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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겸신도비(韓浚謙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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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1629년 지금의 시흥시 군자동에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이다. 1652년 6월에 다시 세웠다.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오준(吳竣)이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을 하였다. 아버지는 경성판관 한효윤(韓孝胤)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서 예빈시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딸이다. 1579년 생원시·진사시에 합격, 1585년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주서·봉교·전적 등을 거쳐 1589년 금천현감(衿川縣監)이 되었으나, 그 해 겨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좌되어 투옥되었다. 1592년 다시 기용되어 예조정랑을 거쳐, 강원도도사·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좌부승지에 올라 명나라 도독 마귀(麻貴)를 도와 마초와 함께 병량의 보급에 힘썼다.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우승지·경기감사·대사성 등을 거쳐, 다음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의 알력으로 파직당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그의 딸이 인열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자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에 피난한 왕을 호종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왕자를 전주에서 시종하였다. 부인 창원 황씨(창원황씨) 사이에 2남 4녀를 두고 있다. 비문을 통해 광해군 때부터 인조 때의 정치적 상황을 세세하게 읽을 수 있다.
유명조선국 대광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 겸 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문익 한공 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輔國崇祿大夫領敦寜府事西平府院君兼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贈謚文翼韓公神道碑銘并序).
열심히 공부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생각이 심원한 것을 ‘익(翼)’이라고 한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이정구(李廷龜) 지음, 대광보국숭록대부 행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 김상용(金尙容)은 전액을 씀, 가선대부 행 연안 도호부사 해주진관 병마 동첨절제사 오준(吳竣) 씀.
우리 동방의 세가 명벌을 살펴보면, 국승에 실린 기록으로써 그 집안의 흥망성쇠를 훤하게 알 수가 있다. 이를 집안 중에서는 혹은 처음에는 성하였다가 종말에 가서는 쇠퇴하기도 하고 혹은 중세에 이미 막혀서 드디어 떨치지 못하게 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대로 빛나는 사업으로 이어와 갈수록 더욱 창성한 집안은 청주 한씨가 그 으뜸이라 하겠다.
시조 란(蘭)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합하여 벼슬은 태위에 이르렀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봉하여졌다. 휘 강(康)에 이르러서는 유술(儒術)로 현달하여 충렬왕을 도와 벼슬이 중찬에 이르렀고, 문혜(文惠)란 시호를 받았다. 사기(謝奇)는 보문각 제학이요, 악(渥)은 우정승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으로 시호는 사숙(思肅)이며, 공의(公義)는 정당문학 청성군(淸城君)으로, 시호는 평간(平簡)이요, 수(脩)는 우문관 대제학으로 역시 청성군에 훈봉되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상경(尙敬)은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시호는 문간(文簡)이요. 혜(惠)는 함길도 관찰사이며, 계희(繼禧)는 좌찬성 서평군(西平君)으로,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이로 볼 때 이 집안은 9대가 연 이어 경상(卿相)을 지냈다. 그 후 사대는 벼슬은 비록 크게 높지는 못했을망정 모두 이름을 떨쳤다. 휘 사무(士武)는 한성부 판관에 증 좌참찬이요, 휘 승원(承元)은 정선 군수로 증 좌찬성이며, 휘 여필(汝弼)은 중추부 경력으로 증 영의정이요, 휘 효운(孝胤)은 경술과 예학으로 공들 사이에서 촉망이 있었는데, 경성 판관으로 졸하여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공은 이분의 셋째 아들이다.
