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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음선대고성박씨묘표(梧陰先代固城朴氏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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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1575년(선조 8)에 세워진 고성박씨(固城朴氏)의 묘표(墓表)이다. 당시 경상관찰사로 부임한 윤근수(尹根壽, 1537~1616)가 그의 고조모인 고성박씨를 위해 세운 묘표이다. 고성박씨(1414~1487)는 아버지가 지합천군사를 지낸 박취신(朴就新)이고, 어머니는 덕수이씨로 공조참의를 지낸 이양(李揚)의 딸이다. 해평윤씨 진무부위(進武副尉) 윤연령(尹延齡)에게 시집가서 8남 1녀를 낳았다. 남편이 죽고 난 후 서울에서 살았는데 1456년(명종 1)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 때 사위 박대년(朴大年)이 박팽년(朴彭年)의 동생이라서 죽고 딸도 노비가 되는 등 집안이 화를 입게 되자, 관직에 있는 장남 계정(繼丁)을 빼고 나머지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경상도 상주에 내려가 대대로 살게 되었다. 윤근수는 고조모의 묘만 선영인 경기도 장단(長湍)에 있지 못하고 상주에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글을 지어 비석을 세운 것이다.
고성박씨(固城朴氏) 묘표
현손(玄孫)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윤근수(尹根壽)가 글을 짓다.
우리 고조모 박씨는 세계가 고성(固城)에서 나왔다. 자헌대부 사헌부대사헌 보로(寶老)의 증손이고 통정대부 황주목사 전고(專古)의 손이다. 아버지 취신(就新)은 중훈대부로 지합천군사를 지냈으며 어머니 덕수이씨(德水李氏)는 통정대부 공조참의 양(揚)의 따님이다.
박씨는 유순하고 아름다우며 단정하고 선량하였다. 시집갈 나이가 되어 우리 고조부 진무부위(進武副尉)에게 시집오셨으니 이름은 연령(延齡)이고 성은 윤씨이니 8남 1녀를 낳으셨다. 장남 계정(繼丁)은 무과에 올라 관직은 장원서장원에 이르렀고 다음은 우정(遇丁)·말정(末丁)·예정(禮丁)·순정(順丁)·필정(弼丁)·찬정(贊丁)·은정(殷丁)인데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진무공이 일찍 별세하시고 박씨는 홀로 서울에 살았다. 병자(1456, 세조 2)의 옥사(단종복위사건)를 만나 문과에 급제한 사위 박대년(朴大年)이 박팽년(朴彭年)의 동생이라고 연좌되어 죽었으며, 관청에서 그 재산을 몰수하고 딸 윤씨 또한 노비가 되니 집안의 화가 매우 비참하였다. 이에 자식들을 데리고 상주(尙州)의 고향에 돌아와 거주하였고 장가안간 자식들도 모두 고향에서 배필을 가렸다. 이 때문에 내외 후손들이 상주와 인근의 고을에 흩어져 살게 되어 지금은 매우 번창하였고 오직 장원공의 후손만 계속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박씨는 영락 3년 갑오년(1414, 태종 14)에 출생하여 성화 33년 정미년(1487, 성종 18)에 별세하였으니 수명이 74세였다. 경기도 장단은 실로 우리 선조들의 장지인데 별세하실 때 길이 멀어서 이곳에 모셔 장사지내지 못하고 상주 외서리(外西里) 유천동(有川洞)에 합천군사의 묘 옆에 장사지냈다.
아아! 마땅히 지아비와 부묘(祔廟)해야 하는데 함께 묻히지 못하였으니 우리 후손들이 때에 맞춰 장단에서 성묘를 할 때면 마음이 항상 슬프다. 그러나 상주도 실은 고향이요, 체백(體魄)이 이미 이곳에서 평안하고 또 선영의 옆에 의탁할 수 있었으니 또한 섭섭함은 없을 것이다.
우리 윤씨는 그 선대가 선산(善山)·해평(海平)의 이름난 성씨이다. 석(碩)은 고려 때에 이름이 나서 우정승을 지냈으며 해평부원군으로 시호는 영의(英毅)이다. 지문하성사 해평군(海平君) 충간공(忠簡公) 지표(之彪)를 낳으시고 충간공은 문하찬성사 예문관대제학 문평공(文平公) 진(珍)을 낳으셨으며 문평공은 창(彰)을 낳으셨으니 조선조에 들어와 양주도호부사가 되셨다. 양주공이 양성현감(陽城縣監) 증 가선대부 경창부윤 달성(達成)을 낳으셨으니 양성공이 바로 우리 고조부 진무부군의 부친이시다. 우리 증조부 장원공은 통례원 좌통례에 증직되었고 조부이신 사용(司勇)을 지낸 희림(希琳)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부친 군자감정 변(忭)은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니 모두 둘째형 두수(斗壽)가 귀해졌기 때문에 추증 받은 것이다. 두수는 지금 호조참의로 있다.
불초손 근수(根壽)는 후손에게 남긴 복을 외람되게도 이어 받아 이 도(경상도)에 와서 안찰하게 되었고 이미 고향의 여러 후손과 함께 묘역에 절하고 제사를 올렸다. 또 점점 편평해지고 무너지는 것을 걱정하여 이에 흙을 더하여 봉분을 높였는데 작자에게 글을 구하지 못하여서 감히 세계(世系)를 대략 서술하며, 또 고조부 묘 앞에 표시한 것이 없기에 아울러 우리 윤씨의 세계를 위와 같이 서술하여 비석에 새기니 그 영구하기를 바라노라.
명하노니,
철성에서 명망 있어 높은 지위로 벼슬에 나아가니 대대로 이은 가문의 영광이로다.
우리 훌륭한 부인을 기르시니 아름다운 그 행동, 능히 부녀자의 도리를 지켰네.
외롭게 홀로 되시니 서리와 이슬 여러 차례 바뀌도록 정성으로 제사지냈도다.
어렵고 힘든 때를 만나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을 떠나니 남쪽 땅 이곳에 이르렀네.
수많은 자손들이 집안에 널리 퍼져 있으니 남기신 은택이 있음이구나.
유천리(有川里) 산기슭, 물은 깊고 산은 푸르니 넉넉함을 길러 상서로움을 쌓았네.
덕을 상고하여 명을 지어 유택에 밝게 드러내니, 천년이 가도록 영원히 편안하소서.
만력 3년(1575, 선조 8) 9월 일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