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
조선왕릉 신도비는 후대 왕이 선왕의 치적에 대해 기록해 숭모의 예를 표현하고자 했던 석비조각의 하나이다. 신도비는 거북이 한 마리가 비신(碑身)을 받치고 비신 위에 여의주를 받들고 몸이 뒤섞인 용을 조각한 이수(螭首)의 형태인 귀부이수(龜趺螭首)형이다. 이러한 형식의 석비조각은 중국 당나라때 정형화된 형태가 통일신라시대 석비(石碑)조각에 영향을 준 것으로, 이후 고려 승려들의 탑비(塔碑)형식으로 계승되어 조선왕릉 신도비에 이른 것이다.
조선시대 왕릉에서 신도비는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건원릉, 제릉, 헌릉, 구영릉 4곳에만 건립되었다. 이는 15세기 건립 당시부터 선왕에 대한 숭모의 예를 표현하고자 하는 국왕과 왕의 치적이 국사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도비를 별도로 세울 필요가 없다는 신료들의 입장이 대치되어, 이후 신도비가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왕릉 신도비 건립 현황
해당 능/주인공 | 능 조성연대 | 신도비 조성연대 | 지정종목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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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建元陵) /태조 |
1408년 (태종8) |
1409년 (태종9) |
보물 | |
제릉(齊陵) /태조 원비 신의왕후 |
1391년 (공양왕3) |
1404년 (태종4) |
(북한소재) | 임진왜란 시 파손 1744년 재건된 비만 현존 |
헌릉(獻陵) /태종·원경왕후 |
1420년 (세종2) |
1422년 (세종4) |
보물 | 임진왜란시 파손 1695년 중건된 비와 함께 현존 |
구 영릉(舊 英陵) /세종·소헌왕후 |
1450년 (문종즉위) |
1452년 (문종2) |
보물 |
건원릉의 신도비는 능이 조성된 직후인 1409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체 높이는 448cm에 이른다. 비석의 이수는 총 네 마리의 용이 몸을 뒤엉긴 채 두 발을 내린 자세로 조성되었다. 귀부 아래에는 연꽃문양의 2단 기단을 추가하였는데, 다른 왕릉의 신도비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례이다. 비신의 비문은 당대의 명문장가인 권근(權近, 1352~1409)이 짓고, 음기(陰記)는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 지었으며, 글씨는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이 쓴 것이다.
세종의 구 영릉 신도비는 1469년 영릉을 천장할 때 신도비는 옮기지 않고 땅속에 매장하였다가, 이후 1937년에 이화여대 박물관이 발굴하여 현재 세종대왕 기념관 후원에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구 영릉 신도비는 발굴되기 전에도 두 번에 걸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는 1691년 오랜 장마로 구 영릉의 토사가 침식하여 노출된 것으로, 당시 숙종은 신도비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다시 묻기를 명했다. 그 후 1738년(영조 14) 글자 확인을 위해 다시 발굴했지만 명확하지 않아 다시 매장하였다.
구 영릉 신도비는 비석 표면의 마모가 심하지만 이수 조각에는 조성 당시의 역동적인 형태가 남아있다. 이수 조각은 두 마리 용이 불규칙하게 뒤엉켜있는 상단부와 달리 용의 꼬리는 좌우 대칭을 이루며 S자형으로 조각되어 비신 상단 좌우측면까지 늘어진 형상이다. 이러한 구 영릉 신도비의 이수는 15세기 초반에 조성된 건원릉 및 구 헌릉 신도비에서 변화된 모습으로, 15세기 왕실 석비 양식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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