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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신도비(金堉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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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1664년(현종 5)에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 건립된 김육(金堉)의 신도비이다. 비의 찬자는 이경석(李景奭)이며 서자는 김좌명(金佐明)이다. 비문에 의하면 김육(1580∼1658년)의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이다. 아버지는 참봉 흥우(興宇)이며, 어머니는 현감 조희맹(趙希孟)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1)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1623년에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 해 2월에는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 해 10월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이후 계속 승진하여 1649년 5월에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하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했다. 1654년 6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른 후에는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쳐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죽어, 이 사업은 그의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해 뒷날 성취되었다. 저술로는 그의 시·문을 모은 『잠곡유고(潛谷遺稿)』(11권 10책)·『잠곡별고(潛谷別稿)』·『잠곡유고보유(潛谷遺稿補遺)』·『잠곡속고(潛谷續稿)』가 전한다.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과 청풍 봉강서원(鳳岡書院), 강동(江東) 계몽서원(啓蒙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등에 배향되었고, 1704년(숙종 30)에는 가평의 선비들이 건립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홀로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선 후기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한 실학자 김육의 행적과 성품 및 가족 등을 자세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동법의 실시 및 확산 과정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
유명 조선국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증시 문정 김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아들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동지경연 성균관사 좌명(佐明)은 삼가 글을 쓰다.
효종대왕께서 왕위에 즉위하신지 9년째 되는 무술년 9월 4일에 원임 영의정 김공께서 회현동(會賢洞) 자택의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춘추 79세였다.
내가 묘지를 지었는데 공의 아들이 또 나를 찾아와 묘 비문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얼굴이 매우 수척하고 말이 간절하였다. 마침내 내가 재주가 없다고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공의 행장을 참고하여 서차를 정하고 명(銘)을 하는 바이다.
공의 휘는 육(堉)이고 자는 백후(伯厚)이며 호는 잠곡(潜谷)이다. 김씨는 신라에서부터 나왔는데 신라 말에 왕자가 청풍(淸風)에 피하여 살았다. 이로써 그 후손은 마침내 청풍군인이 되었다. 고려조에서부터 아조(我朝)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벼슬을 이어 왔다.
고조인 휘 식(湜)은 학행으로써 이름을 떨쳤고 현량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조정암(趙靜庵)과는 도의로써 교분을 맺고 있었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에 화를 입었다.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덕수(德秀)는 처사로서 일생을 마쳤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조인 휘 비(棐)는 세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선정으로 명성을 떨치었고 돌아가실 때의 벼슬은 군자감 판관이었는데,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고(考)의 휘는 흥우(興宇)인데 약관에 사마시의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였고 우계(牛溪: 성혼 成渾)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재량(齋郎)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일찍 세상을 떠나시었다. 후에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비(妣)는 한양(漢陽) 조씨(趙氏)로서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현감 희맹(希孟)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경진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5세에 책을 받고는 이를 문득 외웠으며, 6,7세에 찬성공을 따라 강동(江東)으로 갔는데 동각(東閣)에서 우연히 조호익(曺好益)을 만나 거처를 옮겨 스승으로 모셨다. 항상 각고의 노력을 다하였고 정칙(整飭)하였으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의정공(議政公)을 모시고 오두막집에서 살면서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 올연히 학문에 몰두하였고, 비록 임진년의 난을 당하여 산곡으로 피난을 하였을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문사가 아름다워 우계 선생도 크게 칭찬하였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5세에 책을 받고는 이를 문득 외웠으며, 6,7세에 찬성공을 따라 강동(江東)으로 갔는데 동각(東閣)에서 우연히 조호익(曺好益)을 만나 거처를 옮겨 스승으로 모셨다. 항상 각고의 노력을 다하였고 정칙(整飭)하였으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의정공(議政公)을 모시고 오두막집에서 살면서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 올연히 학문에 몰두하였고, 비록 임진년의 난을 당하여 산곡으로 피난을 하였을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문사가 아름다워 우계 선생도 크게 칭찬하였다.
