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선국(大朝鮮國) 병조판서(兵曹判書) 증의정부우의정(贈議政府右議政) 시(諡) 효헌(孝獻) 소석(小石) 조공신도비명(趙公神道碑銘)
대조선국(大朝鮮國) 증대광보국숭록대부(贈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감춘추관사시강원부(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侍講院傅) 행정헌대부(行正憲大夫) 병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경연일강관오위도총부도총관(兵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經筵日講官五衛都摠府都摠管) 증시(贈諡) 효헌(孝獻) 조공신도비(趙公神道碑)와 서문(序文).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시강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侍講院師) 원임규장각제학(原任奎章閣提學) 안동(安東) 김병국(金炳國) 짓다.
불초남(不肖男)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돈녕부사겸이조판서판의금부사지경연춘추관훈련원사규장각제학시강원좌빈객(行判敦寧府事兼吏曹判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訓鍊院事奎章閣提學侍講院左賓客) 영하(寧夏) 삼가 전액(篆額)과 서문을 쓰다.
아! 효헌(孝獻) 조공께서 천고에 돌아오지 못할 사람이 된지 어느덧 27년이 되었다. 혹시 공께서 비록 지금 세상에 살아계시더라도 중수(中壽, 80세)가 되려면 또한 여러 해가 남았다. 진실로 크게 장수를 누릴 수 있었다면 왕실의 지친으로서 틀림없이 탁월하게 이룬 업적이 있었을 테고, 후세에 드리워진 명성이 아주 한량없었을 텐데, 하늘이 수명을 연장해주지 않아 평생토록 지향했던 사업이 잠잠하여 흔적을 볼 수 없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슬프다!
공의 휘(諱)는 병기(秉夔)이고 자(字)는 경주(景冑)이며 호(號)는 소석(小石)이고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상조(上祖)는 고려 개국공신 휘 맹(孟)이다. 본조에 들어와 고관대작이 대를 잇고 명망과 덕행이 서로 이어졌다. 휘 상경(尙絅), 호 학당(鶴塘), 이조 판서 증영의정 경헌공(景獻公)에 이르러, 신축년(1721)의 세자를 세우는 일
2을 밀접하게 돕고, 의리를 고수함이 확고하여 당시의 임금이 대대로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하였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할아버지이다. 증조할아버지 휘 엄(曮), 호 영호(永湖), 이조 판서 증좌찬성 문익공(文翼公)은 흉악한 권력자의 비위를 거슬러 유배를 가서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 휘 진관(鎭寬), 호 가정(柯汀), 이조판서 증영의정 효문공(孝文公)은 문익공의 깊은 원한을 씻어서 풀었는데, 정묘(正廟, 정조)가 효자라고 칭하였다. 아버지 휘 인영(寅永), 호 운석(雲石), 영의정 문충공(文忠公)은 헌종(憲宗)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로, 군수 증이조참판 휘 세순(世淳)의 따님인데, 우의정 문충공 휘 상용(尙容)의 후손이다. 본가 생부 휘 만영(萬永)은 호가 석애(石厓)로, 익종(翼宗)의 국구(國舅)인데, 영돈녕부사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증영의정 충경공(忠敬公)으로, 순조(純祖)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 분이 문충공의 백형(伯兄)이다. 본가 생모는 증덕안부부인(贈德安府夫人) 은진송씨(恩津宋氏)로, 목사 증좌찬성 휘 시연(時淵)의 따님인데, 좌참찬 증영의정 문정공(文正公) 휘 준길(浚吉)의 후손이다. 순조 신사년(1821) 정월 25일에 공이 충경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양자로 나가 문충공의 후사가 되었다.
어려서는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행동거지는 품위가 있었으며, 또한 영리하고 총기가 뛰어났다.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를 할 적에는 종종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여 충경공과 문충공 두 공이 매우 애지중지하였다. 성장하여서는 삼가고 조심하였으며 쉼 없이 갈고 닦았다. 스스로 소박한 선비 차림을 견지하고 비단옷이나 맛있는 음식을 일체 멀리하여 모두가 원대한 장래를 기대하였다.
