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김종직신도비(金宗直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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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김종직(1431∼1492)은 사림파를 열었던 학자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瓊)·계온(季昷)이며,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아버지는 사예 숙자(叔滋)이다. 1498년(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이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과 관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비문의 찬자 홍귀달(1438∼1504년)은 본관이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함허정(涵虛亭) 또는 허백당(虛白堂)이다. 함창(咸昌)에서 살았으며 이조판서와 참찬을 지냈다. 연산군 생모 폐비시에는 반대하여 투옥되기도 했었다. 연산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10여 조목을 아뢰었는데 모두 궁중의 비밀을 들어 개유(開諭)하였다. 연산군 10년에는 손녀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어겨 교살되었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저서는 『허백당문집(虛白堂文集)』 이 있다. 김종직 도비는 부북면 제대리 한골 마을입구의 들 가운데에 있다. 처음 신도비는 1494년 그의 부제(婦弟)이며 문도인 조위(曺偉)의 주관으로 대제학 홍귀달의 비명을 지어 받아 대동리에 창건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신도비가 파괴되어 방치되다가 1635년 부사 이유달(李惟達)이 사림들과 협의하여 개건 중수하였다. 이때 원래의 비 아래에다 중건에 따른 장현광(張顯光)의 지문(誌文)을 음기(陰記)하였고, 창원부사 오여발(吳汝撥)이 비문을 썼으며, 호조판서 김세렴(金世濂)이 전자(篆字)를 썼다. 비문은 1,500여자에 이른다. 귀부(龜趺)와 이수를 갖춘 비석으로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점필재의 묘소는 처음 상남면 무량원에 있었는데,1498년의 무오사화 때 삭탈, 부관참시되었으며, 1509년 복관·복시(復諡)와 함께 부북면 대동 옛집 뒷산에 이장하였다. 1709년 7세손 김시락(金是洛)의 청원으로 영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문간(文簡)의 시호를 성종이 내린 문충(文忠)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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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효경
유명 조선국(有明朝鮮國)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 겸 지경연사 홍문관제학(刑曹判書兼知經筵事弘文館提學) 증시(贈諡) 문간공(文簡公) 점필재 김선생 신도비명 병서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知中樞府事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홍귀달(洪貴達)은 짓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창원대도호부사 김해진관병마첨절제사(昌原大都護府使金海鎭管兵馬僉節制使) 오여발(吳汝撥)은 쓰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사간원사간 겸 춘추관편수관 지제교(司諫院司諫兼春秋館編修官知製敎) 김세렴(金世濂)은 전액(篆額)을 하다.
덕행(德行), 문장(文章), 정사(政事)는 공문(孔門)의 고제(高弟)로서도 겸한 이가 있지 않았으니, 더구나 그 밖의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재주가 우수한 사람은 행실에 결점이 있고, 성품이 소박한 사람은 다스림이 졸렬한 것이 바로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우리 문간공(文簡公) 같은 이는 그렇지 않다. 행실은 남의 표본이 되고 학문은 남의 스승이 되었으며, 생존시에는 상(上)이 후히 대우하였고 작고한 뒤에는 뭇 사람들이 슬퍼하며 사모하였으니, 어쩌면 공의 한 몸이 경중(輕重)에 그토록 관계될 수 있었단 말인가.
공의 휘는 종직(宗直)이고 자는 계온(季昷)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매우 고상하여 총각 때부터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고 날마다 수만 언(數萬言)씩을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약관(弱冠) 이전에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경태(景泰) 계유년 방(榜)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천순(天順) 기묘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 정자(承文正字)에 선보(選補)되었다. 이 때 어공 세겸(魚公世謙)은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본원(本院)의 선진(先進)이 되어 공의 시를 보고는 감탄하여 말하기를, “나에게 채찍을 잡고 노예 노릇을 하게 하더라도 의당 달게 받겠다.”고 하였다.