갑오년에 의정공께서 병이 위독해지자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네가 능히 뜻을 세운다면 나는 죽더라도 지하에서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하고는 운명하시었다. 이로써 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다.
이후 병란을 만나서는 대부인을 보시고 호남과 경기를 떠돌아 다녔는데 항상 보리를 짊어지고 극진한 효성으로 봉양하였고, 계조모 김씨가 해서(海西)에 머물러 계셨는데 공은 항상 걸어서 찾아뵙고는 문안을 올리고 보살피었다. 오래지 않아 계조모의 상을 당하였고, 경자년에는 또 대부인의 상을 당하니 운구를 받들어 선산에 있는 의정공의 묘소에 합장하였는데 몸소 흙을 짊어지고 묘역을 관장하고 또 애통함이 지극하여 향리의 사람들이 이를 보고 모두 감탄하였다. 이 때문에 마침내 몸을 상하였는데 오랫동안 회복되지 못하였다.
을사년에 처음으로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이름을 크게 떨쳤고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5현(賢)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공이 그 우두머리였으며 그 상소문도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정인홍(鄭仁弘)이 방자하게 회재(晦齋 :이언적 李彦迪)와 퇴계(退溪) 두 선생을 비난하자 공이 주관이 되어 많은 사류들과 의논하여 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리고 말았다. 광해군이 노하여 그 우두머리를 구속하려 하니 공은 스스로 나아가 자기가 수두임을 밝혔다. 마침 대신들의 간함이 있어 일이 겨우 무마되었다. 공은 시사가 날로 크게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는 가평(加平)으로 물러나 몸소 농사를 짓고, 스스로를 호를 잠곡(潜谷)이라 하였다. 시문을 지어 스스로의 뜻을 나타내기를 10여년이나 하였다.
계해년 인조반정이 나타난 초기에 유일로 천거되어 금오랑에 제수되었고, 갑자년 봄에 이괄(李适)의 적도들이 반란을 일으켜 대가(大駕)가 남쪽으로 행차하였는데 급히 행재소로 달려가니 왕께서 인견하시고는 품계를 올려 음성(陰城) 현감에 제수하였다. 이에 상소를 올려 오래된 폐단을 조목조목 상소하여 시정을 건의하였는데, 그 뜻은 백성이 편안하면 나라도 편안하다는 것으로써 요체로 삼았다. 왕이 이를 보고 공을 크게 칭찬하시었다. 또 비가 오지 않아 근심이 되어 기우제를 지냈더니 문득 비가 내려 봇물과 두렁을 고르게 하고 경계를 바르게 하였다.
일찍이 증광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해 가을에 회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며 또 전시(殿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동년 10월에 정언으로 조정에 소환되니 음성현민들은 공의 치적을 숭모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이로 부터 을축, 병인에 이르기까지 전적(典籍)을 비롯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郎) · 지평(持平) · 사서(司書) · 문학(文學) · 병조정랑(兵曹正郎) · 지제교(知製敎) 겸 호패청랑(號牌廳郎) · 직강(直講) · 헌납(獻納)을 역임하였으며 춘방(春坊:예부) 미원(薇垣:사간원) 백부(栢府:사헌부)에도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제수받아 나간 것이 여러 번이었다. 법률로써 엄격히 규찰할 것을 감히 말하니 훈척들은 이를 꺼리어 대간의 입을 빌려서 공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교생들의 상소가 줄을 이어 이에 항변하니 너그럽게 처리되었다.
정묘년 봄에 문학에 임명되었는데 이때에 서쪽의 경계가 심히 위급하였다. 이에 공은 호패법을 없애 백성들을 진정시킬 것을 청하였다.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갔다가 강도에 들어가니 병조에 이임하였고, 동년 여름에 서울로 환도하자 지평이 되었다가 이어 직강이 되었다.
