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실
재실은 조선시대 왕릉에서 제례를 올리고 산릉을 관리하기 위한 장소였으며, 구체적으로 제사를 주관하는 헌관이 머무는 공간이자 제사에서 소용되는 물품을 보관하고 준비하는 복합적인 공간으로 기능했다. 조선시대에는 왕릉 뿐 아니라 종묘를 비롯한 사묘건축 및 궁궐 내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되는 전각 주변에도 재실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왕릉 재실은 담장과 대문이 있어 주위 공간과 엄격히 분리된 독립적인 영역이었으며, 향대청과 전사청, 집사청 등의 부속건물이 독립된 명칭이 아닌 재실(齋室)로 통칭되는 특징이 있다.
왕릉 재실은 의례가 갖는 길(吉)·흉(凶)의 성격에 따라 정재실(正齋室)과 가재실(假齋室)로 나뉘어 조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선왕이 승하한 후 3년상을 마칠 때 까지를 흉례(凶禮)로 규정하였으며, 이를 위한 공간이 가재실이었다. 가재실은 흉례 후 철거되었으며, 이후에 돌아가신 선조에 대해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길례(吉禮)로 규정하고 이 기간에는 정재실을 사용하였다.
조선왕릉 재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의 왕릉 의례정비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재실은 17칸의 규모에 능 아래 동남쪽에 위치해야 했다.
그러나 1788년(정조12) 『춘관통고』에 헌릉 재실은 24칸으로 기록되어, 재실의 규모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재실은 규정에 따라 축조되어 능마다 차이가 크지 않았던 정자각과 달리 각 능별 규모가 달라, 조선왕릉 건축물 가운데 가장 변화가 큰 건물이었다.
조선전기 재실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예가 없고, 전란으로 인해 사료가 소실되어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세종 영릉(英陵) 재실의 경우 2006년 추정 건물터의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1786년 재실을 수리했을 때의 기록인 『영릉향대청전사청재실이하제해수개등록』이 남아있어, 조선 전기 재실의 구조와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영릉 재실은 안향청으로 향하는 곳에만 대문을 두고 다시 중문을 통해 좌우로 나가도록 한 구조이며, 이 밖의 건물이 병렬로 배치되어 조선후기에 단순한 형태로 이루어진 재실 구조와 차이를 보인다.
임진왜란 후인 17세기에 들어서면 전란으로 인해 이전 재실의 형태를 따르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로 인해 재실은 일정한 배치원칙을 두지 못하고 자유로운 공간구성을 보였으며, 점차 재실 운용에도 변화가 생겨 새로운 형태의 재실이 등장하게 되었다. 17세기에 처음으로 조성된 장릉(長陵)에서는 기존에 왕이 거처하던 어재실(御齋室)을 별도로 조성하던 것에서 어재실을 안향청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1674년에 조성된 현종의 숭릉(崇陵) 재실은 어려워진 나라 살림을 고려해 기존에 22개월만 사용하고 철거했던 90여칸 규모의 가재실을 50여칸 규모로 대폭 축소하고 그 기능의 일부를 정재실로 옮겨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미 조성된 능에 합장 할 경우 이전에 만들어졌던 정재실이 길례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기존과 같은 90여 칸 규모의 가재실을 축조하였다.
재실은 영조연간 의례의 정비와 정조연간의 조사를 통해 19세기에 이르면 더욱 간소화되었다. 1800년(순조즉위)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에서는 「재실간가도」가 최초로 등장했는데, 영·정조연간 재실 정비의 결과가 반영된 한편 이후 지속적으로 「재실간가도」가 그려지면서 일정한 형식을 갖춘 재실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결과를 낳았다.
가재실(假齋室)
조선시대 왕릉에서는 제례를 올리고 산릉을 관리하기 위한 공간인 재실(齋室)이 조성되었다. 왕릉 재실은 왕릉 의례의 성격에 따라 가재실(假齋室)과 정재실(正齋室)로 나뉜다. 가재실(假齋室)은 산릉에서 장례가 행해져 3년상을 마칠 때까지의 흉례를 준비하는 공간을 가리킨다. 3년상 기간 동안 제례를 주관하고 제물을 만드는 여러 사람들이 머물고 작업하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가재실은 90여 칸이 넘는 규모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상이 끝나면 철거하는 임시 건물이었기 때문에 지반을 다지거나 초석을 놓지 않은 임시로 지은 집[假家]의 형태로 건축해 쉽게 철거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가재실은 사방에 행랑을 만들어 방과 창고, 부엌 등을 연속해서 배치하였다. 내부 공간에는 수릉관(守陵官), 전례감방(典禮監房), 시릉관(侍陵官), 참봉(參奉) 등이 거처하는 입점처, 참봉방, 진지내관방, 충의방 등의 숙소가 있었다. 제물숙설처, 수라간, 감선청, 공상봉상청 등 제물을 만들고 관리하는 공간도 있었으며, 제기(祭器), 은기(銀器), 사기(砂器) 등의 그릇을 준비하는 공간이나 반감방(飯監房), 증색방(蒸色房), 탕색방(湯色房), 병공방(餠工房), 적색방(炙色房), 면공방(麵工房) 등 음식을 만드는 공간도 있었다.
여주 영릉 재실
조선 제17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에 제사를 위해 1674년(현종 15)에 세운 재실(齋室)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재실은 제관(祭官)의 휴식, 제수장만 및 제기 보관 등의 제사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왕릉의 부속건물이다. 재실의 가장 중심 건물은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이며, 그 옆에 제관이 머무는 재실이 있고 제수 장만 등을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등이 있다. 각각의 건물은 별도의 행랑이나 울타리로 둘러싸여 공간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영릉 재실은 조선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원래 안향청, 집사청, 전사청, 참봉청, 행랑, 침가(砧家)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몇 차례 변형을 거쳐 현재는 안향청, 집사청(현 제기고), 참봉청(현 재실), 제기고(현 행랑채부속동), 행랑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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