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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대군이방번신도비(撫安大君李芳蕃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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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 비는 1695년에 건립된 무안대군이방번신도비(撫安大君李芳蕃神道碑)로,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었으며, 이방번의 11세손이 글씨를 썼으나, 이름이 마멸되어 알 수는 없다 이방번(李芳蕃)은 조선 태조의 일곱째 아들이며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소생이다. 부인은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의 딸이다. 1392년 조선의 개창으로 무안군에 책봉되어 의흥친군위 절제사 · 의흥삼군부 좌군절제사를 지내며 태조를 보좌하였다. 처음에 세자로 책봉될 예정이었으나 배극렴(裴克廉) · 조준(趙浚) · 정도전(鄭道傳) 등의 반대로 세자위가 이방석(李芳碩)에게 넘어갔고, 1398년 이방원(李芳遠)이 주동한 1차 왕자의 난 때 피살되었다. 1437년 세종의 배려로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與)를 후사로 정하였으며, 1680년 영춘추관사 김수항(金壽恒)의 상소로 무안대군에 추증되었다.묘는 처음에 도진릉동(道津陵洞)에 있었다가 광주 학당리산으로 이장되었으며, 1474년 다시 광수산(光秀山 : 강남구 수서동)으로 옮겨졌다. 시호는 장혜(章惠)이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치우봉조하 송시열 찬. 십일세손 □ 근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판의금부사 신기상 전.
우리 태조 강헌대왕은 고려조에 재상을 지냈고, 예를 갖추어 판윤 강윤성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이남을 낳았다. 방번은 고공랑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 귀족 가문의 체례였다. 둘째는 방석이다. 홍무 임신년에 태조대왕이 조선을 건국하였고, 부인도 고황제의 고명을 받아 왕후가 되어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
태조대왕이 여러 왕자들을 봉작할 때에 방번과 공정대왕(恭靖大王) 및 공정대왕(恭定大王)은 봉호를 함께 받았으니, 이른바‘무안군’은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며, 이어 방석이 세자가 되었다. 이듬해 계유년에 영군관직을 개편하여 태종대왕이 삼군부 중군절제사가 되었고, 무안군이 좌군절제사가 되었다. 무안군이 일찍이 병을 앓았을 때 태조대왕이 친히 집에까지 가서 문병하였다. 병자년에 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신덕’이라 시호 하였다. 이년 뒤인 무인년에 태종대왕이 정도전, 남은 등을 죽일 때 세자인 방석까지 함께 죽였으니, 무안군 또한 면할 수가 없었다. 이 때 나이 열여덟이었다. 태조대왕은 두 어린 왕자의 죽음을 슬퍼하여 여러 번 절에 행차하여 시주를 하고 명복을 빌었다. 영락 사년에 태종대왕이 휼전을 베풀어 옛 세자는‘소도’, 무안군은 ‘공순’이라 시호를 내리고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정통 정사년에는 세종대왕이 광평대군으로 공순의 후사를 잇게 하고 ‘추성군’이란 작호를 더하였다. 하사한 제문을 보면,
은혜가 이미 친족의 우애를 두터이 하매,
예 중에서 후사를 잇는 것보다 중한 일이 없어라.
경은 존속의척으로서 불행히도 후사가 없으니,
외로운 혼령이 어디에 의탁하겠는가?
내 마음에 측은히 여겨 고전을 상고하여 읍호를 올리고,
광평대군 여를 후사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이제 사자에게 변변치 않은 사례를 올리네.
이는 특별한 성의이오니
아! 영령이시여 만약 계신다면 오래도록 흠향하소서.
아! 여러 대왕들이 대군의 죽음에 대하여 측은히 여기고 받듦은 매우 극진한 것이었다.