이홍주(李弘冑)는 빈호태감(儐胡太監:도원수)으로 있을 때 공을 종사관으로 천거하여 일을 자문하였는데 공께서는 서쪽 일에 아주 익숙하였다. 공께서는 글을 올려 민정의 향배와 성곽의 수비에 대한 험이한 상태를 상소한 것이 수백 수천 번이었다.
체부(體府) 김류(金瑬)에게 추천되어 남쪽 지방의 군사를 조열하였는데 공은 영남을 3로로 나누어서 절도사로 하여금 관할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인조 6년 무진년에 수찬 교리 헌납을 역임하였고 동년 가을에는 이조 좌랑에 제수되고 곧 이어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기사년에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곧 다시 제수되었다. 이때 김세렴(金世濂)이 전망(銓望:인사권)을 맡고 있었는데 조정의 여러 의견과 상충되는 바가 많아 물의를 빚고 있어 공이 이를 조정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화를 입어 출척되었다. 양근(楊根)으로 돌아와 강학하니 관에서 그 노고를 치하하여 고비(호피)를 내려주었다. 이곳에서 밭을 사고 집을 짓고는 유유자적하였다.
임신년에 수찬에 임명되고 교리를 거쳐 다시 이조에 들어갔으며 얼마 후 응교로 승진하였다. 인목대비(仁穆大妃)께서 돌아가시자 산릉도청(山陵都廳)의 관원이 되었고 검상(檢詳)·사인(舍人)·보덕(輔德)·응교를 거쳐 사간에 임명되었다. 산릉이 끝나자 그 노고로서 품계가 군직으로 올랐고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계유년에 병조참지로서 동부승지에 옮겼고 이어 우부승지가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었다. 힘써 학문을 권하고 군사를 격려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며 노인을 공경하는 것으로 정사의 대본을 삼으니 왕께서 이를 듣고 표상하였다.
병자년에 임기가 다하자 하지사(賀至使)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해역(海役)을 꺼렸으나 공은 의연한 태도로 길을 떠났다. 8월에 남범구(南汎口)에 정박하였는데 이 때에 청인(淸人)들이 이미 황도를 침입하고 있었다. 이 때 명(明)의 도독 진홍범(陳洪範)은 병사들을 관(關) 밖에다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공이 글을 보내어 대의(大義)로써 분기시키니 홍범은 크게 부끄러워하여 11월에 군사를 서울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바다를 지키는 경비는 대단히 허술하였다. 공은 홀로 나아가 예부 상서 강봉원(姜逢元)을 만나 뵙고 노고를 위로하고 절목을 물으니 상서가 조정에 같이 가서 참예할 것을 허락하였는데 이는 특별한 배려였다.
정축년 2월에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명에서는 관례에 따라 연회를 베풀려고 하였으나 공은 국모의 상을 당하였음을 이유로 끝내 사양하고 하사한 물품도 사양하였다. 이때 본국에서 병화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쪽을 향하여 통곡하니 중국인들이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전후 각부에 글을 올리기를 10번 이상이나 하여 우리나라 사정을 알리었다. 명 황제는 우리나라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힘을 다한 데 대하여 칭찬하고 상을 내리도록 하였으며 병부에 칙명을 내리어 군사 3,000명으로서 호위하여 공을 해도에 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돌아오자 병조 참의를 제수하는 명을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다시 소환되어 예조 참의를 거쳐 은대(銀臺:승정원)에 들어갔는데 왕의 교지를 보니 공평하지 못한 것이 있어 글을 올려 이의 시정을 건의했으나 봉환(封還)되자 사표를 내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무인년에 판결사에 임명되었고 다시 이조에 들어가 괴원(槐院:승문원)의 부제조를 겸직하였다가 관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비풍(匪風)의 말을 인용하여 사표를 허락해 줄 것을 청하는데 그 뜻이 매우 비통하고 간절하여 어찌 할 수가 없었다.
