한때의 진신들이 무고와 오욕을 당하였는데 공은 호남에 있었기 때문에 이진길과 알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난국을 당하여 거의 죽게 된 몸으로 경원에 정배되었다.
임진년에 대사를 받았으나 길이 막혀 돌아올 수가 없었는데 마침 변방 백성 가운데 선동하고 작란하는 자가 있어 왜병과 내응하니 관군은 흩어져 달아나도 누가 감히 어쩌지를 못하였다. 공은 같이 귀양살이 하던 한두 사람의 선비와 눈물로 호소하며 병사를 소집하여 선동자를 붙들어 베니 한 지방이 진정되었다. 이 일이 행재소에 알려지니 내자시직장으로 특서되었고, 이듬해에 처음으로 조정에 나가니 한성부 참군으로 이배되었다.
갑오년에 선조가 경연을 열었는데 공더러 나와서 희역(羲易)을 읽으라고 명하였다. 이 때는 중회 경시의 시작이었는데 지모가 뛰어난 제공들이 공이 역학에 정통하다고 함께 천거하며 격식을 타파하고 입시케 하여 강론에 이바지하게 하자고 청하여 임금이 윤허하였던 것이다. 그 일이 비록 중지되기는 하였지만 당시에 영광으로 여겼다.
대신들이 인재가 모자라자 10조(사람을 뽑는 열 가지 기준, 세목은 미상)로 사람을 뽑고 자격에는 구애치 말 것을 건청하였는데, 공은 학술과 시무를 안다는 두 가지로 수선에 해당되어 호조 좌랑에 탁배되었다. 조금 후에는 형조조랑으로 옮겼고, 이어 안악현감으로 나갔는데 치정이 항상 으뜸이어서 함종현령으로 올려 제수하니 안악백성들이 공거(公車,즉 政院)에 나가 호소하여 증질만 시켜 잉임케 하라 명하였다.
기해년에는 불편한 곳이 있어서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고, 경자년에는 형조 정랑으로 나갔다가 영월 군수로 제수되었는데 신축년에 아우 서평공이 체찰 부사가 되어 본도로 나오게 되니 규례상 피하여야 하기 때문에 공조정랑에 체수되었다.
선조께서 『주역』의 전과 의가 서로 같지 아니하니 구두(句讀)나 음석(音釋)이 마땅히 두 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학자들이 편파적으로 정전(程傳)만을 주장한다 하여 중외의 유신들을 모아 국을 설치하고 바로 잡으라고 명하였는데 문과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거기에 뽑힌 사람을 공과 홍공, 가신 정공구 등 몇 사람 뿐이었다. 얼마 후에 조사가 곧 오게 되어 그 일을 중지하고 공을 연안부사로 내보냈다가 조사가 돌아가니 역마를 달려 불러들여 사도시정으로 올리고 다시 토론 상증케 하니 많은 이정이 공한테서 나왔다. 일을 마치자 일등의 잔치를 내렸는데 그때에 공은 이미 청주목사가 되었지만 특명으로 참석하게 하니 이 또한 특이한 대우였다.
갑진년에 본도에서 공의 실적을 올리니 교서를 내려 포장하고 통정계에 올려주었다. 정미년에는 임기가 다 되어 장예원판결사로 들어와서 호조참의로 옮겼다. 무신년에는 선조가 승하하였는데 병화를 겪은 뒤로 의범이 흩어 없어져서 대상을 당하자 예관들이 급해서 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신들은 공이 예에 익숙함을 알고 빨리 들어와서 빈전의 일을 보살피라 재촉하였는데 그 때문에 염습 등 모든 의절에 그르침이 없었다. 그때에 정경부인은 서평공의 봉양을 받기 위하여 평양에 있었는데 몸이 불편하여 공은 말미를 청하여 달려가 성친을 하고 이어 글을 올려 해직을 청하였으며 인하여 공물의 폐단은 생민의 큰 병폐가 되고 있음을 극론하고, 아울러 개현할 일을 아뢰었는데 그 절목이 매우 상세하였다. 이 일을 묘당으로 내린 이 상공 원익이 방자 청정을 총괄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 진언을 옳게 여겨 선혜청을 설치하고 우선 경기지방부터 실시하니 경기도민의 숨돌림이 실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5월에는 상을 당하여 경술년에 복을 벗으니 규례대로 서반진을 제수하였다. 공은 한숨을 쉬면서 탄식하기를,“나는 본디 병이 많아서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늙기도 하고 부모도 아니 계시니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여생을 보내지 못할 일이 어디 있으랴?”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평공이 서호 아래 수이촌에 밭을 사서 공에게 주니 공이 작은 집을 짓고 살았었는데 이때에 와서는 그 자리에다 서재를 넓히고 날마다 그 가운데에서 거처하면서 옛날에 하던 공부를 익히고 궁리하니 조예는 더욱 깊어지고 즐거움은 더욱 참다워져 드디어 마을 이름까지 물(勿)이라 고치고 기(記)를 지어 뜻을 나타냈다.
