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조선좌리공신행판중추부사연성부원군 증시문강이공석형지묘
증정경부인연일정씨지묘
부좌(祔左)함
공의 휘(諱)는 석형(石亭)이고 자는 백옥(伯玉)이고 호는 저헌(樗軒)이며 연안인(延安人)이다.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모두 당(唐)나라 중랑장(中郞將) 무(茂)를 시조(始祖)로 받든다. 부친의 휘는 회림(懷林)으로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박씨(朴氏)로 을미년(乙未) 10월에 공을 낳았다. 공이 10세가 되었을 때 박부인이 졸하였다. 14세 때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급제하였고, 26세에 진사(進士), 생원(生員), 문과의 초시(初試)에 장원급제하였고, 이듬해에도 또 삼장(三場)
2에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신미년(辛未)에 부친 의정공(議政公)의 상(喪)을 당하였고, 경인년(庚寅)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올랐다. 신묘년(辛卯)에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의 호(號)를 받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정유년(丁酉) 2월 초 팔일에 졸하였으니 4월에 용인(龍仁) 동쪽의 문수산(文秀山) 포은(圃隱) 선생의 무덤 왼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 부인 정씨(鄭氏)는 포은 선생의 손자 감찰(監察) 보(保)의 따님이니, 공보다 먼저 졸하여 이곳에 장사 지냈는데, 이에 이르러 무덤을 같이 하였다. 아! 공은 세종의 문치(文治)시대에 당하여 이미 팔문장(八文章)
3으로 일컬어지고, 대·소과(大小科) 삼장(三塲)에서 모두 많은 선비들 가운데에 으뜸이었다. 소귀를 잡음에[牛耳之執]
4또한 홀로 추대받았으니 그 호건(豪健)하고 웅위(䧺偉)함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차례로 다섯 임금을 섬겨서 많은 내·외직을 거치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지낸 것이 칠년이고, 팔도체찰사(八道體察使)를 지냈으니, 그가 힘껏 일하는 것이 진실로 이미 드러나 있었다. 늦게 또 특히 성균관에서 가르치고 이끌어 주는 것을 겸하여 많은 선비를 인재로 성취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성종 초에 이르러 세상을 잘 다스린 공적으로 공신(功臣)이 되었으니 그 훈업이 성대하다고 이를 수 있다. 학문에 이르러서는 공이 비록 일찍이 스스로 자부하지 않았으나 진서산(眞西山)
5의 『대학연의(大學衍義)』로 번잡한 것은 깎고 요점만을 모아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을 만들어서 군덕(君德)과 치도(治道)에 이익과 보탬이 되게 하였으니 진실로 학문을 쌓아 얻은 바가 없으면 어찌 능히 이와 같겠는가! 녹훈 교서(錄勳敎書)를 살펴보면 ‘성리학을 정밀하게 연구하면 도가 본디 근원이 있다.[精硏性理之學 道本有源]’는 한 구절만 보아도 또한 알 수 있다. 공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여러 어진이로 더불어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었으며, 또 도의(道義)로써 갈고 닦아서 마음이 매우 친밀하였다.
임신년(壬申)과 계유년(癸酉) 사이에는 공이 상(喪)을 당하여 여묘(廬墓)살이를 하였고, 세조(世祖)가 양위를 받자 또 즉시 전라감사(全羅監司)가 되어 나가서 병자년(丙子)의 옥사에 연루됨을 면하게 되었다. 공이 마침 순찰 중에 익산(益山)에 이르러서 육신(六臣)의 죽음을 듣고서는 마침내 시(詩) 한 수를 지어 벽 위에 써 놓고 “병자년 6월 27일에 지었다."라고 썼는데 그 시는
虞時二女竹 우(虞)나라 때 이녀죽(二女竹)
6과
秦日大夫松 진(秦)나라 때 대부송(大夫松)
7이로다
縱有哀榮異 비록 그 슬픔과 영화로움의 차이는 있을망정
寧爲冷熱容 어찌 냉렬한 얼굴을 하리오
라고 하였으니, 애도하는 정을 담고 자신의 뜻을 보인 것이다. 그때 대간(㙜諫)이 국문(鞫問)하기를 아뢰어 청하니 임금이 “시인의 뜻이 있는 곳을 모르니, 어찌 반드시 그렇게 하랴."라고 하여, 일은 드디어 그치고 말았다. 더욱 향모(嚮慕)하여 예우(禮遇)가 각별하였으니, 비록 당시 사람들에 막혀 현달한 관직에 제수되지는 못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높이 승진하였다. 일찍이 내전(內殿)에서 공을 위해 주연(酒宴)을 베풀 때 중전(中殿)이 친히 어의(御衣) 일습(一襲)을 가지고 나와서 공에게 하사하고 궁녀에게 명하여 「삼장원사(三壯元詞)」를 지어 노래하여 주흥(酒興)을 돕게 하였다. 이로부터 공을 불러 주연을 베풀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또 공에게 “500년마다 반드시 세상을 이끌 인재가 나타나는 법인데, 이가 바로 경(卿)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하고, 또 “경은 반드시 명세(命世)의 인재로다."라고 하였다.
