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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치신신도비 및 묘소(黃致身神道碑 및 墓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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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1488년(성종 19)에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지유리에 건립된 황치신(黃致身)의 신도비이다. 비문의 찬은 김종직(金宗直)이 하였고, 안침(安琛)이 글씨를 썼다.황치신(1397∼1484년)은 희(喜)의 아들로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맹충(孟忠), 초명은 동(董)으로 태종이 동중서(董仲舒)가 다시 났다고 해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태종에게 불려나가 이름을 하사받은 뒤 음보(蔭補)로 공안부부승(恭安府副丞)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 이름이 형제들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다시 치신이라 고쳐 하사받고, 곧 사재직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454년(단종 2)에 중추원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하성절사(賀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도진무사(都鎭撫使)를 겸하였다. 1461년에는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나 남의 노비를 빼앗은 죄목으로 파직되었다가, 1466년 동지중추부사 겸 도총관으로 복관되어 1479년(성종 10)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호안(胡安)이다.조선 초 공신의 자제로 문음으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나 이후 계속 승진을 거듭하여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니, 조선 초 공신 후예들의 정치적 동향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비문이다.
본 왕조가 일어선지 백여 년이 되가나 그 사이에 태평시대의 어진 재상이라 부를 수 있는 분은 겨우 한두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이 중에서도 방촌(厖村) 황 익성공(黃翼成公)을 으뜸으로 치는 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사람들은 귀천을 불문하고 그와 같이 칭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맹자가 일찍이 "소위 ‘고국(故國 : 옛날의 국가)’이라는 것은 교목(喬木 : 높고 큰 나무 - 시경(詩經) 소아(小雅) 벌목(伐木) 장에 나옴)이 있는 것을 일러 말한 것이 아니라 세신(世臣 : 여러 대를 이어서 공훈을 쌓은 신하)이 있음을 일러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익성공의 자손과 같은 분들은 진실로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구덕(舊德 : 아버지가 쌓아 놓은 덕)에 누를 끼쳐 이를 더럽히지 않았으니 그 소생을 일러 세신(世臣)이라 하는 데 있어서는 무릇 어느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하리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호안공(胡安公)이 즉 그러한 분이다. 공(公)의 휘(諱)는 치신(致身)이며 자는 맹충(孟忠)으로 남원부(南原府)의 장수현(長水縣)에서 그 계보를 이어왔다. 황증조(皇會祖)의 휘는 균비(均庇)인데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賛)을 증직 받으셨다. 황조(皇祖)의 휘는 군서(君瑞)로서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를 지내고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을 증직받았다. 이 강릉공(江陵公)께서 영의정부사 세자사(領議政府事世子師)를 지내시고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을 증직받은 휘 희(喜)를 낳으셨으니 이분이 바로 익성공(翼成公)이다. 어머님 양씨(楊氏)는 청주인(淸州人)으로 전서(典書) 진(震)의 따님이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하여졌다.
공은 바로 익성공 황희(黃喜)의 장자인데 태어날 때부터 우뚝하여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나이 겨우 5ㆍ6세가 되었을 때 기우(騎牛) 이(李)선생께서 공을 보고는 감탄하여 이르기를 진실로 뛰어난 인물이라 하였다. 점차 자람에 미쳐서는 스스로 학문을 닦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태종 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께서 이 소문을 들으시고 익성공에게 이르기를“경의 아들이 공부하기를 힘쓴다하니 가히 중서(仲舒 : 동중서(董仲舒))의 문하생이라 해도 부끄럽지 않으리라.”하시고는 인하여 동(蕫)이란 이름을 내려주시고 공안부 부승(恭安府副丞)을 제수하였으며 후에 지금의 이름을 내려주시었다. 사재직장(司宰直長)으로 오르고 후에 여러 번 옮기어 사섬주부(司贍主簿) 사헌감찰(司憲監察) 호조좌랑(戶曹佐郎) 사온서령(司醞署令)을 거쳤다. 