신해년 겨울에 파주목사를 제수하니 억지로 부임하였다가 얼마 후에는 인수를 버리고 돌아오고 말았는데, 계축의 변에 이르러 서평공이 무거운 견책을 받으니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 후임자에게 파주목사의 임무를 인계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깊이 들어 앉아 입으로는 시사를 말하지 않았다. 날마다 자녀 질손들과 경사를 담론하고 의리를 해석하면서 양식이 여러 번 떨어졌으나 태평스러워하였다.
2년이 지난 유두일에 시물을 가묘에 바치다가 더위에 상한 후 병이 더하여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향년 64세이다. 서평공이 상중에 상주를 이끌고 동쪽에 자리를 봐두었다가 이해 9월에 원주치서 가마도의 선조 하에 장사지냈으니 유명에 따른 것이다.
처음 의정공이 몰한 후에 공이 집안 살림을 맡아보면서 정경부인을 받드는데 안색을 살피고 뜻을 따르는 데 곡진하지 않음이 없었고, 시집가지 아니한 누이가 넷이나 있었으나 의방으로 가르치고 때맞추어 시집을 보냈는데, 그때에는 할머니도 계시고 기공이 집안에 가득하였으나 공은 능히 좌우로 주선하여 일찍이 섬기고 봉양하는 것을 갖추어 정경부인에게 걱정을 끼친 일은 없었다.
공은 항상 장공예(張公藝,고종 때 사람으로서 九世同居로 유명함)의 풍도를 사모하고 종인들과 공찬하고자 하여 대략 사마온(司馬溫)공 집안의 의범을 본떠서 책 한 권을 베껴서 재물의 관리나 씀씀이, 그리고 의식의 규례로 삼고자 하였다. 비록 힘이 모자라고 성세에 얽매여 뜻대로 이루지는 못했을망정 서평공과는 반생토록 재산을 함께 관리하였으니 안으로 모두 그 정성에 감복하여 집안이 항상 엄숙하였다.
공의 처사나 행위는 사소한 것까지 고인을 본받아 관혼상제의 의식은 반드시 널리 예경을 상고하여 정문(情文)이 둘 다 극진하기에 힘썼다. 여느 때에도 방안에 단정히 앉아 조용히 정신을 모으고 종일토록 글을 읽되 입으로 소리를 내지 아니하니 보기에도 장중하여 가까이 할 수 없는 듯 하였다. 그러나 정작 사람을 대할 때에는 화평하고 소탈하게 성심을 피력하여 사람의 현우를 막론하고 다 그 사람의 환심을 샀으며, 후생이나 어린 사람들을 만나면 반드시 도의를 역설하였는데 그 말이 명백 간측하고 간결하면서도 조리가 분명하였으며 양단을 다 드러내어서 모두 착한 경지에 들어가게 하고자 하였는데, 대개 그의 선을 좋아하는 정성이 나와 남의 구별이 없었기에 고을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역시 이런 마음으로 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학문을 일으키고 무예를 닦음에도 반드시 교양에 먼저 치중하였고 백성을 다스리고 관리를 다스림에도 한결같이 은혜와 신의로써 하여 일찍이 매나 회초리로 독책에 힘쓰지는 아니하였다.
모든 시설을 할 때에는 반드시 멀리 도모함에 마음을 두고 목전의 효과를 구하려 하지 않았기에 국가에 일이 많아 다투어 엄급하기 쉬운 때에도 능히 체통으로 서로 유지하고 정의로 상호 신뢰하여 일에 부합되었으니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규모나 배치에도 항상 후임자에게 취법함이 되도록 하였는데, 공의 사람됨이 온화하며 간략하고 깨끗하여 어떤 능한 바도 없는 듯 하였지만 처사를 보면 반드시 상밀하고 조리가 있었으니 이는 경과 용을 연구해서 터득한 힘이라 하겠다.
공의 학문은 사색을 주로 하여, 글자에서는 훈(訓)을 구하고 글귀에서는 그 뜻을 구하여, 뒤얽힌 곳에서는 풀어서 이해하고자 하였고, 의심되는 곳에서는 타파하고자 반복 연구하여 이해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육경의 문자는 주나 소의 가린 바가 되어 점차 그 본뜻을 잃고 있으니 독자들은 덮어놓고 빠져 들어서는 아니 된다. 마음에 미심스러운 곳이 있으면 비록 선현들의 말이라 할지라도 구차하게 따라 갈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고, 『맹자』의 「원모장」 같은 데에 대해서도“효자의 원망은 바로 그 어버이를 사모하는 것으로, 감히 미워하거나 원망해서는 안된다는 말과는 당초부터 별도의 한 뜻이 있는 것이기에 이 장이나 「소변장」에서는 다 먼저 원망한 뜻을 말하기는 하였지만 종국적으로는 모(慕)자에 귀숙한 것이니 맹자의 뜻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유독 아들이 어버이에게만 그러하랴? 신하나 처첩이 임금과 남편을 섬김에 있어서도 이와 비슷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이 점에 있어서는 종풍이나 이소도 충신과 열녀가 먼저 원망의 뜻을 부른 것이지만 사람들이 ‘윗사람을 비방하였다’, ‘남편을 책망했다’라고 나무라지는 않고 있다. 원망의 죄율을 부도와 같이 취급한 것은 한가의 너무 깊이 파고든 문이지 선왕들의 충후한 본뜻은 아니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이른바 앞의 성현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바로, 세상의 교육에 도움이 됨이 크다고 하겠다. 북방변새의 위험과 빈번한 죽음 속에서도 오히려 책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생사가 상순하여 의식이 바야흐로 걷히려는 찰나에도, 서평공이 곁에서 생사의 이치를 물으니 공은 이미 호흡이 계속치 못한 중에서도 오히려 주역의 원시반종(처음이 있으면 종말도 있다는 뜻)의 설을 들어 입속의 말로 대답하였고, 또 이르기를 "책에 한해서는 내가 참으로 뒤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약간 총명한 면도 있었는데 병으로 힘써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우나 이제는 그만이다."라고 하였는데, 종시 전학한 정성이 엎어지고 자빠져도 변함이 없었고 죽음에 임하여서도 빛났으니, 오호라! 참으로 독호했다 할만 하도다.
