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개방한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서울 李允濯 한글靈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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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조선 중종 때 승문원 부정자를 지낸 이윤탁 선생의 묘 앞에 서 있는 비로, 묘의 훼손을 경계하는 내용이 한글로 적혀 있다. 비는 사각의 받침돌 위에 비몸만을 세워둔 간결한 구조로, 비몸의 윗변 양쪽을 비스듬하게 다듬었다. 서쪽면에는 한글 30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윤탁의 셋째 아들인 이문건이 글을 짓고 글씨를 새긴 것이다. 비 뒷면에 새겨진 기록으로 미루어 중종 31년(1536년)에 비를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9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글씨는 한글창제 당시와 똑같은 글씨에 서민적인 문체로 쓰여져 있다.남아있는 ‘한글비’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아직 한글이 널리 사용되지 못했던 시기에 과감히 ‘한글묘비’를 세웠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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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전면]
권지승문원(權知承文院) 부정자(副正字) 이공(李公) 휘(諱) 윤탁(允濯)과 안인신씨(安人申氏) 적(籍) 고령(高靈)의 합장(合葬) 묘
[후면]
[전액]고비묘갈음지(考妣墓碣陰誌)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계공랑(啓功郞)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이공부군(李公府君)과 안인(安人) 고령신씨(高靈申氏) 부인(夫人) 묘갈(墓碣)
고애자(孤哀子) 문건(文楗)이 비문을 쓰다. 부군(府君)의 휘(諱)는 윤탁(允濯)이고, 자는 탁지(濯之)이며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아버지는 가선(嘉善) 행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증직된 휘 숙생(叔生)이고,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김씨(金氏)는 군수를 지낸 일지(日知)의 딸이다. 시조(始祖) 농서공(隴西公) 장경(長庚)이 조년(兆年)을 낳았다. 고려 때 벼슬하였는데 직간(直諫)을 잘하여 세상에 명성을 날렸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문열은 시중(侍仲)을 지낸 포(褒)를 낳았고, 포는 인민(仁敏)을 낳았고 그는 휘 직(稷)을 낳았다. 그는 조선을 도와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봉되고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으로,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낸 사후(師厚)를 낳고 부윤은 휘 함녕(咸寧)을 낳았다. 그는 문과에서 장원하고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를 지냈는데 그가 바로 선군(先君)의 조부이다. 첨지중추(僉知中樞)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윤완(允浣)․윤식(允湜)․선군(先君)이다.
천순(天順) 임오년(세조 8, 1462) 10월 경인일에 태어났다. 천품(天稟)이 단정하고 완숙하며,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다. 지절(志節)을 숭상하며 정도(正道)에 맞게 처신을 하고, 남을 대할 때는 의리로써 하였다.
계묘년(성종 14, 1483)에는 두 형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독서를 좋아하여 역경 속에서도 학문에 힘썼으며 교유하는 이들은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어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근성(覲省)하는 날 외에는 언제나 편안히 쉬는 날이 없었으니 공이 뜻을 독실히 하고 힘써 실행함이 이와 같았다. 문장이 뛰어나고 재주가 있었으나 운수가 비색(否塞)하여 정사년(연산군 3, 1497) 가을에는 아내의 상을 당했고, 홍치(弘治) 신유년(연산군 7, 1501) 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에 제수되니 모두 장래를 기약하였다. 불행히도 그 해 12월 26일에 병으로 집에서 작고하니 향년 40세였다. 평소의 포부를 펴보지 못한 채 죽은 것을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어머니의 부친은 휘(諱)가 회(澮)이며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지냈고 모친은 숙인김씨(淑人金氏)로 감사(監司) 자행(自行)의 딸이다. 조부는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중주(仲舟)이고 증조부는 좌부빈객(左副賓客) 장(檣)이다. 판관은 승준(承濬)과 승조(承澡) 두 아들을 두었고 계미년(세조 9, 1463) 3월 정유일에 서울에서 어머니가 태어나셨다.
