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정윤복신도비(丁胤福神道碑)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1유형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개관
1619년(광해군 11)에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전대리에 건립된 정윤복(丁胤福)의 신도비이다. 비문은 아들 정호선(丁好善)의 부탁으로 정경세(鄭經世)가 찬술했다.비문에 의하면 정윤복(1544∼1592)의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개석(介錫)으로 아버지는 좌찬성 응두(應斗)이며, 어머니는 군수 송충세(宋忠世)의 딸이다. 1567년(선조 원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으나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이 일어나자 정여립과 친하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행호군으로 보직되었으나, 계속 말썽이 일어나므로 물러나 수년 동안 한거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서로호소사(東西路號召使)로 기용되고, 이어 우통어사(右統禦使)가 되었다. 선조가 북쪽으로 피난할 때 다리가 불편하여 따라가지 못하고, 분조(分朝)인 이천(伊川)으로 가서 병조참판을 제수받고 가산군에 이르렀을 때 병이 심해져 죽었다. 임시로 그곳 군 경계에 매장했다가 적이 조금 물러난 뒤에 백천(白川) 땅에 이장했다가 뒤에 용인(龍仁) 포곡(蒲谷) 묘향(卯向)의 언덕에 이장하였다고 한다.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윤복의 행적 및 가계 등을 알 수 있는 비문으로 정여립의 난 당시의 피해상황과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피난경로 등을 살필 수 있는 사료이다.
유명조선국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행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정공 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行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丁公神道碑銘 幷序)
만력(萬曆) 정사년(1617년)에 목사(牧使) 정후(丁侯) 호선(好善)께서 하루는 그 선대부의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나의 선공의 묘소에는 비각이 있어 사실을 기록한 글이 있어야 마땅한 것이로되 아직도 이것이 없습니다. 이는 대체로 감히 가볍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세월이 점차 흘러 어느 사이에 벌써 2기(紀 1기는 12년)가 지나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오래되면 드디어 인몰하여져서 선인의 덕을 후세에 전할 수 없을까 두려워 지금 찾아온 것이니 이 일을 맡아 주시면 저는 다행스럽게 생각하겠습니다.”고 하였다. 나는 감히 뜻을 받들 수 없다고 거듭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니 선왕(先王) 무자년(1588년)에 내가 이필반(珥筆班 승정원의 직)에 참여하여 조석으로 공을 은대(승정원)에서 모신 것이 반년이나 되었다. 이때는 선왕이 즉위하신지 오래되었으나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에 힘쓰는 일은 변함이 없었다. 어질고 호기스런 인물들을 뽑아 쓰는데 혹 현혹하거나 마음이 변하는 일도 없었다. 이로써 대각(臺閣)에서부터 종반(從班)에 이르기까지 언로가 단아한 사람과 정대한 선비들이 별처럼 널려있고 숲처럼 빽빽하게 포진하였다. 그래서 좌우에서 왕을 도와 정치하는 교화가 일시에 뭉쳐 크게 빛나니 여론은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걸출한 인물을 뽑는다면 공은 반드시 거기에 들어갈 것이다. 나는 다행히 공의 모습을 직접 뵙고 그 논의를 직접 들어 공을 가까이 모실 수 있었고, 또 공의 모든 것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 점에서 볼 때 내가 정후(丁侯)의 명을 받들어 이 일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어, 마침내 감히 이를 끝까지 사양하지를 못하고 삼가 그 행장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공의 이름은 윤복(胤福)이며, 자(字)는 개석(介錫)으로, 그 선대는 나주 출신이다. 일찍이 휘(諱) 윤종(允宗)이 있었는데 고려 때에 벼슬하여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낸 이후로부터 정씨는 드러나게 되었다. 고조(高祖) 휘(諱) 자급(子伋)은 벼슬이 소격서령(昭格署令)이다. 증조(曾祖) 휘(諱) 수강(壽崗)은 성품이 온화하고 맑아 구차하게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집현전(集賢殿)의 장이 되었으나 연산군(燕山君)의 어지러운 정치를 만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물러나 한가하게 지냈다. 뒤에 중묘(中廟 중종)를 섬겨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휘(諱) 옥형(玉亨)은 병조 판서이다. 아버지 휘(諱) 응두(應斗)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이다. 대대로 효의목인(孝義睦婣 효행과 절의와 족친사이에 화목함과 인척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의 도로써 집안을 가르치니 맑은 이름과 후덕한 것으로 당세에 이름을 떨쳤다. 어머니 송(宋)씨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고 군수 세충(世忠)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갑진년(1544년) 6월 을미(乙未)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영(聰穎)하여 힘을 들이지 않고도 학예를 성취하였다. 정묘년(156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부정자에 보직되었다가 예조의 낭관(郎官)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등용과 발탁이 날로 높아가고 명망과 행실이 모두 들어났다. 사간원의 정언(正言)·헌납(獻納), 홍문관의 수찬(修撰)·교리(校理)·응교(應敎), 사헌부의 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를 역임하고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전임하였다. 갑신년(1584년)에는 사간원의 사간(司諫)에서 승정원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였다. 국자감과 미원(薇垣 사간원)의 장을 역임하고 이조 병조의 참의를 지냈다. 무자년(1588년)에는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으며 품계가 올라 병조참판이 되었다.