경자년(1840)에 특별히 동몽교관에 제수 되었다. 효유대비(孝裕大妃)
3의 승후(承候)
4 때문이었다. 신축년(1841)에 과천현감(果川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문충공의 환갑이 그 다음해이기 때문에 영화롭게 모시도록 하기해서였다. 갑진년(1844)에 감제(柑製)
5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사제(賜第)
6를 받고, 이듬해에 문과 방목에 이름이 올라 특별히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고, 연이어 부응교, 응교, 문신겸선전관(文臣兼宣傳官), 서학 교수, 사복시 정, 사헌부 집의, 성균관 사성, 의정부 검상‧사인, 병조 정랑 등에 임명되었다. 병오년(1846)에 특별히 호조 참의에 제수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한 뒤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이 해에 충경공의 상을 당하여 상기를 마친 뒤 대사성, 이조‧공조 참의,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 돈녕부 도정 등에 임명되었다. 경술년(1850)에 도승지가 되어 효정전(孝定殿) 향관(享官)으로 공로를 인정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고, 한성부 우윤, 호조 참판, 도총부 부총관, 동지춘추관‧의금부‧중추부‧경연실록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 해에 문충공의 상을 당하여 상기를 마친 뒤 이조‧형조 참판, 부제학, 경연일강관(經筵日講官) 등을 역임하고, 특별히 승진하여 가의대부(嘉義大夫)가 되었다. 갑인년(1854)에 지방관으로 나와 개성부 유수가 되고 그 다음해에 황해도 관찰사로 전직되었으며, 또 그 다음해(병진년, 1856)에 특별히 도총관에 제수된 뒤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여 형조‧병조 판서, 대사헌, 좌참찬, 지돈녕‧춘추‧경연‧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등을 역임하였다. 정사년(1857)에 빈전도감 제조로 공로를 인정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였고, 무오년(1858)에 특별히 총융사(摠戎使)에 제수되었다. 제거(提擧)
7는 장원(掌苑)‧사역(司譯)‧운감(雲監)‧비국(備局)‧조지(造紙)‧내의원(內醫院) 등이었다. 이상이 곧 공이 역임한 관직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공이 형조 판서로 있을 적에 옥안(獄案)이 있었는데 너그럽게 처리하라는 임금의 명령이 있어서 살피고 여쭈어 많은 죄수들의 처벌을 타당하게 하였고, 병조 판서로 있을 적에는 연말 대정(大政)
8을 거치면서 유능하나 승진하지 못한 사람들을 분별하여 뽑아 올리니, 여론이 합당하다고 칭찬하였다. 공이 개성 유수로 있을 적에는 이 고을이 동향(桐鄕)
9이어서 마음을 다잡고 다스림을 도모하여 대대적으로 향교를 보수하고, 도시(都試)
10의 몰기자(沒技者)
11를 장계를 올려 주청하여 법식으로 삼으니, 유생과 무사들이 성대하게 흥기하였다. 또 8천금을 각 관청과 각 면(面)에 나누어주어 어려운 고비를 벗어나는 바탕으로 삼게 하니, 양반과 서민들이 시혜를 칭송하였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적에는 여러 고을의 환곡 폐단을 살펴서 궁장(宮庄)의 민호(民戶)가 누락되어 면제된 자들을 임금께 아뢰어 낱낱이 조사하여 환곡을 고르게 나누니, 온 도가 신뢰하였다. 공이 묵은 병이 더욱 위독해져 총융사(摠戎使) 부절(符節)을 받을 수 없어서 글을 올려
12 해직을 간청하였는데, 마침내 3월 1일에 정침(正寢)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겨우 38세였다. 춘천(春川) 삼태동(三台洞) 선영의 건좌(乾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뒤에 효헌(孝獻)으로 시호를 내려주었다. 인자하고 은혜로워 어버이를 사랑함[慈惠愛親]을 효(孝)라 하고, 충성을 다하고 안으로 덕을 갖춤[嚮忠內德]을 헌(獻)이라고 하였으니, 아들
13이 귀하게 되어 증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전배(前配)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로, 판돈녕(判敦寧) 문정공(文貞公) 유근(逌根)의 따님이다. 공보다 15년 앞서 세상을 떠났는데, 분묘를 이장하여 공과 합장하였다. 후배(後配)는 정경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현령 승소(承沼)의 따님이다. 두 부인에게서 모두 자식이 없어서 삼종형(三從兄)인 현령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병석(秉錫)의 둘째아들 영하(寧夏)를 후사로 삼았다. 영하는 현재 판돈녕부사이다. 영하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동윤(東潤)이다.
