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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신도비(李澍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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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2년(광해군 14)에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뇌조리에 건립된 이주(李㴻)의 신도비이다. 비의 찬자는 정경세(鄭經世)이고 서자는 이현(李袨)이며 제액(題額)은 유흠(柳欽+心)이 전서(篆書)로 썼다. 비면 전체가 마모가 심하여 판독하기가 어렵다.이주(1534∼1584년)는 본관이 연안(延安), 자는 언림(彦霖), 호는 분봉(盆峯)으로 아버지는 군수 경종(慶宗)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운천군(雲川君) 인(忄 +寅)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58년(명종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학업 중, 보우(普雨)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어 불사를 일으키려하자 제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보우의 죄를 성토하였다.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정자(權知正字)에 보임된 후 계속 승진하여 1583년 사간원정언에 이르렀다. 조정의 공론이 동인·서인으로 갈라지자, 동인의 입장에서 홍여순(洪汝淳)·유영경(柳永慶) 등과 더불어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논박하는 데 앞장섰다. 1584년 가산군수에 보임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남의 과실을 보면 반드시 이를 시정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어려워하였다고 한다.이주 개인의 행적 및 가계 뿐 아니라 조선 중기 붕당정치의 전개양상 및 불교에 대한 사림의 입장 등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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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득
유명조선국 증 순충적덕 보조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연녕부원군 □조산대부 가산군수 안주 진관 병마 동첨절제사 겸 춘추관 편수관 이공 신도비명병서
가선대부 행 원임 성균관 대사성 정경세(鄭經世) 지음.
손 급제 현(袨) 씀.
외증손 통훈대부 성균관 박사 유흠이 전을 함.
만력 병진년 봄에 내가 도하에서 대죄하고 있는데 하루는 연원부원군 이공이 찾아와서 거듭 말하기를, “돌아가신 대부의 묘앞에 있는 나무는 벌써 자라 이미 아름드리가 되었지만, 아직껏 비를 세우지 못한 것은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소. 이제는 아들들이 이미 늙었고 나도 다행히 숭반 다음가는 반열에 끼이게 되고 봉증의 은혜가 천양에까지 미치게 디었으니 법식에도 이수귀부를 할 수 있게 되었소. 원컨대 진실되고 부화되지 않은 글로 현각하고 싶으니 그대가 힘써 주오.”라고 하였다. 나는 주춤거리고 감히 승낙을 못하고 돌아왔더니 그 아우 양목공에게 행장을 들려보내면서 먼저의 말을 되풀이하면서 더욱 간절하게 부탁하였다. 생각해보면나는 뒤늦게 낳아 전배들의 언행을 이목으로 접하지 못하였고 그 지업도 한 두 가지밖에는 들을 수 없었으나 다행히 공의 두 아들과 종유하면서 그분들의 행동이 단결, 아칙하고 순근, 주상하여 참으로 쇄소응대의 학문이 있음을 보고는 공의 가정에 모범되는 것은 그 근본이 있었음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족히 공의 전형을 알 수 있다라고 하겠고 따라서 이 일은 끝끝내 사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상의 견책이 내리지 않아 좀더 후일을 기다리자 하였는데 그해 겨울에 용서를 받아 남으로 돌아와 정신을 수습할 수 있어 삼가 행장을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서차하는 바이다.