무술년(성종 9, 1478)에 결혼하여 아내가 된지 24년 동안 선군(先君)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2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았는데 어머니가 39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성품이 부지런하고 간결하여 거짓을 용납하지 않았고 정성껏 제사를 받들었다. 타고나신 자애로운 마음을 다하였으나 가르칠 때는 매우 엄격하였으며 음식과 의복도 반드시 단정하게 하여 구차스러운 곳이 없었다. 갖은 역경 속에서 모든 자녀들의 혼사(婚事)를 마쳤으나 다섯 자녀가 모두 질병과 재난에 시달렸고 또 불초자(不肖子)는 큰 죄를 지었다. 가정(嘉靖) 을미년(중종 30,1535) 정월 5일에 작고하시니 향년 73세이셨다. 아, 우리 부모는 어질면서도 장수와 복록을 누리지 못하였으니 슬프다. 그 해 4월 4일에 양주(楊州) 노원(盧原) 율이호(栗伊岵)의 서쪽 끝 갑좌경향(甲坐庚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선영(先塋)이 국용(國用)에 가깝다 하여 이듬해 봄에 이곳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누님은 금화사별제(禁火司別提) 이해(李瀣)에게 시집갔으나 과부가 되었고, 둘째 누님은 사인(士人) 박옹(朴㙲)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다. 백형(伯兄) 홍건(弘楗)은 성품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계유년(중종 8, 1513)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빙고별제(氷庫別提)를 지냈다. 첨사(僉使) 권징(權澄)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煇)를 낳았는데 진사 김석(金錫)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중형(仲兄) 충건(忠楗)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학문에 힘써서 경오년(중종 5, 1510)에 진사가 되고 을해년(중종 10, 1515)에는 문과에 올라 청요직(清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기묘년(중종 14, 1519)의 사화(士禍)에 연좌되어 헌납(献納)으로 재직 중 파직(罷職)되었다. 이조정랑(吏曹正郎) 이효언(李孝彦)의 딸에게 장가들어 염(爛)을 낳았고 염은 급제(及第) 김헌윤(金憲胤)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딸은 김효성(金孝誠)에게 출가하였다. 신사년(중종 16, 1521)에 백형의 부부와 중형이 모두 돌아가셨다.
막내아들 문건(文楗)은 계유년(중종 8, 1513)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자년(중종 28, 1528) 가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로 있는 동안에 아내 상을 만났으며 사인(士人) 김언묵(金彦默)의 딸에게 장가들어 온(熅)을 낳았다. 딸은 아직 어리다. 머리를 조아리고 통곡하며 삼가 명(銘)을 올린다.
부모님의 은덕은
하늘보다 땅보다도 높고 깊어라
부모 잃은 서러움을
천지(天地) 향해 울부짖네
이곳 묘지 굳고도 편안하거니
하늘처럼 땅처럼 무궁하리라
애달프게 비는 이 마음
뒷사람 부디 저버리지 말기를
가정 15년 병신(중종 31, 1536) 5월 세웠다.
[우측면]
불인갈(不忍碣)
부모를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누가 부모 없는 사람이 있어서 차마 이 비를 훼손할 것인가. 비를 훼손하지 않으면 묘(墓)도 범(犯)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세(萬世) 후라도 화를 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좌측면]
영비(靈碑)이것은 신령스런 비석이다. 이를 범하는 사람은 재화(災禍)를 입을 것이다. 이는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윤탁 · 안인 신씨 묘갈
권지승문원 부정자 이공 윤탁과 안인 신씨 적 고령 합장 묘비.
[동측면]
불인갈
부모를 위하여 이비를 세우다. 누가 부모 없는 사람이 있어서 차마 이 비를 훼손할 것인가, 비를 훼손하지 않으면 묘도 범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만세 뒤에도 화를 면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측면]
영비
이것은 신령스런 비석이다. 이를 범하는 사람은 재화를 입을 것이다. 이는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
[후면]
고비묘갈음지(전제)
유명 조선국 계공랑 권지승문원부정자 이공부군, 안인 고령신씨 부인 묘갈. 고애자 문건 서.
부군의 휘는 윤탁이며 자는 탁지고 본관은 성산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 행첨지중추부사에 증직된 휘 숙생이고, 어머니 정부인 김씨는 군수를 지낸 일지의 따님이다.