호서의 관찰사에 임명되니 때는 전란을 겪은 뒤라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곤궁하였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여 균역(均役)을 실시하고 도내의 전안(田案)과 수확량을 통계하여 이를 기준으로 미포를 거둬들이게 하고 이것으로써 온갖 수요에 올려 바치고 나머지는 저축을 하니 백성들은 생활이 부유해지고 부역도 반이나 절감되었다. 이를 이름하여 대동(大同)이라고 하는데 공은 조정에 상소를 올려 이를 실시할 것을 건의하니 조정의 논의에서도 바로잡아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기묘년에 임기를 마치자 서추(西樞)에 제수되고 이어 승지가 되었다. 경진년에는 형조 겸 대사성이 되고 병조를 거쳐 다시 승지로 돌아오니 승지로 제수된 것은 무려 다섯 번이었다. 후에도 여러 번 승정원 · 홍문관 · 사간원 · 병조 · 호조에 출입하였다.
계미년 봄에 옥당(玉堂:홍문관)에 있었는데 재앙이 거듭 나타나자 글을 올려 왕께서 덕을 쌓을 요체를 말하였는데 그 말이 심히 당당하고 절실하였다. 또 우부승지가 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우윤에 특별히 제수되고 품계도 올라 가선(嘉善)이 되었다. 또 부제학이 되었다가 도승지가 되었고, 동년 가을에는 원손의 보양관(輔養官)이 되고 서운관(書雲官)에 임명되었다. 겨울 10월에 병조참판 겸 우부빈객이 되었고 12월에는 원손을 모시고 심양에 갔다. 갑신년에 연경이 함락되자 동년 가을에는 원손을 모시고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연로에서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왕께서는 공을 칭찬하시어 장자(長者)라고 하시었으며 소종백(小宗伯:예조참판)을 제수하시어 좨주(祭酒)를 맡도록 하시고는 곧 특별히 품계를 더하여 가의(嘉儀)로 하였다. 공께서 사양하니 이조참판 겸 부총관을 제수하시어 비국(備局:비변사)과 선혜청(宣惠廳)의 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겨울에는 판 형조 겸 우빈객으로 발탁되었고, 을유년에 청의 사신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호위하여 나가자 공으로 하여금 인도하여 서쪽으로 가게 하였는데 공은 이들 청 사신을 꺼려 글로써 문답하였다. 소현세자께서 돌아가시자 봉묘를 감독하고 애책(哀册)을 찬하니 왕은 그 노고를 포상하여 구마를 내렸다. 여러 번 관직을 옮겼는데 우참찬 · 대사헌 · 예조판서 겸 내국제조(內局提調) 등의 관직을 거쳐 예조로 들어갔다가 다시 우빈객에 임명되었다.
병술년 봄에 왕께서 강씨(姜氏:강빈 姜嬪)의 죄를 논함에 있어서 빈청에 엄한 교지를 내려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공은 대신들과 함께 대궐문 밖에서 명을 기다리니 왕은 더욱 노하여 공의 직을 옮기게 하였으나 얼마 후 다시 내국제조(內局提調)에 임명되어 사신으로서 연경에 다녀왔다. 다음 해 개성유수가 되니 정사를 베풂에 먼저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을 해결해주고 자제들을 교훈하였다.
그리고 학궁(學宮: 성균관)의 양무(兩廡)를 수리하고 간단한 석전(釋奠)을 몸소 행하였고, 포은(圃隱)의 순절지에 성인비(成仁碑)를 세웠으며 『노론정문(魯論正文)』과 『효충전경(孝忠全經)』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고, 또 노인을 공경하고 선을 베푼 것이 널리 알려지니 여러 사람들은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였으며, 공께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감에 미쳐서는 길에 나와서 수레를 붙들고 사모의 정을 나타내었다.