공의 휘는 주(澍)요,자는 언림(彦霖)이니 그 선세는 연안인이다. 고려조에 휘 습홍(襲洪)이 있었으니 벼슬은 태자 첨사요 그 자손들은 대대로 거경을 지냈다. 본조에 들어와 귀령(貴齡)은 공정왕 때에 정승을 하였고 그 아우 귀산은 강원도 관찰사로 있었는데 이 분이 공의 6세조이다. 관찰공이 춘천 부사 속을 낳았는데 성질이 강항하여 공정왕이 옹주를 그의 아들 근수(根粹)에게 하가시키려고 장님인 매파 지화(池和)를 보내서 말을 건네보도록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짚신 세 켤레만 있으면 부마되지 말라.”라는 갈구의 속담을 인용하여 대답하였던바, 지화가 거짓을 보태서 무고하여 일이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으나 공정왕이 미시의 친구라 하여 특별히 죽음만은 면해주고는 창원으로 유배시키고 그 자손들은 고폐시켭렸다. 공의 증조 휘 인문(仁文)에 이르러 비로소 풀리어 대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첨추에 이르렀다. 조의 휘는 채(埰)이니 삼척 부사요, 고의 휘는 경종(慶宗)으로 여산 군수요, 비 이씨는 왕자 운천군 인의 따님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오하여 비범한 아이로 일컬어 졌으며 커서는 능히 뜻을 세우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15세가 채 못되어 아버지의 임지인 홍산으로 따라 갔는데 그 고을에는 홍우성(洪友成)이란 선비가 있었다. 과거를 포기하고 궁거하면서 경학에 침잠하였는데 공이 찾아가 3년동안 시서를 배우니 공부가 날로 진취하였다. 이로부터 각고 면려하여 먹고 쉬는 일로서 학업을 게을리 하는 일은 없었으며 성현의 격언으로서 지표가 될만한 것을 따서 이를 좌우에 걸어두고는 스스로를 점검하였으니 이는 앞으로 고인의 위기지학에 정진하고 과거를 보는 일에만 매달리지 아니하려는 마음이었다.
나이 25세 때에 무오년 진사에 합격하여 태학에 유학하니 그 이름이 크게 떨쳤다. 을축년에 문정대비가 요승 보우의 말을 믿고서 회암사에서 무차법회를 열어 한달만에 파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문정이 승하하셨다. 이에 중외가 떠들썩하여 모두 병이 재소로 말미암아 나왔다 하여 보우의 사지를 찢어 죽이려고 하니 태학에서도 글을 올려 보우의 죄를 성토하였다. 이때에 태학생 중에는 글을 잘 하기로 이름있는 이가 많았으나 맨먼저 공이 지은 소를 채택하여 올리니 그 명성이 더욱 떨치게 되었고 일시에 이름 있는 이들도 모두 공을 사모하여 함께 사귀었다.
계유년 여름에는 성균관의 추천으로 금오랑에 제수되고 가을에는 선조가 반궁에 나와 사람을 뽑았는데 공이 제 4등으로 뽑히니 식자들이 서로 이를 경하하였다. 갑술년에는 승문원에 선보되고 병자년에 중시에 합격하여 정축년에는 승정원 주서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공의 내자가 홍정승 섬의 처질녀였기 때문에 법을 내세워 나아가지 않으니 사정에 채배되었다. 그때 마침 경성에 판관이 비어 있어 조정에서는 공이 무예를 겸했다 하여 불차 탁용하니 대간에서는 이것을 너무나 졸급한 승진이라 공격하고 아울러 사정의 직에서도 물러나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로서 마침내 승문원으로 돌아왔다가 경진년 봄에는 다시 주서를 제수받았다. ~ 83자결 ~
임오년에 병으로 돌아오니 역졸들이 비를 세워 그 공적을 추모하였다. 계미년에는 사간원 정언을 배수하였는데 그때에 대사헌 이개 대사간 박승임, 부제학 김우굉이 교장하여 이이의 진천과 분경의 불편을 논하고 그를 공격하였다. 선대왕이 바야흐로 이이를 권주하여 그에 의지하여 역현을 하려하는데 삼사에서 끊임없이 공격하니 그들은 결국 모두 좌척을 당하였고 공도 이로서 예조로 좌천되었다가 형조정랑으로 옮겼다. 동년 겨울에는 다시 가산 군수로 나갔는데 처음부터 속으로나 겉으로나 서운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진심을 다하여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니 한달이 못가서 공의 덕을 칭송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이듬해 7월 2일에 병으로 그 고을의 동헌에서 돌아가시니 51세였다. 그해 8월에 파주의 오리동으로 반상하였다가 10월에 여산공의 묘 남쪽 수백보되는 묘향의 언덕에 부인 유씨와 동혈로 장사지내니 이는 유지를 따른 것이다.