기축년(1589년) 겨울에 호남(湖南)의 변이 있어서 모함하는 말이 진신(縉紳)에게까지 파급되어 한때의 사류가 거의 다 배척을 당하였다. 공도 또한 대사헌(大司憲)으로서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다. 선왕(先王)께서 그의 억울함을 살피어 곧 서용(敍用)의 명을 내리었다. 그러나 말하는 자가 전론을 다시 전개하므로 집에서 쉰 것이 수년이나 되었다. 임진년(1592년)에 왜구가 깊이 쳐들어오니 대가(大駕)가 서도(西道)로 피난하였다. 그 때 공은 미끄러져 부상한 것이 병이되어 점점 악화되니 말고삐를 잡고 호종(扈從)할 수가 없었다. 어려운 먼 길을 병든 몸을 수레에 실은 채 여러 밤낮을 가다가 서흥(瑞興)에 이르렀을 때, 앞으로 대가의 행차에는 미처 따르지 못하였는데 적의 군세가 이미 뒤에 바싹 다가왔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대대로 국은(國恩)을 입어 교목세신(喬木世臣)이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군부(君父)께서 피난하심을 보고도 대가의 앞, 뒤에 모시고 가지 못한다고 하여 가슴을 치며 비통하였다. 드디어 몸은 쇠약해지고 파리하게 여의어갔다. 공의 병세를 들은 주상께서 공에게 군사를 위로하라는 명을 내리시고 이천(伊川)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공은 사잇길로 쫓아가 왕을 뵈오니 병조참판을 제수하였다. 호위(扈衛)하여 성천(成川)에 이르렀을 때에 꼭 품결해야 할 군무(軍務)가 있었다. 여러 신하들 중에서 마땅히 행재소(幸在所)에 가뵈어야 하게 되었다. 공의 병은 이미 짙어져 거의 스스로 힘쓸 수 없었으나 달려가 물을 일이 급하기 때문에 공은 자청하여 가게 되었다. 가산군(嘉山郡)에 이르러서 병이 위독하게 되어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10월 10일이다. 향년(享年) 49세였다. 임시로 그곳 군 경계에 매장하였다가 적이 조금 물러난 때에 배천(白川) 땅에 이장하였다. 뒤에 그곳은 흙이 얇고 물이 얕아 무너질 우려가 있어서 용인(龍仁)의 포곡(蒲谷) 묘향(卯向)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공의 자품은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뜻과 행동이 순후하고 독실하였다. 어릴 때부터 제자(弟子) 직분을 부지런히 하여 수행하였으며, 벼슬에 종사하게 된 뒤에도 오히려 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모님을 공양하는 일과 덥고 추운 것을 묻는 일을 한결같이 성의를 다하였다. 찬성(贊成)공이 돌아가시니, 백씨(伯氏)와 중씨(仲氏) 섬기는 것을 찬성공을 섬기는 것과 같이 하였다. 홀로 기거하는 고모(姑母)가 있었는데 또한 어머니처럼 섬겼다. 종족의 무리를 대우하는 것이 지극히 은의가 있었으며, 외롭고 가난한 친척을 구휼하는 데는 온갖 성의를 다하였다. 평소의 기거는 장중하게 몸을 가지어 일찍이 경박한 얼굴을 하는 일이 없었다. 남을 접대할 때에는 또 겸손하고 온화하며 즐겁고 상냥하게 하여 겉치레의 형식을 버렸다. 우아한 성품이 맑고 조용하여 함부로 남과 사귀지 않았다. 그가 더불어 벗으로 한 이는 다 한 때의 바른 사람들이었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퇴근하면 다시 책을 펴 학문을 익혔다. 선현의 격언(格言)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이를 실천하였으며, 더욱 절실한 것은 기록해 두었다가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할 수 있도록 하였다. 논어(論語)를 가장 좋아하여 이를 손수 베껴 써두었다가 고요한 때면 매양 단정히 손을 모으고 앉아서 펴 보았다. 경연에 나갔을 때는 강설을 정확히 하여 온갖 성의를 다하였고, 대각에 있어서는 지론이 공평하여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았다. 사람을 사랑하고 또 불쌍히 여겨 항상 이들을 구제하고 남을 이롭게 해주는 것으로써 한 평생의 마음으로 하였다. 일찍이 영남지방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변방의 백성을 원래의 곳으로 돌려보내는 조처가 있었다. 사실을 조사해 밝히는 일이 실지대로 되지 않아서 원망해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는 듯하였다. 공이 조정에 돌아오는 날 즉시 본 바를 가지고 나아가 아뢰어 완전히 석방된 자가 많았다. 공이 마음을 가다듬어 행동을 규제하고 절개를 극진히 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 그의 벼슬과 수명이 도리어 그의 덕에 비하여 차지 않으니 보시(報施)의 이치를 논하는 자가 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구나!