기축년에 기로사(耆老社)에 들었고 동년 5월에 인조께서 세상을 떠나시니 공은 임시로 판예(判禮)가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곧 정식으로 임명되었다.
선왕(인조)의 장례를 모시는데, 온갖 정성으로 행하니 예의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8월에 도헌(都憲:대사헌)에 제수되고, 9월에는 우의정에 승진하였다. 공은 이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나아가서 다시 여러 번 글을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왕께서는 돈독한 유시를 내리시고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동년 겨울에 선영을 찾아뵙고 제사를 올렸으며 이곳에 머물렀다.
경인년에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거듭 상소하였으나 왕께서는 이를 들어주지 않으시고 재차 승지를 보내어 유시하시기 “나는 공을 마치 지주(砥柱)로 보고 있는데 경께서 물러나기를 청하는 것은 마치 급류와 같구려.”하였다. 공은 이를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한 늙고 병든 신하를 버려서 성조(聖朝)의 퇴양지풍(退讓之風)을 이루게 해주신다면 어찌 이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하고는 물러남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왕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으시고 영 중추에 임명하시었다. 명을 받들어 다시 연경에 갔으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시골로 나가서 글을 올려 물러날 것을 더욱 간절하게 청하였다. 또 왕에게 글을 올려 재앙을 물리치는 방도를 아뢰었으니 그 대략을 살펴보면, “재앙을 만났을 때는 이를 두려워하여 근신하면 가히 재앙이 물러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구언하여 이를 정책으로 반영한다면 좋은 의견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근신한다고 하면서도 정성이 없으면 이는 하늘을 속이는 것이요, 구하고 쓰지 않으면 이것은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말이지만 옛날 한(漢)나라는 지진이 일어났을 때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 그 패업(覇業)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제 천재를 당하고 있음은 죄가 신하들에게 있는 것이니 죄를 주어야 할 것입니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상신(相臣)과 유신(儒臣)들이 왕께 문책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소가 있었다고 한다. 신묘년 봄에 청에서 4명의 사신이 왔었는데 이때 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이들과 다투어 벼슬에서 물러나자 공으로서 이를 대신하고 훈련군자도제조(訓鍊軍資都提調)를 겸하도록 하였으나 고사하였는데 소명이 계속 내려와 마침내 관직에 나아가 청의 사신을 접대하였다.
가을에 또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청의 사신이 다시 나오자 억지로 나아가 이들을 접대하였다. 겨울에는 원임 이경여를 불러 수상으로 보임하고 공은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계사년 여름에는 내국도제조를 겸하게 하였다. 왕께서는 공이 오랫동안 물러나 있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잠시 동안만 벼슬을 가진 채 쉬게 하니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에는 세자부(世子傳)를 겸하였고 갑오년에는 영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물러났고 을미년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물러났다. 상상(上相)에 임명된 것만 3번이었으나 결국 물러났다. 후에 영 돈녕사에 임명받아 더욱 간절히 물러날 것을 간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실록청총재가 되어 『인조실록(仁祖實錄)』을 편찬하고 선조대의 실록을 추수하였다. 친도사우감(親檮社雨監)을 맡아 부묘(祔廟)와 책례(祔廟)를 행하였는데 일을 마치자 시약원(侍藥院) 모두는 말안장과 말을 하사받는 은총을 입었다.