본원의 검교(檢校)에 승진되었다가 감찰(監察)에 전임되었는데, 마침 입대(入對)했다가 상의 뜻에 거슬리어 파면되었다. 다시 기용되어 영남 병마평사(嶺南兵馬評事)가 되었다가 들어가서 교리(校理)가 되었다. 상이 즉위한 처음에 경연(經筵)을 열고 문학(文學)하는 선비들을 특별히 선발했는데, 선발된 사람 십수인(十數人) 가운데서 공이 가장 뛰어났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나갔는데,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는 학문을 진흥시켜 인재를 양성하고, 백성을 편케 하고 민중과 화합하는 것을 힘썼으므로, 정사(政事)의 성적이 제일(第一)이었다. 그리하여 상이 이르기를, “종직은 고을을 잘 다스려 명성이 있으니, 승천(陞遷)시키라.” 하고, 마침내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에 임명하였다. 이 해에 마침 중시(重試)가 있었는데, 모두 공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중시는 문사(文士)가 속히 진취하는 계제가 된다.”고 하였으나, 끝내 응시하지 않으니, 물론(物論)이 고상하게 여겼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선산 부사(善山府使)가 되었다가, 모친이 작고하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례(喪禮)를 일체 주 문공(朱文公)의 예대로 준행하고, 너무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진 것이 예에 지나쳤으므로, 사람들이 그 성효(誠孝)에 감복하였다. 복(服)을 마치고는 금산(金山)에 서당(書堂)을 짓고 그 곁에는 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어놓고서 그 당(堂)의 편액(扁額)을 경렴(景濂)이라 써서 걸었으니, 대체로 무극옹(無極翁)을 사모하는 뜻에서였다. 그리고는 날마다 그 안에서 읊조리며 세상일에 뜻이 없었다.
그러다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부름을 받고는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마지못하여 일어나 부임하였다.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서는 말은 간략하면서도 뜻이 통창하였고, 강독(講讀)을 가장 잘했기 때문에 은총이 공에게 치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뛰어 올려 임명되었다. 이어 도승지(都承旨) 자리에 결원이 생기어 특명으로 공에게 도승지를 제수하자, 공이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경(卿::TEXT)의 문장(文章)과 정사(政事)가 충분히 감당할 만하니, 사양하지 말라.”하였다. 이윽고 이조 참판(吏曹參判)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전임되어서는 금대(金帶) 하나를 특별히 하사하였으니, 특별한 대우가 이러하였다.
뒤에 호남(湖南)을 관찰(觀察)할 적에는 성색(聲色)을 동요하지 않고도 일로(一路)가 숙연해졌다. 다시 들어와서 한성 윤(漢城尹),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초탁되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겸하였다.
홍치(弘治) 기유년 가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지중추(知中樞)에 옮겨 제수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가기 위하여 하루는 동래(東萊)의 온정(溫井)에 가서 목욕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은 그대로 밀양(密陽)의 전장(田庄)으로 가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상이 특별히 전직(前職)을 체직하지 말도록 허락하였다. 그러자 혹자가 녹봉을 받기를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세 번이나 사양하였지만, 윤허하지 않고 심지어 두 차례나 친히 비답(批答)을 지어 내리기까지 하였는데, 그 비답에는 “마음이 바르고 성실하여 거짓이 없고, 학문에 연원이 있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그리고 공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듣고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쌀 70석을 보내주게 하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약을 하사하였다.
임자년 8월 19일에 작고하니, 향년이 62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2일 동안 철조(掇朝)하였고,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의정하였다. 공의 고(考) 숙자(叔滋)는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조(祖)인 성균 진사(成均進士) 관(琯)과 증조(曾祖)인 사재령(司宰令) 은유(恩宥)에게도 모두 봉작(封爵)이 추증되었다.