공의 휘는 준겸(浚謙)이요, 자는 익지(益之)요, 호는 유천(柳川)이다. 비는 평산 신씨니 태사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의 후손인 예빈시 정 건(健)의 따님이다. 가정 정사년(1557년)에 한성에서 공을 낳으니, 공은 일찍 성숙하여 여섯 살 때에 벌서 능히 문장을 지을 줄 알았으며, 하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였다. 열두서너 살 때에는 이름 있는 사람들과 교유하면서 간혹 글을 읊기도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전송하였다. 기묘년(1579년)에는 생원시에 장원하고, 진사시에는 제 칠등을 하였으며, 초시에 합격하여 삼장(三塲)을 장원하였으며, 시 또한 으뜸이어서 그 명성이 크게 떨쳤다. 경진년(1580년)에는 의정공(議政公)의 상을 당하였고, 을유년(1585)에는 태릉 참봉에 천거되었으며, 병술년(1586년)에는 과거에 급제하여 사국(史局)에 뽑혀 검열이 되었다가, 곧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선조가 직접 문제를 출제하여 유신(儒臣)들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올리라 하였는데, 이 때 공이 장원하니 왕은 공에게 표범 가죽으로 만든 담요를 하사하였다. 이산해(李山海) 공은 가끔 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후일 문형을 맡을 사람은 틀림없이 이 사람일 것이다.”고 하였다. 또 어제시(御製詩)를 차운하여 바치니, 왕께서 마장(馬粧)을 하사하셨다. 무자년(1588년)에는 주서로 옮겼다가 기축년(1589년)에는 봉교로 돌아와 관례에 따라 전적으로 올라 바로 금천 현감으로 나가게 되었다. 선조께서 정청(政廳)에 하문하여 공이 노모가 계신 줄을 알고 점하(點下)하였으나, 조정에서 ‘사람을 씀이 전도되었다.’고 반발하여 크게 물의가 일었으며 마침내는 이로써 정관(政官)을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그 해 가을에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명을 받았다. 겨울에는 정여립(鄭汝立)의 모역이 발각이 되었는데, 공은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한 죄로 파직되어, 한 달이 지나서야 풀려나왔다. 백씨(伯氏) 참의공(叅議公)도 북쪽 변방으로 장배(杖配)되니,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태롭게 보았다. 그러나 공은 태연히 처신하였으며, 원주에 전답을 사서 이사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임진년(1592년)에 예조좌랑, 예조정랑, 강원도사, 시강원 사서를 거쳐 겨울에는 원주목사를 배수하였다. 이 때 공은 유민을 초집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무하니, 온 경내가 편안하였다. 을미년(1595년)에 지평으로 소환 되어 돌아왔으며, 이후 필선, 정언을 거쳐 홍문관 교리 겸 필선을 역임하였다.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 재상이 공을 종사관으로 천거하여 양서(兩西)를 순찰하였는데, 유상이 공을 높이 평가하여 평교로 허여하였으며, 나라에 대사가 있으면 반드시 공을 불러 의논하도록 하였다. 조정에는 공을 차례를 뛰어넘어 발탁하였던 바, 하루는 부수찬으로 의망하였다가 또 다시 경상도 관찰사로 의망하였으니, 이는 지금까지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얼마 후에 보덕에서 의정부 검상과 사인을 배수하였고, 이후 부응교, 사간, 보덕을 거쳐, 집의 겸 승문원 참교가 되어 자게(咨揭) 문자를 도맡아 지었다. 정유년(1597) 팔월에는 전한에서 동부승지를 특배하였으며, 얼마 후 좌부승지로 올랐다. 그 때에 적은 호남과 경기를 압박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는 선조를 모시고 함께 강을 건너려고 하여, 왕께 청하여 지략이 있는 재신 한 사람을 먼저 보내 식량과 마초를 준비하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 상께서는 공을 명하여 가도록 하였으나, 적이 패주하자 공은 다시 돌아왔다. 이어 우승지로 오르니, 명나라의 제도를 따라서 파발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파발이 신설되니, 변경의 급보가 갑절이나 빨리 전하여져 지금도 그 편리함을 칭송하고 있다. 그 해 겨울에는 경기도 감사를 특배하였고, 무술년(1598년)에는 이 직을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고 첨중추부사로 소환하였다가, 이어 대사성을 배수하였다.