뒤에 강정경황제가 문종대왕의 시호를 ‘공순’이라 하였기 때문에 공의 시호를 고쳐 ‘장혜’라 하였다. 애당초 공이 경복궁에서 나올 때 태종대왕이 공의 손을 잡고, 위로의 말을 하며 간곡히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공이 양화도에 이르렀을 때 부마 이백경 등이 이미 죽었다고 복명하였으니 이때가 무인년 8월 29일이었다. 처음에는 통진의 능동에 장사지냈다. 이곳은 태조가 왕이 되기 전에 있었던 곳이다. 뒤에 광주 서쪽 학당리 산에 이장되었다. 홍치 갑오년에 이곳은 또다시 성종대왕의 능침이 되었으므로 다시 광주의 광수산으로 옮기고 부인 왕씨와 함께 합장하였다. 왕씨는 전 왕조의 종성으로서, 곧 공양왕의 모제인 정양대군 우의 따님이다. 삼한국대부인에 봉하여졌다. 어머니는 순화옹주 노씨이다. 정도전 등이 모든 왕씨들을 죽일 때에 정양대군은 부인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고, 봉호를 ‘귀의군’이라 고치고 숭의전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부인은 홍무 정사년에 태어나서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 동안 태종대왕이 여러 번 미두를 하사하였고, 세종대왕도 직전 일백 결을 하사하고 광평대군을 후사로 삼게 하였으니 자손을 보고 편안히 복록을 누렸다 하겠다.
신덕왕후는 애당초 경성 안에서 장례를 치뤘다가 뒤에 동성 밖에 이장하였다. 그 뒤로 제사를 올리는 일이 차츰 소홀하여졌는데, 부인이 매년 철마다 손수 제물을 마련하여 가마를 타고 가서 제사를 올리곤 하였다. 이 때문에 광평대군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제사가 끊어지지 않아서, 선조가 묘소를 새롭게 할 때에도 광평대군 집에 있었던 옛 노비의 힘을 빌어 찾을 수 있었다. 현종대왕 때 그곳을 호위하고 주위를 정비하니, 건원릉의 짝이 될 수 있었다. 옛 호를 회복하여 ‘정릉’이라 하고, 다시 신주를 만들어 태묘에 배향하였다. 이러한 일은 효성스런 성왕들이 소홀했던 예를 거행하여 조종을 빛낸 것이기도 하지만 부인의 지극한 정성이 미리 도와준 것이니, 그 또한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추전에는 미진함이 있었다. 금상 경신년에 영의정 김수항이 건의하여 아뢰기를, “이미 ‘정릉’ 이란 옛 호를 회복하였으니 무안군의 품질을 그대로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고 하자 주상이 옳다 생각하고 마침내 대군호를 추증하니 부인도 ‘개성부부인’으로 품질이 올랐다.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올렸으며 소도공에 대하여도 이와 같이 하였다.
시호에 대한 주석을 보면 “온화하게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이 ‘장’이고, 너그럽고 인자함이 ‘혜’이다.”
아! 공과 같이 훌륭한 덕을 갖춘 분이 나라의 운명이 새롭게 일어날 즈음에 간신들의 흉계만 없었더라면 형제끼리 옛 주문왕의 아들들처럼 우애 있게 지냈을 것이고, 뒤에라도 험악한 자들의 잔인한 짓만 없었더라도 동해 송왕처럼 부귀를 누려서 양조가 인자와 우애의 덕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 하늘에 사나운 기운이 생겨 이런 몹쓸 무리를 내어 우리 왕후의 성대한 덕화를 어그러지게 하였단 말인가! 그러나 하늘의 도가 인을 내려 여러 성왕들이 특별한 은전을 거듭 베풀었으니, 왕족이 복종하지 않는다고 하여 멀리 내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으로 족히 구천에 있는 슬픈 혼령을 위로 할 수 있고, 본조의 인후한 뜻이 또한 족히 길이 나라의 명을 기약하는 기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 아름답구나.
지금에 공의 구세손 선이 전후 사적을 모아 묘소 앞에 비석을 세우려하므로 내가 간략하게 그 시말을 적었다.
숭정 기원 후 67년 갑술 12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