공은 울진 현령(蔚珍縣令) 조계문(曺繼門)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곤(緄)은 해평인(海平人) 홍문 수찬(弘文修撰) 김맹성(金孟性)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죽었고, 그 다음은 모두 요절하였으며, 큰딸은 생원(生員) 유세미(柳世湄)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생원 이핵(李翮)에게 시집갔다. 뒤에는 남평인(南平人) 첨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숭년(嵩年)이고, 딸은 직장(直長) 신용계(申用啓)에게 시집갔으나 후사가 없다.
공은 평소 집에 있을 적에는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앉아 있었는데, 아무리 처자(妻子)의 사이라 하더라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또 소싯적에는 사예공(司藝公)이 병들어 수척해지자 공이 이를 매우 걱정하여 유천부(籲天賦)를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부인(大夫人)이 생존할 당시에는 공이 항상 조정에 편히 있지 못하고 외직을 요청하여 세 번이나 지방관으로 나가서 대부인을 봉양하였다. 공의 백씨(伯氏)가 악창을 앓을 적에는, 의원이 지렁이의 즙이 좋다고 말하자, 공이 그 지렁이의 즙을 먼저 맛보고 백씨에게 먹였는데, 과연 효험이 있었다. 뒤에 백씨가 서울에서 객사(客死)했을 적에는 공이 널을 받들어서 고향에 반장(返葬)하였고, 백씨의 아이를 마치 자기 자식처럼 어루만져 돌보고 가르쳐서 성립(成立)하게 하였으니, 그 타고난 효우(孝友)의 지극하기가 이러하였다.
그리고 관직에 거하여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간략함을 따르고 번거로움을 막았으며, 정(靜)을 주로 삼고 동(動)을 제재하였으므로, 있는 곳마다 형적을 드러내지 않고도 일이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평상시에는 사람을 접대하는 데 있어 온통 화기(和氣)뿐이었으나, 의리가 아닌 것이면 일개(一介)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오직 경사(經史)를 탐독하여 늘그막에 이르러서도 게으를 줄을 몰랐으므로, 얻은 것이 호박(浩博)하였다. 그리하여 사방의 학자들이 각각 그 그릇의 크고 작음에 따라 마음에 만족하게 얻어 돌아갔는데, 한번 공의 품제(品題)를 거치면 문득 훌륭한 선비가 되어서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가 태반이나 되었다. 지금 호조 참판(戶曹參判)인 조공 위(曺公偉)는 공의 처남이고,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강공 백진(康公伯珍)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강공 중진(康公仲珍)은 공의 생질들이니, 어쩌면 공의 문에 명사들이 이렇게 모였단 말인가. 세상에서 이 때문에 더욱 기이하게 여긴다.
공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 『동문수(東文粹)』, 『여지승람(輿地勝覽)』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공이 작고한 뒤에는 공이 저술한 시문(詩文)이 더욱 귀중하게 여겨져서 문도(門徒)들이 본집(本集)과 『이준록(彝尊錄)』을 편집해 놓았는데, 상이 대궐로 들여오도록 명하여 조석 사이에 간행하기를 명할 것이다. 내가 평생에 공과 가장 서로 의분(義分)이 있는 사이라 하여, 조태허(曺太虛)가 나에게 글을 지어서 비석에 새기게 해주기를 요청하니, 내 글이 졸렬하다고 해서 사양할 수가 없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오산(烏山)은 하도 높고
낙수(洛水)는 도도히 흘러서
빼어난 기운이 여기에 모였네
일월(日月)의 밝은 빛이 쌓이고
규벽(奎壁)의 정기가 여기에 잠겨
문인이 이에 태어났도다
옛 서적을 널리 읽어 알았고
시문(詩文)은 기이하고 고아하여
나이 삼십에 명성을 발휘하였네
당(堂)에 올라 의심난 뜻 강의하니
문하에 와서 기이한 것을 물어와
후학들의 시귀(蓍龜)가 되었도다
부모에게는 효도를 하고
형제에게는 우애를 하니
가정이 모두 화락하였네
백성을 인자함으로 다스리니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사모하여
향리(鄕里)에 사당(祠堂)이 세워졌도다
경악(經幄)에서 담론(談論)하고 사려(思慮)하며
주상과 직접 면대하여서는
큰 은총을 혼자 받았네
높은 반열 높은 자급을
계단 따라 오르듯이 하여
인망(人望)이 진실로 화합했는데