기해년(1599년)에는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 때에 홍여순(洪汝諄) 등이 이미 유상(柳相)을 탄핵하였는데, 공까지 함께 탄핵하려 하였으나 빌미가 없어 이루지 못하였다. 공이 영남을 안무하면서 본래부터 정인홍(鄭仁弘)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그 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며, 부탁이 있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인홍이 크게 유감을 품고 그 수하인 문홍도(文弘道)를 시켜 없는 사실로 모함하여 파직이 되었다. 경자년(1600년)에는 병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로 서용이 되었고, 신축년(1601년)에는 사도(四道)의 도체찰부사를 겸하게 되었다. 임인년(1602년)에는 다시 병조참판에서 전라감사로 나갔으며, 계묘년(1603년)에는 예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그 때에 국내에 우환이 많아 임금께서 대신들과 도원수의 재목을 의논하니, 재상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한준겸이 관직과 품계가 낮기는 하지만, 인망과 실제가 모두 뛰어나니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고 하여 드디어 4도의 도원수가 되었다. 가선으로서 원수가 된 사람은 국조에 단 한 사람뿐이라 한다. 이어서 홍문관 부제학을 배수하였다. 갑진년(1604년)에는 이조참판으로 옮겼다가 다시 부제학과 공조참판이 되고, 겨울에는 다시 이조팜판 겸 부빈객이 되었다. 을사년(1605년)에는 호남, 영남 지방에 군무로 나가게 되어 해임을 청하였으나, 전조(銓曹, 이조)에서 듣지 않았다. 그 후 왕명으로 소환되어 내구마(內厩馬) 한 필을 하사 받았다. 이 후 누차 사면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관직을 바꾸어 대사성과 부제학을 배수하였다가 호조판서로 특별히 승진하게 되었다.
병오년(1606년)에 조사(詔使)가 나왔을 때에는 남고 모자람이 없이 조달을 잘하여 접응에 유감없이 하였다. 대사헌 겸 동지경연사에서 평안감사로 나갔다가 무신년(1608년)에는 대부인 상을 당하였고, 복을 벗자 판윤, 대사헌을 잇달아 배수 받았으며, 이 후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 부임하자 개연히 교화에 뜻을 두어 늙은이를 존경하고, 특이한 행실을 정표하였으며, 사족의 자제들에게 교육을 시켜 정식을 만들어 권학하였다. 가례(家禮)와 소학(小學)의 관혼상제 제식에 방서(方書)를 가해 출간하여 널리 민간에 돌려 읽도록 하니, 거친 지역이 일변하여 문교(文敎)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계축년(1613년)에 사형수 박응서(朴應犀)가 이이첨(李爾瞻)과 공모하여 옥중에서 왕께 변을 고하니, 이로서 큰 옥사가 일어나 국구(國舅)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은 사형을 당하고, 영창대군은 강화에 유폐되었다. 옥사는 사대부에게까지 번졌다. 처음 선조께서 병이 점점 더해지자 광해군이 골육을 보전치 못할 것을 염려하여 손수 유교를 썼으니, 요약하면 “죽고 사는 게 명이 있으니 무슨 말을 더하랴마는, 다만 대군이 어리고 장성함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내가 죽은 후에라도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제공은 보호하여 부지하도록 하오. 이를 부탁하는 바이오.” 하고는 바깥 면에 공을 비롯한 7인의 이름을 써서 이를 봉하여 궁중에 두었는데, 제공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이이첨이 이르기를 “이 유교는 거짓으로 꾸민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헌납 유활(柳活) 등이 먼저 일곱 신하들이 이에 연계된 사연을 즉시 해명하지 않는 죄를 논하여 탄핵하니, 이로써 공도 사판(仕版)에게 삭제를 당하였다. 얼마 후에 정협(鄭俠)이란 자가 흉도들의 사주를 받아 널리 이름 있는 공경들을 죄에 연류시켜 이들을 사방으로 체포하니, 공도 수감을 당하였다. 