공은 뜻을 세움이 독실하고 예법에 따라 처신하여 평소의 생활에도 반드시 갓을 쓰며 띠를 띠고서 정좌하였는데 아무리 더운 날씨라 하더라도 이를 느슨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성질도 강방하여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였고 남의 과실을 보면 반드시 바른 말을 하고야 마니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만약 행위에 바르지 못한 점이 있으면 공이 알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정성스럽고 은근하여 오래도록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경애를 아끼지 않았다. 부모를 섬김에는 정성을 다하였으니 선대부가 성질이 엄격하여 즐겁게 하여 드리기가 어려웠으나 공은 좌우에서 색양하여 항상 환심을 얻었다. 매양 선대부께서 일찍 돌아가신 것을 애통하게 생각하여 그 사모하는 정을 가누지 못하였고, 수택을 보면 곧 울고 꿈에서도 뵈오면 눈물을 흘렸다.
자제를 가르침에는 엄하면서도 법도가 있었으며 더욱이 소학만을 순순히 가르쳐 자제들은 어릴때부터 이것을 외우지 못한 사람이 없었으며 상복을 당하여서는 이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마음가짐도 항상 근밀하였고 길을 걸을 때에는 반드시 땅을 보고 걸었으며 개미집도 밟지 않았고 글씨의 자획은 반드시 해서로서 바르게 썼으며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몸가짐을 헝클어트리지 않았다. 이와 같은 조그만 일만 보아도 공의 수양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알 수 있다.
공게서 돌아가신지 13년이 되는 병신년에 부원공이 조정의 중신이 되어 직위가 아경에 이르니 공에게 이조참판을 증직하고 그 뒤에도 누차 증직하여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갑진년에 또 순충적덕보조공신의 훈록과 대광보국 숭록대부의 품계와 의정부 영의정의 관직과 연영부원군의 봉호를 하사 받았으니 인신으로서의 영화가 극에 달한 것이다. 세상에서는 공의 녹이 덕에 따르지 못하였다고 하여 하늘을 원망하였지만 이와 같이 말한 사람들은 어쩌면 이른바 부대기정자가 아닐는지?
오 아름답도다! 부인은 고 정국원훈 유순정(柳順汀)의 증손녀요, 군수 사필(師弼)의 따님인데 남편을 섬기는데 예에 어긋남이 없었고 교만하거나 질투하는 빛이 없었으며 매사를 반드시 품한 연후에 행하였고 손수 길쌈을 하여 생계비를 마련했으며 있고 없고를 가지고 남편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고 아무리 곤란해도 의가 아니면 받지 않았으며 제사에는 제수를 빠짐없이 마련하여 집안에 모범이 되었는데 공보다 7년을 먼저 졸하였고 정경부인에 증질되었다. 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바로 연원부원군이오, 다음은 창정(昌庭)이니 양주 목사로 있다가 이제는 호조참의이며, 딸은 대사헌 남근(南瑾)에게 출가하였다.
부원군은 청송심씨를 선취하여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현은 급제요, 사위는 정랑 유성민과 좌랑 한형길이다. 또 양천 허씨를 후취하여 2남 6녀를 낳으니 아들 분은 충원 현감이오, 주는 어리며 사위는 진사 민 광훈, 사인 박문빈, 홍우원이오, 여타는 어리다.
참의는 성산 이씨를 취하여 6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심, 진, 한과 여타는 어리며 사위는 사인 정식이다. 대사헌은 1남을 두니 이문이오, 내외 증손은 남녀 합하여 20여인이다. 명하기를,
강직하고 근신하고 재주있고 민첩하니
하늘은 공에게 풍성하게 주었도다.
그러나 명은 중년을 못 넘고 벼슬 또한 높지 못하였으니
하늘은 공에게 인색도 하셨도다.
비록 자기는 넉넉지 못했으니 두 아들이 그 공 이루었으니
벼슬과 명망이 크게 높도다.
증직은 천양에 미치고 이정에 새겨지니
이로써 하늘로부터 보답을 받고 공을 거두었도다.
착한 일에 게으르지 않으면 어김없이 보답하는 것이니
저 예몽들을 볼지어다.
천계 2년 8월 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