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유허비(鄭夢周遺墟碑)
- 시대
- 조선
- 연대
- 1530년(중종 25)
- 유형
- 비
- 재질
- 돌
- 크기
- 미상
- 소재지
- 북한
- 출토지
- 재북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각자/서자
- 미상 / 미상 / 미상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이 비는 1530년(중종 25)에 경기도 개성군 영남면 용흥리에 건립된 정몽주(鄭夢周)의 유허비(遺墟碑)이다. 결문으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판독 가능한 부분은 “고려충신정몽주지려(高麗忠臣鄭夢周之閭) (缺) 가정 경신 8월 일(嘉靖 庚寅 八月 日)”이다. 즉 “고려 충신 정몽주의 마을…(결) 가정 경신년(1530) 8월 일”이다. 정몽주(1337∼1392)는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였고, 다음해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된 고려의 대표적인 충신이다. 유허비는 옛 인물들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길이 남기고 이를 계기로 하여 당사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므로 이 곳은 정몽주가 살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판독문/해석문
| 판독문 | 진성규 | ||
| 해석문 | 진성규 |
- 담당부서 : 미술문화유산연구실
- 문의 : 042-860-91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