광해군이 친히 국문을 하면서 실정을 듣고는 즉시 방면하니, 이로써 공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은 연흥(延興)과 더불어 평소부터 서로 친하지 못하였고, 그것을 증거할 만한 일도 있어 국문을 받게 되었을 때 친척들이 공에게 그 사실을 밝힐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죽고 사는 것은 명이다. 내가 급하다고 남을 팔아서 이를 면하기를 꾀한다는 것은 내가 차마 못한다.” 하였다. 풀려나온 날 바로 호장(湖庄)으로 나가 백씨 참의공과 산을 사이에 두고 살면서 장리로 내왕하며 경사를 토론하고 시와 술로써 즐거움을 삼았다. 흉도들이 찾아와도 피하고 만나주지 않았으며, 혹 안부를 묻는 편지가 있어도 답장도 하지 않았으니, 소인에 대한 엄중함이 이와 같았다. 이이첨의 무리들이 모후를 폐하려고 연흥의 시신을 추륙(追戮)하여 저자에 내걸고, 정사년(1617년)에는 7신의 죄를 다시 논하여 공을 충원에 부처(付處)하니 몇 칸 안 되는 초옥에서 오년 동안을 살면서 문 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신유년(1621년)에는 여주에 양이(量移)되어 살고 있는데, 청인들이 요동과 광동을 함락하고 동으로 우리나라를 치겠다고 큰 소리를 치니 안팎이 흉흉하였다. 조정에서는 원수를 뽑아야 하는데 사람을 구하기 어려웠다. 비국(備局)에서는 모두 한모가 아니고서는 적합한 사람이 없다고 하여 공을 이에 추천하였다. 이로서 유배지에서 풀려나 지중추부사 겸 오도 도원수를 제수 받았다. 화를 입을 소지가 다분한 처지여서 억지로 응하기는 하였으나, 시사(時事)는 이를 감당할 가망이 없이 되어 있었다. 공은 소를 올려 사면을 청하니, 광해군은 “대한(大寒)에는 갓옷을 찾기 마련이오.”하고 비답을 내렸다. 그 해 겨울에 적이 재반(材畔)에 이르니, 공은 옛 부오(部伍)를 수습하여 관서에 달려가 중화(中和)에 진을 쳤다.
계해년(1623년)에 우리 성상께서 의를 내세워 반정을 일으키니, 중궁전하는 곤극(坤極)의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이로서 공은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정 의논이 “국구는 예에 의하여 밖에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여 공을 소환하였다. 명을 받고 공은 더욱 몸둘 바를 몰라서 침식이 불안할 정도였다. 유도대장(留都大將)과 도체찰사를 겸하게 하니, 공은 초친(椒親, 왕비의 친척)은 나라 일에 간여하여서는 안 된다고 누차 사양하였으나 윤허치 않았다.
갑자년(1624년)의 이괄(李适)의 난에는 거가를 호위하여 남으로 파천하였다가 이괄이 처형된 뒤에 돌아와 지춘추관사를 겸임하여 광해일기를 편수케 하였으나, 극력 사양하여 명을 받지 아니하였다. 또 도체찰사와 도총관도 내어 놓았다. 정묘호란에는 배위대장(陪衛大將)으로 왕세자의 분조(分朝)를 따라 남하하여 전주에 이르러 무군사(撫軍司) 당상이 되어 조절하고 베푸니, 군민이 크게 기뻐하였다. 적이 물러간 뒤에 분조를 모시고 행재소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이 후 병이 심해지자 공은 자제들을 불러 왕께 올릴 상주문을 쓰라하고는 장차 유표(遺表)를 올리려 하였는데, 이미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정석(正席)을 사랑채로 옮기라 하고는 바로 이 세상을 떠나시니 칠월 칠일이요, 춘추 칠일세이다. 부음을 듣고 임금께서 슬퍼하여 삼일 간 조회를 파하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상례를 도왔다. 왕세자도 당일로 거애(擧哀)하고 장례에 참석하여 조문하였으며, 경사(卿士)로부터 금려(禁旅), 시민, 이서배, 복예(僕隷)에 이르기까지 공의 빈소에 달려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 없었다. 사람들은 빈소에서 “선인(善人)이 졸하였으니, 나라가 어떻게 되려는지?” 하였으며, 조객들도 슬피 울었고 장지에 모인 자는 무려 3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 해 구월 임오일에 원주 음지촌(陰枝村) 경향(庚向, 서서남쪽을 향함)의 언덕에 장례를 모셨으며, 태상시에서는 문익(文翼)이란 시호를 내렸다.