공이 시를 지음에 있어 진실로 죽고 사는 것을 마음에 두지는 않았건만, 임금께서 죄를 주지 않으셨고 또 따라서 시종 우대함을 온전히 하셨다. 어찌 육신(六臣)의 여러 대에 걸친 충신의 포장(褒獎)으로 더불어 깃든 의미를 같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근세(近世)에 심공(沈公) 광세(光世)가 지은 『해동악부(海東樂附)』에 병자년에 지은 한 편이 있어서 공의 절의를 서견(徐甄)에 비겨 “고려(高麗) 때 장령(掌令)이 또한 영묘(英廟)때 당년의 아름다운 절의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실로 백대의 공론(公論)이다. 공이 세 번 장원급제를 한 큰 명성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부인과 어린이가 모두 능히 전하여 외우며, 그 높은 훈업(勳業), 심오한 학문, 절의(節義)를 우뚝 세워 또한 세상에서 높여 우러르지 않는 이가 없으니, 연안(延安)의 선비들이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받들 의론이 있다고 한다.
공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의정공(議政公)의 꿈에 흰 용이 큰 돌을 깨고 나왔다. 이미 태어나길 푸른 포(胞)로 몸이 쌓여 있었다. 벗겨놓고 보니 피부가 온통 검었으며 뼈마디가 거칠고 온몸에 털이 나 있으므로 부인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버리려 하였다. 의정공이 기이한 아이로 여겨서 마침내 버리지 않았다. 어깨 위에 까만 무늬가 있는데 크기가 손만 하고 희미하지만 거북이 모양이었다. 장차 즐거운 일이 있을 것이니 어깨 위의 거북이가 반드시 몸을 감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장성해서는 용모는 기위(寄偉)하였고 견식과 도량이 넓었으며 기예 또한 절륜(絶倫)하여서 글씨를 잘 쓰고 활도 잘 쏘며 술을 잘 마셨으니 사람들이 양을 헤아려 마실 수 없다고 하였다. 다만 사학(詞學)과 절행(節行)뿐만 아니라 실로 문무를 겸비한 재능이 있어 포부가 심히 중하였으나 오히려 이것들 모두 펴는 것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모두 한스러워하였다.
정부인(鄭夫人)이 한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혼(渾)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을 지냈다. 후부인 고령박씨(高靈朴氏)는 종묘서승(宗廟署丞) 진언(眞言)의 따님이니 다른 언덕에 장사 지냈다. 아들은 호(浩)로 진사(進士)이고, 딸은 부사(府使) 송여해(宋汝諧)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손이 많아서 여러 천명에 이른다.
처음 공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짧은 표석이어서 다만 성명(姓名)과 졸장(卒葬)만을 기록하였으며, 또 그마저도 오래되어 흐릿해져 읽을 수가 없었다. 이제 삼가 통문(通文)으로 여러 친족과 의론하여 다른 돌을 고쳐 세우기로 하고 이에 감히 공의 사적(事績)의 본말(本末)을 오른쪽과 같이 간략하게 쓴다. 그 세계(世系)와 이력(履歷)을 상세히 열거하여 대비(大碑) 안에 갖추어 실었으니 여기서는 다시 덧붙이지 않는다.
칠대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청풍도호부사(清風都護府使) 희조(喜朝)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