공은 용모와 거동이 헌걸차고 시원스러우며 도량이 굉장히 깊고 우뚝하여 재상의 자질이 있었고 가정에서의 행실도 순박함을 갖추었다. 효성과 우애로 근본을 삼아 날마다 두 집의 어버이를 충심으로 봉양하며 정성이 지극하였는데, 좌우로 시중드는 이바지가 즐거워 마치 물러 터져 무능한 듯하였다. 백씨(伯氏) 문숙공(文肅公)
14이 갑자기 까닭 없이 병이 들어 세상을 버리자, 공은 기둥과 들보와 같던 백씨의 요절로 살을 베어내는 고통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그 당시에 충경공이 안질(眼疾)을 앓았는데, 부축하고 돌보기를 동동촉촉(洞洞屬屬)
15하며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다. 6,7년간의 상사(喪事)로 가슴 떨리는 재앙이 닥쳐오고 가문의 복록이 쇠락하는 가운데, 공이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몸으로 근심을 머금어 마치 살 의욕을 잃은 듯하였으나, 맏형수를 위로하며 힘껏 성의를 다하고, 여러 누이들과 같이 슬픔과 기쁨을 함께 하였다. 친척 중 곤궁한 사람들에게는 선대의 규범을 실천하여 위급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도와주고 구제함에 혹시라도 소홀할까 두려워하였다. 무릇 사물을 응접할 적에는 영락없이 이치에 딱 들어맞았고 치밀하여 막힘이 없었으며 견고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온화한 기색이 바깥으로 드러나지만 내면을 지킴은 본디 그대로였다. 품성과 분수가 트이고 밝았으며, 겸하여 가정에서 배운 견문으로 세상에서 필요하고 이용되는 일체의 재능을 가슴속에 다 갖추고 있었으나, 펼쳐 시행한 경우는 겨우 한두 번의 개성 유수와 관찰사로 그쳤으니, 이는 고기 한 점을 맛보고도 솥 안의 국 맛을 알 수 있는 경우라 하겠는가.
공은 약관의 나이 때부터 대궐을 드나들며 조심하고 근신하여 내시나 궁녀 무리들이 혹시라도 사사로이 청탁을 하지 못하였다. 평소에 거처할 적에는 번잡한 곳에 붙좇아 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생활이 담담하였다. 막 병이 위독해졌을 때 병상의 생활이 못내 마음에 걸려 임종할 적에 자전(慈殿)께서 걱정을 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으니, 매우 슬픈 일이었다. 공의 사망 소식이 한번 퍼지자 길을 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이 집의 이 사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헌묘(憲廟, 헌종)께서 일찍이 공을 칭찬하여 “어떤 일도 감당할 만하다.”라고 하였는데, 임금의 말 한마디가 후세에 증명이 될 것이니, 임금에게도 인정을 받았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내가 공을 깊이 알게 된 것은 대대로 내려온 우호에 그치지 않고 공의 집안의 아름다운 행실과 순수한 덕행을 마음속으로 깊이 존경하고 탄복한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고, 또한 가형(家兄)
16 의정공(議政公)과는 동갑이어서 뒤따라 다녔던 허물없는 사이였기에 더욱 특별하기 때문이다. 공의 죽음이후로 착한 이에게 복을 준다는 하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공의 대를 잇는 아들이 아버지의 아름다움을 이어받아 학문으로 쌓은 업적으로 세상에서 명망을 얻고 있으니, 시(詩)에서 말한 “효자가 끊어지지 않으니, 길이 너의 집안에 복을 내리리라.”라고 한 경우가 이를 두고 한 말인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天禀非偶 타고난 성품은 우연이 아니니
庭訓是資 가정의 교훈이 바탕이었네
孝友與政 효성과 우애와 정무를 아울렀으니
志行于玆 품은 뜻을 여기서 행하였네
周通淵博 두루 통달하고 깊고 넓어
繄無不宜 아! 다 합당하였네
觀厥薄試 대략 시험삼아 살펴보니
庶推而知 거의 미루어 알 수 있네
假以年壽 공의 수명을 늘여주었더라면
爲國蔡蓍 나라의 채시
17가 되었을 텐데
奈莫究展 어쩌나 끝까지 펼치지 못하셨네
理難諶斯 세상 이치 참으로 믿기 어렵네
善人受報 착한 이 보답 받는 때는
多在後時 대부분이 때가 지나서라네
嗣有趾美 아들이 아버지의 업적을 이었으니
門戶如之 가문도 마찬가지리라
夫奚憾焉 어찌 서운함이 있겠는가마는
存沒可悲 생사가 나뉨은 슬픈 일이네
百世緬想 백세 뒤에라도 생각나거든
視此銘辭 여기에 새긴 글을 보아주소
개국후 4백 9십 3년 갑신(1884) 3월 일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