부인 황씨는 창원의 명망 있는 씨족이니, 대대로 의관(衣冠)이 있었다. 부친의 휘는 성(珹)이니, 예조좌랑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고원 군수 이고(李皐) 공의 따님을 취하여, 신유년(1561년)에 부인을 낳으니, 열네 살에 공에게 시집왔다. 단아하고 현명하여 시부모를 잘 받들었다. 집안 살림과 음식 범절에 남 다른 솜씨가 있었다. 공의 집이 가난하여 조석을 빌려야 할 형편이었으나, 반찬이나 주식(酒食)의 봉양에 한 번도 구차한 빛을 보인 일이 없었다. 원주의 관아에서 졸하여, 후일 정부인(貞夫人)에 증질되고, 회산부부인(檜山府夫人)에 진봉되었다.
이남 사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회일(會一)이니, 남양부사요, 판서 이성중(李誠中)의 딸을 취하여 이남 삼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성(以成)과 이평(以平)이요, 딸들은 사인 신익융(申翊隆)과 정하(鄭何)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하나는 아직 어리다. 둘째 아들 소일(昭一)은 재질이 뛰어났으나 요절하였는데,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딸을 취하여, 일녀를 두었으나 역시 요절하였다. 맏딸은 종부시 정 이유연(李幼淵)에게 출가하여 첫째 딸을 안헌규(安獻規)에게 출가시켰다. 둘째 딸은 시강원 보덕 여이징(吕爾徵)에게 출가하였고, 셋째 딸은 대사간 정백창(鄭百昌)에게 출가하여 이남 일녀를 낳으니, 아들은 선흥(善興)과 선홍(善弘)이요, 딸은 아직 어리다. 넷째 딸은 바로 우리 중궁전하인데, 첫 번째로 원량(元良)을 낳으니 세자로 계시고, 둘째는 봉림대군 호(淏)요, 셋째는 인평대군 요(㴭)니, 아직 궁중을 나오지 않았다. 측실에서 딸 둘이 있으니, 허통(許通) 이환(李煥)과 진원부수(珍原副守) 세완(世完)이 그 사위이다. 이성(以成)은 전적 안홍량(安弘量)의 딸을 취하여 일남을 낳았고, 신익융은 이남 일녀를 두었으며, 정하는 이남을 두었고, 안헌규는 이남 일녀를 두었으며, 이환은 일녀를 두고 세완은 일남을 두었으나 모두 어리다.
공은 얼굴이 뛰어나고 기운이 충실하였으며, 자질은 후중하고 재주는 좋았다. 관평하고 엄중하고 독실하게 전아하여 보기에 벌써 큰 덕이 있는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평소에도 말을 빨리 하지 않고 바쁜 기색이 없어, 행동거지가 원대하여 무엇인가 경륜할 바 있는 듯 하였다. 사람을 대함에는 혼연히 온화하게 대하였고, 남의 잘못을 들으면 즐거워하지 않았으며, 성낼 일이라도 말이나 얼굴에 나타내지 아니하였고, 혹 일부러 격동하여도 웃을 뿐 성내는 일이 없었다. 북쪽에서 체직되어 왔을 때에도 금오랑이 적신(賊臣)의 지시를 받아 여러 모로 곤욕을 주었으나, 공은 더욱 공손히 대하였고 자제들에게도 원망을 갖지 말라 신칙하였으며, 뒷날 그가 누구인지 묻는 사람이 있었으나 끝내 말하지 않았다. 유가서를 즐겼으며 더욱 예학을 좋아하였고, 널리 공부하고 잘 외워서 책을 읽을 때에는 몇 줄을 한 번에 내려보았으며, 한 번 보면 일생 동안 잊지 않았다. 국가의 고사에 밝았으며 문헌과 전장(典章)의 손익, 연혁에 꿰뚫지 않은 바 없어 조정에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물었다.