공은 일찍이 백성을 편안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믿어 벼슬이 크게 올랐을 때도 이것은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고, 또 이의 실행을 깊이 연구하여 글로써 그 시행의 득실을 논하니 그 이치가 매우 타당하였다. 이에 왕께서 명하시어 먼저 호서에서부터 시행하라고 하시니 호서인들은 환호하며 손뼉을 치고 기뻐하여 궁비(穹碑)를 세워 공의 덕을 기리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공의 품은 바가 행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간에 이의 시행에 있어서 비방이 사방에서 나왔으나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이의 실현을 보게 하였으니 군자들이 이르기를 “법은 진실로 좋도다. 그러나 공과 같이 진실한 사람이 아니면 어렵도다.”고 하였다. 또 이를 호남에도 실시할 것을 청하여 조정에 들어가 건의하고는 겨우 집으로 돌아와 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이에 왕에게 유차(遺箚)를 올려 성학에 힘써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과 아울러 호남지방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뜻을 건의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돌아가심에 미쳐서도 왕을 생각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뜻이 진실로 더욱 돈독하였다. 상께서 부음을 들으시고는 크게 슬퍼하시어 3일 동안 조정을 쉬게 하고 상여를 내리시고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였고, 왕세자께서도 궁관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관에서 상사를 주관하여 장례를 모셨다. 각지 서원의 유생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통곡하였다. 호민(湖民)들은 더욱 슬퍼하여 애통해 하였다. 11월에 양주(楊州)에 있는 선산인 금촌리(金村里)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례를 모시었다.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리시었다.
공은 품성이 강경하고 지조와 행실이 단정하고 확고하였으며 집에 있을 때도 단정히 앉아 하루 종일 흐트러지는 기색이 없었다. 젊었을 때 술을 극히 좋아하였는데 한번 부친의 경계하심을 듣고는 크게 뉘우쳐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일찍이 선조(宣祖)께서 술을 하사하셨으나 이를 마시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사당에 나아가 예를 올렸고 홀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으며 어린 동생들을 경애함이 지극하였다. 성색을 멀리하였으며 밥을 먹을 때는 맛있는 찬을 두지 않았다. 친척 간에는 화목하여 촌수가 멀고 가깝고를 구별하지 않았다.
외가로서 원조인 조(趙) 양절공(良節公)의 사우를 지었고, 조호익(曺好益)의 외로움을 위로하였으며 이러한 공의 태도는 오랫동안 변함이 없었다. 왕에게 건의하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신도비를 그의 묘역에 세우고 스스로 그 비명을 썼다. 어릴 때부터 글을 읽어 당세에 제일가는 선비가 되었다.
진실로 마음가짐은 사물을 사랑하는 데 두었고, 사람에게 이르러서는 반드시 어려움을 구제하고 깊이 살피어 감동하게 하였다. 곤궁하게 살 때에도 역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을 학문의 요체로 생각하였고 반드시 지와 행을 힘써 실천하였다. 조정에 나가서는 마음에 품은 바를 항상 건의하였는데 혹 그릇된 정사를 만날 때는 이의 시정을 촉구하는 항장을 올리기도 하였고, 혹 바른 일이라면 무릎 꿇고 간절하게 그 뜻을 주달하여 비록 왕의 뜻에 거스름이 있다하더라도 굴하지 않았다. 즉 안흥(安興)의 축성, 속오(束伍)의 급보(給保), 어영군(御營軍)의 번상, 영장(營將)의 별설과 같은 것은 백성들에게 폐를 끼칠 것을 염려하여 중지하고 없앨 것을 청하였으며, 흠경각(欽敬閣)의 옛 터에 만수전(萬壽殿)을 지으려고 하니 그 불가함을 극간하였다. 공의 의견이 모두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지만 왕께서는 그 충정을 가상하게 여기셨다.
중국의 조정에 올리는 글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이때에 이시해(李時楷)가 간하여 장원을 유배를 보냈는데 공이 모자의 의리로써 간하여 박장원(朴長遠)을 유배지인 북쪽 변경에서부터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고, 김홍욱(金弘郁)이 강옥(姜獄)을 다스림에 있어 크게 잘못을 저지르자 그 불가함을 아뢰었고, 또 능천인(綾川人) 구인후(具仁垕)가 계속 득달하여 왕의 뜻에 거슬리니 그를 파직하였는데 공은 같이 죄를 입었으니 벼슬에 있을 수 없다고 하여 끝까지 사표를 내고 간곡히 청하여 물러나왔다.