시조 농서공 장경이 조년을 낳았다. 고려조에 벼슬하였는데 직간을 잘하여 세상에 명성을 날렸다. 시호는 문열이다. 조년은 시중을 지낸 포를 낳았고, 포는 인민을 낳았고, 그는 다시 휘 직을 낳았다. 직은 조선조를 도와 개국공신에 책봉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이다. 문경공은 한성부윤을 지낸 사후를 낳고, 부윤은 휘 함녕을 낳았다. 그는 문과에 장원하고 집현전 교리를 지냈는데, 그가 바로 선군의 조부이다. 첨지중추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윤완, 윤식과 선군이다.
부군은 천순 임오년 10월 경인에 태어났다. 천품이 단엄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고 지절을 숭상하였으며, 정도에 맞게 처신을 하고 남을 대할 때는 의리로써 하였다.
계묘년에 두 형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독서를 좋아하여 역경 속에서도 학문에 힘썼으며, 교유하는 이들은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어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근성하는 날 이외에는 언제고 편안히 쉬는 날이 없었으니, 공이 뜻을 독실히 하고 힘써 실행함이 이와 같았다.
문장이 뛰어나고 재주가 있었으나 운수가 비색하여 정사년 가을에는 내상을 당했고, 홍치 신유년 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에 임명되니 모두들 장래를 기약하였는데 불행히도 그해 섣달 26일에 집에서 병으로 작고하니 향년 40세였다. 평소의 포부를 펴보지도 못한 채 죽은 것을 모두들 애석하게 여겼다.
어머니의 부친의 휘는 회로서 한성판관을 지냈고, 모친 숙인 김씨는 감사 자행의 딸이다. 조부는 지순창군사 중주이고 증조부는 좌부빈객 장이다. 판관은 승준과 승조의 두 아들을 두었고, 계미년 3월 정유에 서울에서 어머니를 낳았다. 무술년에 결혼하여 내조를 한 24년 동안 선군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2녀 3남을 낳고, 어머니가 39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성품이 부지런하고 간결하여 거짓을 용납하지 않았고, 정성껏 제사를 받들었다. 천성이 자애로웠으나 가르칠 때는 매우 엄격하였으며 음식과 의복은 반드시 정갈하게 하여 구차스러운 데가 없었다. 갖은 역경 속에서 모든 자녀들의 혼사를 마쳤으나 다섯 자녀가 모두 질병과 재난에 시달렸고 또 불초자는 큰 죄를 지었다. 가정 을미년 정월 5일에 작고하시니 향년 73세이다.
아! 우리 부모처럼 어진 사람이 장수와 복록을 누리지 못하였으니 슬프다. 그해 사월 상리에 양주 노원 율이재의 서쪽 끝 갑좌 경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선영이 국용에 가깝다 하여 이듬해 봄에 이곳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누님은 금화사 별제 이해에게 시집갔으나 과부가 되었고, 둘째 누님은 사인 박옹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다. 백형 홍건은 성품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 계유년에 진사가 되었고 빙고별제를 지냈다. 첨사 권징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를 낳았는데, 휘는 진사 김석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중형, 충건은 총명하고 민첩하며 학문에 힘써서 경오년에 진사가 되고 을해년에는 문과에 올라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기묘년의 사화에 연좌되어 헌납으로 재직 중 파직되었다. 이조정랑 이효언의 딸에게 장가들어 염을 낳았고, 염은 급제 김헌윤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딸은 김효성에게 출가하였다. 신사년에 백형 부부와 중형이 모두 세상을 떴다.
막내 아들 문건은 계유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자년 가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시강원 사서로 있는 동안에 내상을 만났으며 사인 김언묵의 딸에게 장가들어 온을 낳았다. 딸은 아직 어리다. 머리를 조아리고 통곡하며 삼가 명을 올린다.
부모님의 은덕은 하늘보다 땅보다도 높고 깊어서, 부모 잃은 서러움을 천지 향해 울부짖네. 이곳 묘지 굳고도 편안하거니, 하늘처럼 땅처럼 무궁하리리라. 애달프게 비는 이 마음, 뒷사람 부디 저버리지 말기를.
가정 15년 병신 5월 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