하늘이 왜 그리 속히 빼앗는고
백성이 실로 복이 없음이라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걱정을 품는도다
공은 만류할 수가 없으나
좋은 명성은 천추에 전할 게고
유고(遺稿)는 한우(汗牛) 충동(充棟)에 이르리라
공은 명성과 실상이 많은지라
이것이 묻히게 둘 수 없어
내가 이제 붓 잡아 기록하노라
이상의 서(序)를 갖춘 명(銘)은 홍상공 귀달(洪相公貴達)이 지은 것인데, 선생(先生)의 사업(事業)과 문장(文章)이 그 대개(大槪)가 모두 그 가운데 기재되었으니, 어찌 후인의 문자(文字)로 군더더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본부(本府) 사람들이 선생의 덕업(德業)을 사모하여 옛 여리(閭里) 앞에 비문을 새겨 세웠었는데, 임진년의 병란(兵亂)에 보전되지 못했으므로, 난리가 평정된 뒤에는 향인(鄕人)들이 모두 중건(重建)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틈을 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부백(府伯)인 이사문 유달(李斯文惟達)이 부유(府儒)들이 일제히 간청함에 따라 구문(舊文)을 가져다 새겨서 옛 길에 세웠는데, 본부 사람들이 인하여 그 수말(首末)을 진술해서 명(銘) 밑에 아울러 기록하려고 하므로, 이것을 써서 주는 바이다.
아, 선생이 작고한 뒤에 불행하게도 혼조(昏朝)가 정사를 어지럽히고 권간(權奸)이 화(禍)를 선동함으로써 그 참혹함이 화가 천양(泉壤)에까지 미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나 선생의 도야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삼가 듣건대 당시에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명인 준사(名人俊士)가 십수(十數)에만 그치지 않았고, 한훤(寒暄)과 일두(一蠹) 양현(兩賢)도 모두 선생이 권장 계발시킨 바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본부 사람들이 선생을 끝없이 사모하고 존상해 오다가, 난리를 겪은 뒤에 마침 어진 부사(府使)가 부임해 옴을 만나서 그 숙원(宿願)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또 좋은 땅에 묘원(廟院)을 옮겨 세워서 스승으로 받들어 높이는 곳으로 삼으려 하고 있으니, 대체로 또한 사문(斯文)의 현통한 운수를 만난 것이다. 그러니 끝내 본부에서 배출되는 인재가 또한 옛날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유(諸儒)보다 못하지 않을 것을 기필하겠다.
숭정(崇禎) 7년 9월 일에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 옥산후인(玉山後人) 장현광(張顯光)은 삼가 기록한다.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지 경연사 홍문관제학(資憲大夫 刑曹判書 兼 知 經筵事 弘文館提學) 증시 문간공(贈諡 文簡公) 점필재김선생신도비명(佔畢齋金先生神道碑銘) 병서(幷序)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 춘추관 성균관사(知中樞府事 兼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 春秋館 成均館事) 홍귀달(洪貴達)이 글을 짓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창원대도호부사 김해진관병마첨절제사(昌原大都護府使 金海鎭管兵馬僉節制使) 오여발(吳汝撥)이 글을 쓰고,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간원 사간 겸 춘추관 편수관 지제(行司諫院 司諫 兼 春秋館 編修官 知製) 김세렴(金世濂)이 전액(篆額)한다.
덕행과 문장, 정사(政事)는 공자(孔子) 문하의 훌륭한 제자들 이후로는 나란히 할 사람이 없다. 하물며 그 외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랴?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행실에 결함이 있고 행실이 훌륭한 사람은 다스림이 서투르니, 항상 이러한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 문간공(文簡公)같은 분은 그렇지 않아서 행실은 남의 모범이 되고 학문은 남의 스승이 되어 살아서는 임금께서 특별하게 대우하시고 돌아가신 뒤에는 뭇 사람들이 슬피 사모하였으니 공(公)이 한 몸이 얼마나 국가의 경중(輕重 : 국가의 대소사, 모든 일)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인가?