화폐의 유통과 수차(水車)의 사용도 모두 공께서 건의하여 청한 바였고 이것이 들어가지 않자 개탄하였다. 그래서 왕께 나아가 이의 실현을 힘껏 주달하니 왕께서도 그 충성스런 뜻을 추념하시고는 경연에 임하여 탄식하기를 “어찌 튼튼하고 꺾이지 않음이 김(金) 영 돈녕과 같음이 있겠는가?”고 하셨다.
만년에는 집에다 당과 정자를 지어, 당을 ‘공극(拱極)’이라 하였고, 정자는 ‘구루(傴僂)’라 하여 이곳에서 살면서 자적하였다.
공께서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큰 별이 떨어지니 점치는 사람이 이미 공께서 돌아가실 것을 알았다. 병중에 있으면서도 손님이 오면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였고 돌아가실 때에도 정신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니, 평소에 뜻을 정하고 생활함이 이와 같았다.
호서에 있을 때 『구황찰요(救荒撮要)』·『벽온방(辟瘟方)』을 간행하여 각 도에 나누어 배포시킬 것을 청하였고, 기묘년에는 『팔현전(八賢傳)』·『당적내외세보(黨籍內外世譜)』· 『기서박섭(嗜書慱涉)』을 간행하였다.
비록 승정원에 있을 때도 주야의 여가에는 책을 가까이 하여 지지(地志) · 병략(兵略) · 복서(卜筮) 등에 이르기까지 박통하였고 일찍이 서양 역법(曆法)을 논하였으며 역대의 개력원류(改曆源流)를 거슬러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마치 손바닥을 보듯이 정확하였다.
늙어서도 정과를 폐하지 않았고 책을 저술하는 것을 즐겨 연경에 들어갔을 때도 『감개록(感慨錄)』·『집사시(集杜詩)』등을 남겼고, 『황명기략(皇明紀略)』·『유원총보(類苑叢寶)』· 『종덕신편(種德新編)』·『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송도지(松都志)』가 세상에 간행되었고 『고사증산(攷事增刪)』·『잠곡필담(潜谷筆譚)』, 시문(詩文) 약간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부인은 정경부인인데 파평(坡平) 윤씨(尹氏)로 고려 삼한공신 신달(莘達)의 후예이며, 성균진사로서 이조참판에 추증된 휘 급(汲)의 따님이다. 천성이 완숙하여 어릴 때부터 내훈과 소학의 대의에 통하였으며 20세에 공에게 시집왔다.
공에게는 시어머니와 두 누이가 있었는데 시어머니를 섬김에는 마치 법을 받들듯이 하였고 누이를 사랑함이 마치 동기간과 같았다. 항상 손에는 바느질을 놓지 않았으며 누이의 혼수와 제물을 미리 준비하여 하나씩 궤에 넣어 두어 대비하였으며, 공에게는 조금도 심려를 끼치지 않았다. 몸에는 비단옷을 걸치지 않았어도 고귀해 보였고 미망인으로서의 원통함이 넘쳐 끊을 수 없었다. 궁중의 측근이 내명을 받들어 와서 잠깐 보고자하니 그 슬픔으로 입을 열기 못하였다. 기해년 2월 20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75세였다. 4월 1일에 공의 묘에 부장하였다.
2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 좌명(佐明)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판 병부로 있고, 차남 우명(佑明)은 국구(國舅)로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지금 영 돈녕부사로 있다. 딸은 사인 김숭문(金崇文), 첨정 황도명(黃道明), 함경감사 서원이(徐元履), 감역 윤자(尹鎡)에게 각기 출가하였다.
