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지당)

영릉의 연지

조선시대의 풍수지리사상은 음택(陰宅)풍수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는 왕릉의 연지(蓮池) 조성과도 연관이 있다. 옛 사람들은 양택인 경우에 그 혈장(穴藏)이 넓어야 하고 음택인 경우에는 혈장이 꽉 짜이게 입구가 좁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왕릉의 입구는 오므라진 산세를 하고 있는 곳이 많다. 오므라들지 않은 곳은 기(氣)를 보충하기 위해 인공산[假山]을 조성하거나 숲과 연못[池塘]을 조성하기도 했다.


연지는 태조 건원릉(健元陵)에서부터 고종의 홍릉(洪陵)까지 20여기에 조성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멸실되었다. 현재는 영릉(英陵), 장릉(莊陵), 광릉, 효릉, 장릉(章陵), 숭릉, 건릉, 융릉, 홍릉洪陵 등 9기 능에 11개소 연못이 보존되어 있다. 동구릉과 서오릉, 서삼릉처럼 능역이 넓은 곳에는 능역 바깥에 특별히 외연지(外蓮池)를 두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건원릉 “동구(洞口)에 오래된 연못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메워졌다”는 내용이 있고 『춘관통고』에 “동구 밖에 연지가 있는데 길이 70자, 넓이 52자이며 매년 수리하고 못 속에 섬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의 연지가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구릉 숭릉(崇陵)의 연지는 능역 초입에 설치된 연지이다. 국가유산청은 2010년~2014년 동안 숭릉 연지의 발굴조사를 실시했으며 이를 통해 조선왕릉 연지의 축조기술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곤신지와 천년지

융건릉에는 두 종류의 연지가 있다. 융릉의 곤신지(坤申池)와 건릉의 천년지(千年池)가 그것이다. 연지로 특정한 이름을 가진 곳은 융건릉이 유일하다.

곤신지의 축조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융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객사에 포함되어 있던 연못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하며, 승정원일기에는 “정조 15년(1791)에 동구(洞口) 3군데의 연못에 돌로 쌓고, 곤신지의 석축을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곤신지에는 5개 구역에 연꽃이 심어져 있으며 주변의 경관이 연못에 투영되는 영지(影池)의 기능도 하고 있다.

건릉의 천년지는 장방형의 연지로 원형의 섬에는 소나무가 식재되어 있다. 건릉의 하천은 천년지의 동측으로 흐르며, 일정 수위가 되면 남동측으로 흘러 하천으로 유입되어 석교[內禁川橋]로 흘러나가게 된다. 이 석교는 현재의 건릉 재실 앞 구도로 아스팔트에 묻혀 있는 외금천교와 연결되는 동선으로 제례동선의 진입공간에 천년지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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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의 연지

영릉의 연지

영릉의 연지

영릉의 연지

영릉의 연지

영릉의 연지

장릉(章陵)의 연지 전체 모습

장릉(章陵)의 연지 전체 모습

장릉의 연지

장릉의 연지

장릉의 연지

장릉의 연지

홍유릉의 연지

홍유릉의 연지

홍릉의 지당

홍릉의 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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