공의 휘(諱)는 종직(宗直)이고 자(字)는 계온(季昷)이며 선산(善山)사람이니 호(號)는 점필재(佔畢齋)이다. 타고난 천품이 매우 고상하고 젊어서부터 시(詩)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날마다 수만 마디의 말을 기억하여 약관이 되기도 전에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이 크게 떨쳤다. 경태(景泰) 계유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천순(天順) 기묘년(1459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 이때 어세겸(魚世謙)공이 시명(詩名)이 있어서 승문원에 선배가 되어 있었는데 공(公)의 시를 보고 탄식하며 “ 나보고 말채찍을 잡고 하인이 되라 해도 달게 받아 들이겠다.”라고 하였다.
승문원 교검(校檢)에 승진하고 감찰(監察)로 옮겼는데 마침 임금을 뵐 때 뜻을 거스른 일이 있어서 파직되었다가 영남병마평사(嶺南兵馬評事)로 기용되었고, 들어와서 교리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즉위하신 초기에 경연(經筵)을 열고 특별히 문학에 뛰어난 선비를 선발하니 선발된 자가 십여 명인데 공이 으뜸이었다. 얼마 안 되어 함양(咸陽)군수로 나갔는데 그 다스림에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며,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민중을 화합하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정사의 성적이 제일이었다. 임금이 말씀하기를 “종직은 군(郡)을 잘 다스려서 명성이 있으니 좋은 자리로 옮기도록 하라. ”고 하시고 승문원 참교(參校)에 임명하였다.
이해에 마침 중시(重試 : 관리를 대상으로 하는 시험)가 있었는데 모두들 권하면서 “중시는 문관이 빨리 승진할 수 있는 계기이다.”라고 하였으나 끝내 응시하지 않았으니 여론이 고상하게 생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산부사(善山府使)가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를 삼년 동안 하고 상례(喪禮)는 하나같이 주문공(朱文公)을 따랐는데 슬퍼하여 건강을 해친 것이 예에 지나치니 사람들이 진정어린 효심에 감복하였다. 복이 끝나자 금산(金山)에 서당을 지은 다음 옆에 못을 파서 연(蓮)을 심고 집의 이름을 경렴(景濂)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무극옹(無極翁 : 송나라의 학자 주돈이)을 사모했기 때문이었다. 날마다 그 안에서 시를 읊으며 세상일에는 뜻이 없었다.
홍문관 응교(應敎)로 부름을 받고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벼슬에 나섰다. 경연에 입시하여는 말씀이 간략하면서도 뜻이 잘 통하여 강독(講讀)을 가장 잘 하였으므로 임금의 총애와 관심이 지극하였다. 좌부승지에 발탁되고 도승지의 자리가 비자 특별히 공을 임명하였는데 공이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니 임금께서 하교하시기를 “경의 문장과 정사가 충분히 감당할 만 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하셨다. 곧 이조참판과 동지경연사로 옮겼는데 특별히 금대(金帶) 하나를 하사하셨으니 각별하게 대우하시는 것이 이러한 것들이었다.
뒤에 호남관찰사가 되어 침착하게 성색(聲色 : 목소리와 얼굴빛)을 동요하지 않으니 한 지방이 안정이 되었다. 내직으로 들어와 한성판윤, 공조참판, 형조판서겸 홍문관 제학에 각각 임명되었다.