효우하고 화목함은 지극한 성품에서 우러나 일찍부터 백씨 참의공으로부터 정훈(庭訓)을 받아 집안에서 항상 사우(師友)의 예로 강마(講劘)하니, 온 가정이 항상 화기에 차 있었다. 대부인을 섬김에는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며, 비록 환란중이거나 빈한한 처지일지라도 맛있고 연한 음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공은 줄곧 큰 도를 관찰하게 되고, 참의공도 큰 고을을 맡게 되어서는 번갈아 대부인을 가마에 모시니, 대부인은 화려함과 오락의 영화를 다 누리게 되었으나 매양 생일 잔치에는 여러 풍악을 중지하게 하고 「감군은(感君恩)」을 연주케 하니, 공이 가사를 더하여 속곡을 만들어 바쳤다. 또 조정의 사대부들과 수친계(壽親契)를 만들어 철따라 잔을 올리고 그 장수함을 비니, 선조께서는 주악을 내리어 이를 더욱 영예롭게 하였다. 또 공이 대부인을 뵙고자 집으로 내려 갈 때는 왕께서 반드시 약물을 내리었다.
공은 매양 중씨(仲氏)가 일찍 죽고 자매들이 많이 세상을 뜬 것을 슬퍼하여 모든 어린 조카들을 자기의 자식보다 더 사랑하였으며, 참의공과는 반생을 같이 살면서 형제간의 화락이 늙도록 한결 같았다. 언약을 중히 여기며 베풀기를 좋아하여 친척과 친구들 중 궁핍한 사람들은 모두 도움을 받았다. 동종회(同宗會)를 만들어서 소목(昭穆)의 예를 밝히고, 청주에 태위(太尉)의 옛 터가 있었는데, 백씨가 이 고을을 맡아 볼 때 의논하여 단을 쌓고 제사지내고 비석을 세워 기록하고는, 묘소 아래 재실을 만들고 편액을 걸어 ‘귀래(歸來)’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께서 평소에 품은 뜻이기도 하였다.
글은 평탄하게 풀어썼으나 풍부하고 화창하였으며, 사치스럽고 허황함을 싫어하였다. 시도 굳세면서 방일한 운치가 있었으나, 자랑과 자부를 싫어하였기에 수록함이 많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아! 공은 문장과 행의로 선조에게 대우를 받았고, 일시의 경제에 중망을 짊어져 들어가면 경연에서 논사를 맡았고, 나와서는 힘써 사방의 풍속을 교화하니, 그 실적은 참으로 빛나도다. 이로써 공의 업적을 가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누차 화망을 만났으나 슬퍼하지 않았고, 유배지에서 기용되어 장단(將壇)에 올랐으나 영예로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졸연히 행운을 당하여도 본래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고, 문득 거두어 들여도 미리 알았던 것처럼 조용하였으니, 진퇴 영욕에 공의 깊이를 엿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아니한가? 몸은 궁부(宮府)의 도원수요, 지위는 백료의 위에 있었으나 집은 한 칸도 넓히지 않았으며 노비는 한명도 늘리지 않았고, 공검하는 절조가 만년에는 더 독실하였으니, 이 또한 공에게는 자잘한 행실이라 하겠다. 부귀의 밖에서 초연하여 입을 다물고 시사를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사류(士類)를 부식(扶植)하여 간사한 행위를 막아 군자로는 믿을 데가 있게 하였고, 소인으로는 감히 사욕을 부리지 못하게 하여 국가에 화평한 복을 누리게 하였다. 이로 볼 때 공의 그릇이 크다고 할 수 있지 아니한가? 나는 공과 더불어 글 짓고, 술 마시며 서로 교유한 지 40여 년이 되었지만, 한 번도 화내는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며, 한 번도 해치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공은 참으로 장자(長者)이다.
장례의 다음해에 공의 아들 남양공(南陽公)이 대사간 정백창이가 쓴 공의 행장을 들고 울면서, 나를 찾아와 하는 말이 “선공께서는 공을 중히 여겨 대부인의 지석(誌石)도 공에게 명하여 쓰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겨우 돌을 다듬어 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선공의 뜻이 오니, 원컨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삼, 사차를 왕래하면서 부득부득 청하기에 삼가 정공이 쓴 공의 행장과 족보에서, 초년에 기초가 되었던 일, 중년에 융성하게 된 까닭, 만년에 베풀었던 일들을 이 같이 간추려 보았는데, 공의 덕업이 선영을 빛냄이 또한 이와 같았다. 명은 다음과 같다.
구원하도다! 빛나는 자손,
태위가 가문을 열어
공적이 대대로 쌓이니, 그 덕업이 펼치도다.
