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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묘갈(李莞墓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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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1717년 지금의 용인시 수지면 고기리에 이완(李莞, 1579∼1627년)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묘갈이다. 이진망(李眞望)이 誌를 하였고, 이한일(李漢一)이 글을 썼다. 자는 열보(悅甫)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아버지는 참판(參判)을 증직받은 희신(羲臣)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晋州姜氏)로서 세온(世溫)의 딸이다. 순신(舜臣)의 조카이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사실을 알리지 않고 독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599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623년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이듬해 이천으로 도망치는 이괄(李适)의 난군을 평정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적이 의주를 포위하자 힘을 다해 적과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분사(焚死)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706년 아산 현충사에 배향되었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서 서윤(庶尹)을 지낸 희(僖)의 딸이며, 부인과의 사이에 1남을 두었다. 묘갈을 통해 이완의 간단한 이력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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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
노효경
공의 휘는 완이요 자는 열보로서 덕수인이다. 고조는 거로서 참의를 역임하였고, 증조는 백록으로 봉사를 지냈으며, 조부는 정으로 의정에 증직되었다. 부는 의신으로 참판에 증직되었고, 모는 진주 강씨 세온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 기묘(선조 12, 1579년)에 출생하였다. 20세 때에 숙부 충무공 순신을 따라 군영에 있었는데 바다에서 싸우던 중 충무공이 홀연히 탄환을 맞자 공은 급히 유촉을 받들어 뱃머리에 나아가 큰 소리로 기를 흔들면서 지휘하여 마침내 적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다음해 무과에 올라 곧바로 도총도사를 제수되었고, 갑진년에 남포 현감이 되었다. 혼조(광해군)를 만나서 한가하게 막부의 진영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절충에 올랐고 계해년에는 충청병사로 탁용되었다.
갑자년에는 군사를 일으켜 국난을 도와 그 공으로서 가선대부에 포상되었다. 겨울에 의주로 옮겨서 임기를 넘겼는데 특명으로 그대로 유임하였다. 그때 금나라 사람들이 몰래 군사를 일으켜 밤에 횃불로 군진을 포위하면서 침입하여 들어왔는데 공은 이들과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마침내 몸을 불에 던져 죽으니 정묘년 정월 14일이었다. 일찍이 의주에 있을 때 그 종형에게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 “이미 죽기로 마음을 정하였으므로 다른 것은 족히 염려할 것이 없다. 비록 일이 창졸간에 일어났으나 평소에 품은 뜻으로서 일을 대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듣고 병조 판서로 추증하였고 숙종 갑신년에 명하여 정려를 세웠다. 금상 병오년에 이르러서는 충무공 사당에 모시어 제사하도록 명하였다.
오호라! 공의 담략은 일찍이 노량에서 보았으며, 공의 충절은 의주에서 드러났도다. 진실로 이른바 “하늘 아래 그 충절을 짝할 수 없도다.”고 한 말이 사실임을 알겠다. 국가에서 공을 숭보한 의례도 역시 지극한 것이라 하겠다.
부인은 파평 윤씨로서 서희의 따님으로 신사년에 출생하여 경자년에 돌아가셨다. 1남을 두었으니 이름은 연이고, 손자는 준, 오, 제, 만을 두었다. 증손과 현손은 약간 인이 있다. 지금 묘표를 세우는 이는 만의 아들은 홍식이다.
행 부제학 이진망이 쓰다.
숭정후 두 번째 돌아온 정유년(숙종 43, 1717년)에 묘표를 세웠는데, 정미년(영조 3, 1727년)에 묘표가 엎어져 깨졌다. 신묘년(영조 47, 1771년) 11월에 고쳐 세우고 원래의 써진 것을 그대로 따랐다. 5대손 전직 지평을 지낸 한일이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