홍치(弘治) 기유년 가을에 병으로 사직하고 옮기어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돌아가고자 하여 하루는 동래(東萊)의 온천에서 목욕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허락을 하셨다. [선생은] 밀양(密陽)의 시골집에서 누워 있었는데 임금께서 특별히 전직(前職)을 바꾸지 말도록 허락하시고 혹은 녹봉을 받을 것을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세 번이나 사양했는데도 [임금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친히 답글을 지어 내려 주신 것이 두 번이었는데 ‘ 정직하고 성실하며 거짓이 없고 학문의 연원(淵源)이다. ’ 는 등의 말씀이 있었다. 그 가난하다는 것을 들으시고는 본도(本道 : 경상도)에 명령하여 쌀 70석을 하사하시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약을 하사하셨다.
임자년(1492년) 팔월 십구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2세이다. 부음이 보고 되자 조회를 이틀간 정지하고 태상시(太常寺)에서는 시호를 의논하여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
공(公)의 부친 숙자(叔滋)는 성균관 사예(司藝)를 지내고 호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조부는 성균 진사 관(琯)이고 증조부는 사재령(司宰令) 은유(恩宥)인데 모두 작위를 증직 받았다.
공은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따님을 맞이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곤(緄)인데 해평인(海平人) 홍문관 수찬(修撰) 김맹성(金孟性)의 딸에게 장가갔으나 일찍 죽었고 그 다음도 모두 일찍 죽었다. 장녀는 생원 유세미(柳世湄)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생원 이핵(李翮)에게 출가하였다. 후에 남평인(南平人) 첨정 문극정(文克貞)의 따님을 맞이하여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숭년(嵩年)이고 딸은 직장 신용계(申用啓)에게 출가하였으나 후사가 없다.
공(公)은 평소 집에 거처할 때에는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는 의관을 바로 하여 단정히 앉아서 비록 부인이나 자식들에게도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려서 사예공(司藝公 : 부친)이 병이 들어 수척해지자 공은 근심하고 슬퍼하여 유천부(籲天賦 : 하늘에 호소하는 글)를 지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에 공은 조정에 있는 것이 편안하지 않아서 항상 외직(外職)을 청하여 세 번 외직에 나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큰 형님이 종기가 났는데 의원이 지렁이 즙이 좋다고 하자 공이 먼저 맛을 보고 드렸더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 후에 큰 형님이 서울에서 객사(客死)하시자 공이 관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를 치렀다. 그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정성으로 돌보아 가르치고 인도하여 성장시켰으니 그 효성과 우애의 타고난 성품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다.
직무를 맡아 백성들을 다스림에는 간편하게 하여 번거로운 일을 제어하였고 고요함을 주장하여 움직임을 제어하였으니 이르는 곳마다 형적을 드러내지 않아도 사리에 따라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평소에 남을 대하고 교제할 때에는 소탈하여 온화한 기상이 있었으며 의로운 곳이 아니라면 하찮은 것이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오직 경전(經傳)과 사서(史書)에만 빠져서 늙어서까지 소홀히 하거나 게으르지 않으니 지식을 얻은 것이 넓고도 많아서 사방의 학자들이 그 기량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만족하게 소득을 얻어 돌아가고 한번 품제(品題 : 시문이나 서화의 품평)를 거치면 곧 훌륭한 선비가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난 사람이 태반이다.
지금 호조참판 조위(曺偉)는 공의 부인의 동생이고 의정부 사인(舍人) 강백진(康伯珍)과 홍문관 수찬 강중진(康仲珍)은 공의 생질이니 공의 집안에 명망 있는 사람이 얼마나 모였는가? 세상에서 이 때문에 더욱 기이하게 여긴다. 공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 동문수(東文粹), 여지승람(輿地勝覽)이 세상에 전해지는데 공이 이미 돌아가셨기에 공이 저술한 시문은 더욱 귀하다. 문하의 제자들이 본집(本集)과 이존록(彛尊錄)을 편찬하니 임금께서 들여오도록 명하시고 아침저녁으로 속히 간행할 것을 명령하셨다.
내가 평생에 공(公)과 가장 의리와 정분이 있었다고 하여 조태허(曺太虛 : 조위의 字)가 글을 청해 돌에 새기려 하니 문장이 졸렬하다고 사양할 수 없다.
