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성선생의 유허비[昌寧成先生遺墟碑] ― 전액(篆額)의 글임.
비석이 세워진 뒤 임신년(숙종 18, 1692년)에 이르러 관직(官職)을 회복할 것을 명하였고, 이어서 동쪽으로 옮겨 사당(祠堂)을 세웠으며, 함께 절의(節義)를 지킨 다섯 신하들과 패전(敗戰)하여 죽은 장수(將帥) 및 절의에 죽은 향현(鄕賢) 등 모두 여덟 선생들을 병사(並祠)하였다. 을해년(숙종 21, 1695년)에 제사를 지낸 뒤 마침내 비석을 옮겨 세우고 희생(犧牲)을 바쳤다.
창녕 선생의 유허비[昌寧先生遺墟碑]
선생은 휘(諱)가 삼문(三問)이고 자(字)가 근보(謹甫)인데, 명(明) 나라 영락(永樂) 무술년(태종 18, 1418년)에 홍주(洪州)의 노은동(魯恩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공중에서 ‘태어났느냐?’ 하고 물었는데, 그렇게 묻기를 세 번 하였으므로 ‘삼문(三問)’이라고 이름을 지었다.선생은 정통(正統)
2 을묘년(세종 17, 1435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무오년(세종 20, 1438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정묘년(세종 29, 1447년)에 중시(重試)에서 장원(壯元)을 하였다. 세종(世宗)⋅문종(文宗)⋅노산군(魯山君) 세 임금을 차례로 섬겼는데, 세종의 총애가 아주 특별하였으며 문종은 선생과 ‘포의(布衣)의 교제’를 맺었다. 선생의 벼슬은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경태(景泰) 을해년(세조 1, 1455년)에 세조(世祖)가 선양(禪讓)을 받고 노산군(魯山君)이 별궁(別宮)으로 퇴위(退位)하자, 선생은 부친(父親)인 총관(摠管) 성승(成勝) 공(公), 박팽년(朴彭年) 공, 이개(李塏) 공, 유성원(柳誠源) 공, 하위지(河緯地) 공, 유응부(兪應孚) 공 등 여섯 선생과 함께 모두 그 사건에 죽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세조께서 말하기를 “박팽년⋅성삼문 등은 당세(當世)의 난신(亂臣)이요, 후세(後世)의 충신이다” 하였다. 세조의 말씀은 대개 천리(天理)를 밝힘으로써 사람의 윤리(倫理)를 영원토록 부식(扶植)하려는 뜻이었다.
한강(漢江) 남쪽에 네 개의 무덤이 있는데, 각각 성씨(姓氏)만 적은 작은 비석이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이것이 여섯 선생의 무덤인데, 두 선생의 무덤은 없다’고 한다. 그 가운데 ‘성씨(成氏)’라고 적힌 것이 곧 성 선생의 무덤이다.
또 은진(恩津) 땅에 한 개의 무덤이 있는데 큰 소나무가 그 주위에 자라고 있다. 그 곳의 주민들이 이르기를 ‘선생의 지체(肢體) 하나가 조리돌림을 당하여 이 현(縣)의 치소(治所) 마당에까지 이르렀기에 이곳에 묻었다. 그런데 지금 막 물을 흐르게 하였다’고 한다.
인종(仁宗) 때 연신(筵臣) 가운데 여섯 신하의 일로써 진달(陳達)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때부터 잇따라 그 절개를 포장(襃獎)하기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으므로, 선조(宣祖) 때 박민복(朴閔腹) 선생의 후예가 마침내 녹용(錄用)한다는 은명(恩命)을 입었다. 효종(孝宗) 때 참찬(參贊) 송준길(宋浚吉) 공, 우의정(右議政) 이후원(李厚源) 공 등이 사향(祠享)하기를 청하였고, 금상(今上) 임자년(현종 13, 1672년)에 경중(京中)의 사인(士人) 남택하(南宅夏) 등이 사람들을 통하여 선생의 신주(神主)를 인왕산(仁王山)의 무너진 절벽에서 얻고 이르기를 ‘이는 선생의 부인께서 손수 써서 제사를 받들던 것이다’ 하였다. 선생의 홍주(洪州)에 있는 구택(舊宅)은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부식(腐蝕)되었으므로 민유중(閔維重) 공이 감사(監司)로 있으면서 숭정(崇禎) 무신년(현종 9, 1668년)에 수리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드디어 그 가운데에 봉안(奉安)하였다. 그리고 홍주의 선비들이 관찰사(觀察使) 남이성(南二星) 공, 홍주목사(洪州牧使) 이섬(李暹) 공, 면천군수(沔川郡守) 민균(閔呁) 후(侯), 전 장령(前掌令) 조세환(趙世煥) 공을 권하여 함께 그 동(洞)에 사당을 세우고 또한 비석을 세워서 그 사실들을 새겼다. 그러하니, 공적(公的)으로나 사적(私的)으로나 숭보(崇報)하는 뜻이 차례차례 유감(遺憾)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 연산(連山)의 한양촌(漢陽村)은 선생의 별업(別業)이 있던 유지(遺址)이다. 그 동쪽으로 몇 리(里) 쯤 떨어진 곳에 고총(古冢)이 있으니, 예로부터 그 고을의 사람들이 선생의 조상(祖上)이 묻힌 곳이라고 떠받들었다. 그러나 거기에 딸린 전답과 노비들은 모두 충훈부(忠勳府)에 몰수(沒收)되었으므로, 한 때 간사한 무리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이익을 취하였다. 한편 그곳의 노비들은 옛 상전의 은혜를 잊지 못하고 매년 가을 추수를 마친 뒤에 재래(在來)의 습속(習俗)을 따라 선생을 제향(祭享)하였다. 대개 이 고을은 사계(沙溪) 노선생(老先生)의 3대(代) 이래로 향리(鄕里)에서 울연(蔚然)히 추로(鄒魯)의 습속을 지니게 되었으니, 선생을 사모하는 기풍이 더욱 깊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비석을 그 유지(遺址)에 세웠으니, 이는 세월이 오래되어 그 사적(事蹟)이 인멸(湮滅)될까를 저어했기 때문이다.
아, ‘인(仁)을 이루고 의(義)를 취한다’는 것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위대한 가르침이다. 사계 노선생께서 가르친 바도 이 점이었고, 지금 연산(連山)의 선비들이 이 비석을 세우는 일도 또한 가르침을 받은 바가 있어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성(聖)스러운 조정의 밝은 가르침을 대양(對揚)하기 위한 것이다. 의정(議政) 이후원 공과 참찬(參贊) 송준길 공은 모두 노선생의 문인(門人)이다. 지금 비석 세우는 일을 감독하는 사람들은 홍우주(洪友周)⋅김광로(金光老)⋅김만준(金萬埈)이며, 선생의 사실에 관한 전말(顚末)은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공이 『노릉지(魯陵志)』에 자세히 갖추어 썼으니 여기에서는 군더더기 말을 하지 않는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46년 계축년(癸丑年,1673,顯宗14) 4월 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영경연 세자부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兼領經筵 世子傅 監春秋館事) 송시열(宋時烈)이 비문(碑文)을 지음.
통훈대부 행이인도찰방(通訓大夫 行利仁道察訪) 김비(金棐)가 비문을 쓰고,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資憲大夫 兵曹判書 兼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同知經筵事) 김만기(金萬基)가 전액(篆額)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