이 동안의 공에 대하여는 전부 다 현명하게 일을 잘 처리 한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선덕(宣德) 병오년(세종 8, 1426년)에 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郎)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권세가들이 백성들을 점탈하여 노예로 삼는 송사가 50여 년 동안이나 적체되어 있었다. 공께서 일을 맡은 1개월도 못되어 송사를 판결하여 이들을 양민의 호적으로 환원시켜 주니 백성들이 기쁘게 여겼다. 다음해에는 서반직(西班職)으로 세자익찬(世子翊賛)을 겸임하였고 후에 문자 판통례문사 겸 상서 소윤(文資判通禮門事兼尙瑞少尹)으로 옮기었다. 계축년(세종 15, 1433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며 곧 일이 있어 면직되었다. 그러다가 을묘년(세종 17, 1435년)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으며 곧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옮기었다. 무오년(세종 20, 1438년)에는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 : 종2품)로 올라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가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옮기었다. 임금께서 공이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데 능하여 세간의 비난이 없다는 말을 들으시고 공의 인물됨을 중히 여기어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제수하였다. 이전부터 내려오는 관례에 따르면 조정에 진상하는 공물은 토지의 소유에 의하여 구분하지 않고 수령의 편의에 의하여 백성들에게 부담량을 책임지었는데 이것은 백성들에게 폐해가된 지 이미 오래였다. 공께서는 부임하자 즉시 조정에 이의 시정을 건의하여 그 토지의 생산량에 따라 납세하도록 하여 백성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임기가 만료되어서는 경창부윤(慶昌府尹)에 임명되었고 이어 형조 호조의 참판(刑戶曹參判)으로 옮기었다. 갑자년(세종 26, 1444년)에는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 : 정2품)로 승차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임명되었다. 무진년(세종 30, 1448년)에는 정경부인(貞敬夫人)께서 돌아가셨으며 임신년(문종 2, 1452년)에는 익성공(翼成公)께서 돌아가셨다. 상례를 마치자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임명되고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로 선발되어 연경(燕京)에 갔다. 건국이래로부터 여러 차례 중국의 조정에 송사(宋史)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지금까지 허락받지 못하였는데 공이 간절하게 이를 주청하여 마침내 비부(秘府)에 있는 한 질을 얻어 돌아왔다. 이때 세조(世祖)께서 잠저(潜邸)에 있었는데 노산군(魯山君 : 단종(端宗))에게 아뢰어 이 사실을 종묘(宗廟)에 고하고 공에게는 안장을 갖춘 말과 종관(從官) 1계급을 더하여 주었다. 다음해에는 본래의 관직에다 도진무(都鎭撫)를 겸하였다. 천순(天順) 정축년(세조 3, 1457년)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어 형벌을 고르게 하고 사졸들을 어루만지시니 옛 명장(名將)의 위풍이 있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즐겨 하루는 병술을 익히러 사냥하러 나갔다가 활을 쏘아 짐승을 관통시키고 말라죽은 나무 그루터기에 박혀 뺄 수가 없었다. 군사들이 이를 보고 탄복하여 이광(李廣 :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 궁술과 기마술이 뛰어난 장수. 어느날 저녁무렵 이광은 홀로 초원을지나다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활을 쏘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의 화살이 바위에 꽂혀 있었다 함. 사기(史記) 참조)의 돌을 뚫은 솜씨도 공보다는 능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공이 인순부윤(仁順府尹)에 임명되었다가 인수부(仁壽府)로 옮기었고 신사년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 : 종1품)로 승급되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올랐으나 얼마 되지 않아 관직을 파직당하고 수년간을 한가로이 지냈다.
성화(成化) 병술년(세조 12, 1466년)에 공의 아우 열성공(烈成公)이 하루는 공을 찾아왔는데 공은 종자(從者)로 하여금 몰래 정원에 가서 감을 따오게 한 후, 형을 맞이하여서는 같이 감을 먹으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우리 함양촌장(咸陽村庄)에서 생산된 것이라 하였다. 공은 감을 드시면서 그 맛을 극구 칭찬하였다. 동생이 집으로 돌아간 뒤, 정원에 있는 감이 모두 없어진 것을 보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두 형제는 이와 같은 해학(諧謔)을 즐기는 일이 많았다. 이때 세조께서 영응대군(永膺大君 : 세종의 8남)의 집에 행차하시어 이 소문을 들으시고는 영응대군에게 이르시기를 “우리 형제도 이와 같이 우애가 있어야 할 것이라.”하시며 공을 동지중추부사 겸 도총부도총관(同知中樞府事兼都摠府都摠管)으로 임명하시니 이때 공의 춘추는 70세이었다.