공이 돌아가신 후 13년이 지났을 때 조정에서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의 훈호(勳號)를 추록(追錄)하였다. 아들 호공(好恭)·호선(好善)도 또한 모두 녹훈(錄勳)되었으니 법으로 당연히 추은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여러 번의 증직이 영의정에 이르러 석명(錫命)의 영광이 지하에까지 미치니, 이때에 이르러 전자에 ‘보시지리(報施之理)’를 의혹스럽게 여기던 자도 또한 조금은 의혹을 풀게 되었다. 공의 배위(配位)는 한(韓)씨니 사헌부 감찰(監察) 경상(景祥)의 따님이다. 유덕한 이의 배우자이고 어진이의 어머니로서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으며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추봉하였다. 처음에는 고양(高陽)에 장례를 모셨다가 뒤에 옮겨서 공의 무덤에 부장하였다.
아들이 8인이 있으니, 장남 호약(好約)은 생원으로 참봉에 제수되었고, 호공(好恭)은 직강(直講), 호관(好寬)은 군수(郡守), 호선(好善)은 즉 목사(牧使)이고, 호서(好恕)는 정랑(正郞)으로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호제(好悌)는 진사이다. 호검(好儉), 호문(好問)은 일찍 죽었다.
딸이 5인이니 장녀는 한기(韓頎)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참판 남이신(南以信)에게, 다음은 이영복(李榮復)에게, 다음은 참의 유효립(柳孝立)에게, 다음은 정문건(鄭文建)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아들 1남을 낳았으니 호익(好益)이다. 참봉 호약이 3녀를 낳았는데 이유(李油)·이시화(李時華)·김전(金壂)에게 시집갔다. 직강 호공이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 언찬(彦瓚)은 진사이고, 다음은 언욱(彦頊)이며, 다음은 언숙(彦璛)인데, 참봉 호약의 후사(後嗣)가 되어 공의 제사를 받든다. 다음은 언영(彦瑛)이다. 딸은 좌랑(佐郞) 조길(曺佶)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군수 호관이 1남을 낳았으니 언황(彦璜)으로서 진사이다. 목사 호선이 3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언유(彦瑜), 다음은 언원(彦瑗)이니 진사이고, 다음은 언벽(彦璧)이다. 딸은 진사 안헌징(安獻徵)에게 시집가고 한 사람은 어리다. 진사 호제가 2남 2녀를 낳았으니 남은 언경(彦瓊)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아아! 선인의 응보가 여기에 있구나. 그 후사들이 어찌 이렇게도 빼어나고 번성할까. 명(銘)하여 이르기를,
이미 온화하면서도 곧으며, 이미 민첩하면서도 정하였도다.
행실이 돈독하여 그 베푼 것이 정사에 미쳤네.
하늘은 아름다운 품성 흡족히 내려 주었는데, 어찌 그의 수명에는 그렇게 인색하였던고.
하늘은 어찌 정한 이치 없으리! 기를 주어 권병을 잡게 하였다네.
내가 공의 뜰 바라보니 평평하고도 넓구나.
그 뜰엔 무엇이 있는가? 난초가 무성하게 싹트니 자손이 번성하여 옥같이 빼어났네.
하늘 일러 정한 이치 없다고 하는 자들이여! 여기 와서 이 경사를 보라
저렇게 번성하고 복이 있으니 어찌 상서가 아니며 어찌 귀하다 하지 않으리오.
포곡의 언덕 기슭에 맑은 물 흐르는데
옥돌에 새긴 비문 우뚝하구나. 이 앞을 지나는 자 반드시 공경하리라.
만력(萬曆) 47년(1619년) 10월 일
가의대부 전행 성균관 대사성 정경세(嘉義大夫前行成均館大司成鄭經世)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