판사는 1남을 두었으니 석주(錫冑)인데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금 정언으로 있으며, 1녀를 두었는데 생원 조현기(趙顯期)에게 출가하였다. 부원군은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자는 만주(萬冑)인데 일찍 죽었고, 다음으로 석익(錫翼), 석연(錫衍), 석달(錫達)이 있으니 모두 어리다. 장녀는 즉 왕비전하이시고 차녀는 어리다.
김숭문은 아들이 없고 딸만 3명을 두었는데 장녀는 사인 유징(柳澂)에게, 차녀는 감찰 이 상연(李尙淵)에게, 막내딸은 집의 오두인(吳斗寅)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아들이 없으니 만기(萬紀)로서 아들로 삼았는데 유씨(柳氏)의 소생이다. 4남 3녀를 두었는데 만영(萬榮), 만성(萬成)이고 나머지는 어리니 이는 감찰의 소생이고, 1남을 두었으니 이는 정주(鼎周)로서 집의의 소생이고,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익(鎰)과 집(鏶)이며 장녀는 복창군(福昌君) 정(禎)에게, 차녀는 사인 이태(李邰)에게 각기 출가하였는데 이는 첨정의 소생이다. 문중(文重)이 있으니 감사의 계자이고, 4남 4녀를 두었으니 상린(商隣), 상빈(商賓), 상신(商紳)이고 장녀는 사인 정계주(鄭繼周)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어리니 이는 감역의 소생이다.
슬프도다! 이 세상에 태어나 선비가 되어 진실로 그 뜻을 얻은 자라면 어느 누가 밝은 임금을 만나 세상을 다스려 보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때를 만나기가 참으로 어렵도다. 또 때를 만난다 하더라도 능히 그 뜻을 펴기도 또한 어렵도다.
공은 일찍부터 글을 읽어 훌륭한 선비가 되었도다. 만년에는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현상(賢相)이 되어 양조(인조와 효종)를 섬기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정성으로 모셨으니 공은 비록 여러 고인古人에 비교하더라도 참으로 부끄러움이 없도다. 오호라! 이제는 공을 다시 볼 수가 없구나. 명하여 이르기를,
궁구하고 또 궁구하여 평생토록 학문과 정사의 요체를 터득하고자 하였도다.
이치를 통달하고 높은 경지에 이르니 우리 백성이 그 은혜 입었도다.
일을 만나 말할 때는 공은 거침없이 의견을 토로하였고
왕께서 부족함 있을 때는 공이 도와 이를 보충하였네.
방본의 튼튼함을 기약하였는데
비방과 모함이 어찌 공의 뜻을 꺾을 수 있으련가?
나라의 재정을 헤아리니 가뭄 뒤에 비 내려 대지를 적시는 듯
그 혜택은 백성에 두루 미치었도다.
호서를 관할하여 좋은 정사 펴니
밝은 태양이 묽은 구름을 씻은 것과 같았네.
사람마다 입을 모아 공을 찬양하였고 곳곳에 비 세워 공의 덕 기리었네.
그 은혜 호남에도 미치어 가엾은 백성 균양(均養)하려 하였도다.
공께서 세상 떠나시니 백성들은 그 도움을 잃었구나.
후에 그 뜻 이루어지니 마침내 공의 유지를 받들어 주었구나.
공의 높은 업적 추구하여 성명한 주상께서 알아주심이 아니었던가.
성군께서 등극하시었으나 어진 신하 이미 이 세상에 없으니
하늘의 이치 어찌 이리 망망한고.
부인께서 정숙하였으니 만복의 근원은 여기 있었도다.
옥수(玉樹:재주가 뛰어난 사람)가 함께 꽃피우니
자손들이 아울러 번창하였도다.
아름다운 기운이 문중에 가득하니 왕비가 그 문중에서 나왔구나.
공께서 돌아가셨으니 어찌 부인께서 뒤따르지 않겠는가.
오호라! 공의 무덤이여 내가 비석에 글을 새기는 도다.
숭정(崇禎)기원 무진 후 37년 갑진(현종 5, 1664년) 월 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