이에 치사(致仕 : 벼슬을 그만둠)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무자년(세조 14, 1468년)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 : 종1품)로 승진하였다. 지금의 임금(성종)께서 즉위하신 후 여러 차례 사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왕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다. 기해년(성종 10, 1479년)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에 또 사직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경연사관(經筵史官)을 보내어 관직에 나가기를 타이르셨다. 다음해인 갑진년(성종 15, 1484년)에 병으로 집에서 돌아가시었다. 왕께서 슬퍼하시어 2일간 조회를 보지 않으시고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공은 홍무(洪武) 정축년(태조 6, 1397년)에 출생하였으니 이때는 우리 태조께서 개국하신지 6년이 되는 해였다. 공은 88세의 나이를 누렸다. 공의 성격은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항상 근신하였고 일곱 임금(7朝)을 섬기는 동안 지위가 높고 덕망이 중하였으며 절의가 한결같았다. 세상을 산 나이는 익성공에 비하여 겨우 2년이 모자랐다. 세조께서 순행하실 때에는 반드시 공을 유도장승(留都將丞)으로 명하시고는 칭찬하여 말하기를 나의 곽자의(郭子儀 : 곽분양(郭汾陽). 중국 당대(唐代) 중기 숙종(肅宗)의 무장(武將))라 하시었다. 충신으로써 장수를 누리고 자손들의 벼슬이 번성하므로 곽자의(郭子儀)와 비긴 것이리라. 공은 진실로 훌륭한 왕조의 세신(世臣)이라 할 것이로다. 첫째 부인은 종부판사(宗簿判事) 김기(金祺)의 따님을 취하였고 둘째 부인은 급제(及第) 황상(黃象)의 따님을 취하였다. 9남 5녀를 두었다. 황사친(黃事親)은 마전군수(麻田郡守)요, 황사장(黃事長)은 무과에 합격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있고, 황사현(黃事賢)은 중부록사(中部錄事)이며, 황사형(黃事兄)은 무과시험에 합격하여 사헌감찰(司憲監察)로 있으니 이들은 모두 김씨의 소생이다. 황사충(黃事忠)은 진위현령(振威縣令)이고, 황사효(黃事孝)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지금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으로 있으며, 황사공(黃事恭)은 무과시험에 합격하여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있고, 사의(黃事義)는 일찍 죽었고, 황사경(黃事敬)은 무과시험에 합격하여 내금위(內禁衛)에 있으니 이들은 모두 황씨의 소생이다. 김씨의 장녀는 검조참의(檢曹參議) 우효신(禹孝新)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판관(判官) 채담(蔡潭)에게 출가하였다. 황씨의 장녀는 사복첨정(司僕僉正) 안효경(安堯卿)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호군(護軍) 이구경(李九經)에게 출가하였으며, 삼녀는 승좌랑(丞仕郎) 신숙증(申叔橧)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손(內外孫) 남녀 무릇 56명이고, 증손(曾孫) 남녀 무릇 51명이며, 공의 다섯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공에게는 대광보국 승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 경연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를 증직하였고 부인에게는 세미 20곡(斛)을 하사 하시었다. 공의 장례를 치룬지 4년이 되었는데 사인(舍人)이 숭선(嵩善) 김종직(金宗直)에게 찾아와 묘비를 청하니 사양하였으나 결국 뿌리치지 못하고 드디어 명을 지었도다. 명은 다음과 같다.
씩씩하도다. 황공이여
그 명성 난정곡(鸞停鵠)처럼 우뚝하고 빛났도다.
강릉공의 손자이시며
익성공의 아들이로다.
걸출한 인품이겠는가?
그 덕도 이에 짝하였도다.
어려서 학문 익혀 동중서(董仲舒)를 바랐도다.
왕께서 이를 듣고 이름 하사하였도다.
하늘이 내린 활솜씨 빼어나니 이광인들 당할손가
화살 한번 날리면 백발백중 아님이 없네.
지방 관리가 되어 백성 신원 벗기니
민심 아니 기뻐할손가.
중국에 그 이름 떨치니 멀리도 뻐쳤도다.
두표(斗杓 : 북두칠성의 자루)의 우뚝한 광명과 같이.
판조(版曹)의 여러 벼슬에 임명됨이 몇 번이었던가.
경조부(京兆部)의 어려운 일 맑게 처리하였도다.
수많은 백성 공을 우러러 보네.
외관으로 나가 지방을 다스리니
바다같은 넓은 마음 어린 백성 적셨구나.
백성 무거운 짐 벗었도다.
변방에는 도둑과 노략질이 없어졌도다.
미루어 오던 송사기전(宋史紀傳)
수백 질이 넘는구나.
공이 가서 받아오니 천자께서 주셨구나.
태묘에 이를 바쳐 고하였도다.
무거운 상 그 이름도 혁혁하구나.
아우 열성공과 더불어 즐김에
우애가 참으로 돈독하였도다.
정원의 감으로 해학(諧謔)을 즐기니
그 화락한 기운 사방에 넘치도다.
그 소리 조정에 들렸도다.
임금의 형제 이로써 화락 약속하였네.
왕께서 순유하실 때,
반드시 공께서 호위의 책임자로 삼았네.
공을 일러 곽자의(郭子儀)에 비유하였네.
공의 그 한결같은 충과 신이여!
이로써 자손을 교육하여 조정에 그 자손 가득하구나.
좋은 길일이면
자손들 모여 화락을 나누었네.
삼달(三達)과 오복(五福)은
사람마다 갖추기 실로 어렵도다.
그러나 우리 공이 모두 갖추었네.
옛날 어느 책에서도 이런 일 볼 수 있었던가?
훌륭하신 원로의 학과 같은 흰 백발,
조정대신 그 위품 우러러 보았네.
맹자께서 말씀하신 세신(世臣)은 그 누구인가?
그 바로 공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여러 번 머리 숙여 물러나길 빌었도다.
그러나 왕께서 만류하여 보내지 않았구나.
공의 세상 하직하심이여!
왕의 은총 지극하시었도다.
이 또한 슬픔 속에 경사 아니겠는가?
무릇 공의 행적 후인에 전하여
영원히 전하도록 도모하지 아니하리오.
홍치(弘治) 무신년(성종 19, 1488년) 8월 일에 비를 세우다.
행형조판서(行刑曹判書) 김종직(金宗直)은 글을 짓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안침(安琛)은 글씨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