서술한 책 약간 편이 집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말의 이치가 지극하여 전할만한 게 많고 간혹 선현들이 말한 이외의 일에 대하여 입언도 하였는데 비록 그 정밀함과 조악함, 그리고 깊고 낮음을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오래 생각하고 힘써 탐색한 공력만은 책을 펼쳐보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공의 전취 능성 구씨는 사인 사중의 따님인데, 일 년도 채 못 되어 죽었고, 김씨로 계실을 삼았는데 함창의 대성으로 고려조의 시중 보문각대제학 인완의 후손인 병절교위 정준의 따님인데, 어머니는 성균 생원 응순의 따님이다. 부인은 시골에서 자랐으나 집안은 본래 풍요하였는데 능히 근검하고 예법을 지켜 구고를 섬기고 제사를 받듦에 있어서 한결같이 남편이 하는 대로 따라 조금이나마 실추함이 없었다. 형제나 동서들을 대함에 애정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생질을 어루만지고 양육함에는 자신의 자식 다름없이 하는 정도가 아니었으니 종족들 모두가 어질게 보았다.
부인은 계축년에 태어나 공보다 17년 후에 몰하였으니 향년 79세이다. 일남일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흥일(興一)로 홍문관 교리이다. 판서 오공 억령의 딸을 취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종형 회일의 아들 이평을 데려다 뒤를 삼았다. 딸은 사인 홍비에게 출가하였다. 흥일이 정사 원종훈에 책록되었기에 공은 가선대부 이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되고, 부인은 정부인에 봉해졌다. 공이 졸한지 거의 10년이 지났는데 서평공이 서신으로 나에게 명을 청하면서,“나의 형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깊이 알기는 자네만한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도모해주게.”라고 하였다.
희라! 나는 공과 종유한지 오래여서 듣지 못했던 바를 들은 바도 매우 많았지만, 후일 나의 공부가 조금 나아지면 공에게 잘못을 바로잡기를 별렀었는데 이제는 이미 계획이 어그러져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공의 평생을 그대로 서술하여 후세에 알리고자 하는 바이지만 화려하지 못한 책임이야 어떻게 마다하겠는가? 삼가 서평공의 가장에서 간추리고, 평일 보고 들은 바를 참작하여 그 굵은 것만 위와 같이 적고 명을 다는 바이다. 명하기를,
온화하고 공손함은 덕의 기본이라고, 대아(大雅)에 훈계한 바 있었는데,
옛날 공도 이것을 들어 학문의 근본이라 말하였지.
나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실로 그 말은 뜻이 있더구먼.
선현도 입언하기를, 뜻이 겸손해야 수양이 온다 하였지.
이윽고 공을 지켜보니, 미덥게도 그 말을 따르고 있더구먼.
사색과 학문을 둘 다 진전시키면서, 겸손과 겸손으로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지.
색구(塞丘), 전분(典墳)(모두 상고의 책 이름)의 유명 거세를 탐색하지 않은 것이 없이,
하나의 근원으로 모아 이미 간직하고 채웠는데도 없는 듯 허한 듯만 하였느니라.
그러나 신명이 안으로 살쪄 있으니 화창하고 따스한 기상 밖으로 풍겼느니라.
사람들은 그 광채만 즐겨 하였고, 그 온자는 엿볼 줄 몰랐느니라.
그 온자 어떠하였던가? 가히 베풀고 운용해볼 만하였느니라.
고을에서 조금은 시험해 봤지만, 기미만 보이고 바닥은 보이지 못했느니라.
가진 것 둘둘 말아 영영 갔는데, 공에게야 아쉬울 게 뭐가 있던가?
오래지 않았다고 말까지 없었으랴? 불후할 만한 것은 남아 있었지.
나는 명으로 그 모습 그려 묘문에 돌을 세우게 하노라.
숭정 17년 2월 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