명(銘)하노니
금오산(金烏山)는 높고도 높으며 낙동강은 넘실거리니
아름다운 기운이 여기에 모였구나.
해와 달의 밝은 빛이 쌓이고 규성(奎星)과 벽성(壁星)의 정기가 이곳에 잠기어
이에 문인이 태어났구나.
옛날의 서적에 널리 정통하고 시문(詩文)은 기이하고 예스러워
30세에 명성을 드날렸네.
당(堂)에 올라가 의심나는 것을 강론하니 문하에 와서 기이한 것을 묻는구나.
학들의 본보기가 되었네.
부모에게는 효도를 하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으니
가정이 모두 화락하였네.
백성을 인자함으로 다스리니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사모하여
고을에 사당이 세워졌도다.
연에서 국정을 의논하고 계획하며 임금과 직접 면대하여
큰 은총을 혼자 받았네.
높은 반열 높은 직급을 계단 따라 오르듯 하니
사람들의 바람에 진실로 부합하였네.
하늘은 왜 그리 빨리 빼앗아 가는가? 백성은 진실로 복이 없으며
대궐에서는 슬픔을 품었구나.
공을 붙잡아 둘 수는 없으나 훌륭한 명성은 오래도록 전할 것이며
남긴 저술도 방대하구나.
공은 명망과 실제의 공적이 많으니 이것을 묻히게 둘 수 없어
내가 이제 붓 잡아 기록하노라.
(뒷면)
이상의 서(序)를 갖춘 명(銘)은 정승 홍귀달(洪貴達)이 찬한 것인데, 선생(先生)의 사업(事業)과 문장(文章)의 그 대략이 모두 그 가운데 기재되었으니, 어찌 뒷사람의 글로 쓸데없이 더럽힐 수 있겠는가? 본부(本府) 사람들이 그 덕과 업적(業績)을 사모하여 옛 마을 앞에 비문을 새겨 세웠었는데, 임진년의 난리에 보전되지 못하였으므로 난리가 평정된 뒤에는 고을사람들이 모두 다시 세울 것을 생각하였으나 틈을 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부백(府伯 : 밀양부사) 이유달(李惟達)이 본부의 유학자들이 일제히 간청함에 따라 옛글을 가져다 새겨서 옛 길에 세웠는데, 본부의 사람들이 이에 그 수말(首末 : 일의 경과)을 진술하여 명(銘) 밑에 함께 기록하고자 하므로, 이것을 써서 주는 바이다.
아! 선생이 작고한 뒤에 불행하게도 어지러운 조정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권간(權奸)이 화(禍)를 선동함으로써 그 참혹함은 화가 천양(泉壤 : 지하, 묘소)에까지 미치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지만 선생의 도야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삼가 듣건대 당시에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명인 준사(名人俊士)가 십여 명에만 그치지 않았고, 한훤(寒暄), 일두(一蠹) 두 현인(賢人)도 모두 선생이 권장하여 계발시킨 바라고 한다.
지금 본부 사람들이 선생을 존경하고 숭상함이 끝이 없다가 난리를 겪은 뒤에 마침 어진 부사(府使)가 부임해 오니 마침내 그 숙원(宿願)을 이루게 되었고, 또 좋은 땅을 골라 묘원(廟院)을 옮겨 세워서 스승으로 받들어 높이는 곳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이는 또한 사문(斯文 : 유학)의 운수가 형통한 것이니 필경은 본부에서 배출되는 인재가 또한 옛날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여러 유학자보다 못하지 않을 것임이 틀림없다.
숭정(崇禎) 7년(인조 12, 1634년) 9월 일에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옥산 후인(玉山後人) 장현광(張顯光)이 기록한다.
숭정 8년 정월 일에 세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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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2005
「점필재와 그 문인들의 한시에 대하여」, 2005, 『점필재 김종직의 문학과 사상』, 밀양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