오직 덕과 벼슬로
대대로 그 아름다움 이어왔으나
공에 이르러 더욱 창대하였네.
공의 재질은 하늘이 내렸으니,
장차 크게 쓰려함이로다.
포의 때부터
공보(公輔)로 기약하였으니,
주졸(走卒)도 다 아는 일이로다.
바다가 포용하듯
봄날이 화창하듯
봉 같은 의표로다.
이미 전덕(全德)을 주었으니,
항상 중망(重望)을 지니고
복록이 따랐도다.
선조를 도와
조정에 상서가 되어
큰 계책을 윤색하였고,
집안에는 경조가 되어,
임사를 낳아
무궁한 복을 열었네.
오직 예에 따르고
재질을 아끼었으니,
선을 좋아하는 정성이요,
경제의 솜씨,
잠깐 베풀고, 이내 막히니
십년이나 정고(貞固)를 지켰도다.
일월은 다시 밝아지니,
바람과 우레가 요란해도
공은 산처럼 우뚝하였네.
원수 자리 놓고 조정에 돌아오니,
장수인가 재상인가
만인이 환시(環視)하였네.
공은 더욱 겸손하여
권세 피하길, 모독당하듯 하니
맑고 한미한 선비로 자처하였다.
가정에서 나라로
중전의 교화가 크게 행하니,
「관저(關睢)」와 「인지(麟趾)」로다.
공의 사업은
어찌 선덕만 빛냈으리,
혜택이 백성에게 있었도다.
공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나는 돌에 시를 새기니,
공의 정신이나 없어지지 않도록 하려 함이로다!
숭정 2년 기사년(1629) 일 월 일 세움.
서평부원군 문익(文翼) 한공(韓公)의 장지는 본래 원주에 있었는데, 그 후에 자손이 영락하니, 지사(地師)가 그 땅이 불리하다 하여 공의 사자(嗣子) 좌윤공 회일(會一)이 숭정 병자(1636년) 오월 17일에 안산 대월리(大月里) 간좌(艮坐, 동북을 등짐)의 언덕에 천장하였다. 그 신도비는 바로 좌의정 이정구(李廷龜) 공이 지은 것으로 당시에는 성상께서 봉림대군으로 아직 저위(儲位)에 나가지 못하였을 때이니, 어휘(御諱)가 현각(顯刻)에 들어 있게 되었다. 그 후 보위에 오르셨으나 구각(舊刻)을 고칠 수는 없는 일이니, 일월과 더불어 항상 선명할 것이다. 어찌 한씨의 가문에만 빛이 날 일이겠는가? 비석을 원주에서 안산으로 옮긴 지도 벌써 17년이 되었고, 좌윤공이 몰하니, 세월만 보내고 세우지를 못하였다. 임진년(1652년) 봄에 성상께서 내수사에 특명을 내려 내탕고 재물을 풀어 공도(工徒)를 모집하여 묘도의 남쪽에 중건하니, 이수 귀부로 새로운 언덕에 높다랗게 세웠다. 신명이 보호하고 길손도 공경하니, 가히 보기 드문 성사이다. 처음 인조대왕은 안산의 길지를 주어 공의 묘소를 옮기게 하여 천만대 굳건할 수 있게 하였으며, 금상께서는 비석을 세워 천만대 허물어지지 않도록 꾀하였다. 두 분 성상께서 한씨를 도와 크게 베풂이 전후에 망극하니 이 사실은 천지로 더불어 장구히 전해질 것이다. 아름다운 일이다. 공의 대가 끊기니, 종증손 두상(斗相)을 취하여 공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두상은 아들이 있어 성덕의 봉사가 이어지게 되었다. 반드시 보답이 있다는 이치가 어찌 거짓말이 되겠는가? 두상이 일을 마치고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어 나에게 후기를 부탁하니, 선의를 현양하는 데에는 가히 유감이 없다 하겠다.
가선대부 전행홍문관부제학 이민구(李敏求)는 삼가 쓴다.
정헌대부 예조판서 ▨▨▨는 씀.
임진년(1652년) 유월 일에 다시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