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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신도비(李璜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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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생부인 전계대원군 이광(1785~1841)은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과 전산군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큰형인 상계군 담(湛)은 1786년 홍국영의 음모와 관련되어 자살하였고 어머니와 형수가 천주교 신자로 처형되었고 은언군도 1801년에 사사되었다. 역적의 아들로 연좌 유배되어 강화도에서 평생을 불우하게 살았다. 16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셋째 아들인 원범(元範)이 왕으로 즉위하였고 이어 전계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비문은 왕명에 의하여 조두순이 짓고 1856년에 묘를 이장하면서 세웠으니 현재의 포천시 선단동에 있다.현재 탁본은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시기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이광신도비
어필 대원군지비
유명조선국 전계대원군 신도비명 병서
숭록대부행병조판서 겸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 실록사
신 조두순은 교서를 받들어 글을 짓는다.
기유년 6월 9일 우리 주상전하께서 대비의 뜻을 받들어 들어와서 대통을 이으니 종묘사직과 백성의 주인이 되셨다. 이에 출생하신 근본에 대해 재상과 예신(禮臣)에게 자문하여 본가의 아버지를 전계대원군으로 추봉하고 모든 축호와 제사의 법식은 송나라 복왕과 수왕및 우리나라 덕흥대원군의 전범을 하나같이 준수하여 혹시라도 어긋나지 않도록 하였다. 또 묘소가 잘 정비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내외간을 정돈하니 여러 관련 부서가 바쁘게 일을 수행하여 그 다음해 원년에 일을 마치고 마쳤다는 것을 고묘한 뒤에 태사인 조두순에게 묘소의 일을 기록하는 일을 명령하시니 황공하고 두려워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내려주신 행록을 살펴 다음과 같이 글을 짓는다.
대원군의 성은 이씨요, 이름은 광, 자는 창강이니 은언군 인의 다섯 번째 아들이며 장헌세자의 손자요, 영종대왕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전산군부인 이씨이니 을사년(정조 9, 1785년) 3월 21일 경오일에 태어나서 신축년(헌종 7, 1841년) 11월 2일에 자택에서 별세하셨으니 춘추는 57세이다. 양주 신혈면 은언군의 묘소 옆 남향언덕에 장사지냈다.
어려서부터 효도와 우애를 하늘이 내려 주었고 인자함과 후덕함은 천성으로 이루어져 놀면서도 밥을 먹을 때나 잘 때나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은언군이 강화도에 귀양 갔을 때 하늘에는 큰 비가 와서 방안에까지 넘쳐 나는데 단지 한명의 하인이 먼저 은언군을 모시고 언덕에 배를 대었고 대원군은 울면서 소리쳐 형들을 구해서 함께 왔으니 이때 나이 겨우 세살이었다. 칠 팔세가 되어서 풍채가 의젓하며 순수하고 돈독한 기운이 있어 부모님이 매우 사랑하였다.
매번 은언군이 임금과 부모를 생각하여 탄식하고 울적해 하면 문득 온화한 목소리와 유순한 얼굴로 혹은 새새끼를 희롱하고 혹은 왔다 갔다 소매를 벌리지 않고 걷는 형상을 하며 한때 나마 마음을 풀어드리고 위로하여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을 여러 가지로 하였다. 정조임금이 승하하자 은언군은 상심하여 통곡하고 물 한모금도 가까이 하지 않으며 이르기를 “대인께서 대행의 뒤를 좇아가시려 하니 우리들도 또한 당연히 따라야 할 것이다. 다만 늙은 어머니가 살아 계시어 서로 소식이 없는지 지금 15년이나 되니 오직 이치에 어긋날까 걱정하실 것을 홀로 생각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유년(1801년 : 은언군과 그 부인 송씨에게 죽음을 내림)의 화가 닥치고 잠시 후 형제가 연이어 위리의 벌을 받게 되었다. 작은형이 역질에 걸리자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이 시종 정성스럽게 봉양하는 것이 지극하였고 끝까지 조금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마멸~ 어머니와 함께 거처하며-마멸- 얼마 뒤에 상을 당하자 애통한 나머지 섶나무처럼 여위어 거의 죽을 뻔 하였으며 상은 전의 상례처럼 치렀다. 임오년 우리 순조임금께서 이 해로 (사도세자의 죽음이후)한 갑자가 지났다고 하여 특별히 용서하여 석방하였고 윤달에 비로소 섬에서 관례를 하였다.
부인은 완양부대부인 전주 최씨이니 학생 수창(秀昌)의 따님으로 원경(元慶)을 두었지만 일찍 죽어서 부인이 없고 욱(昱)은 이씨의 소생이니 ~마멸~ 영평군(永平君)이다. 용성부대부인 용담 염씨는 증 영의정 성화(成化)의 따님으로 이분이 우리 주상전하를 탄생하셨으니 셋째 아들이다.
신이 생각건대 대원군은 왕실의 가까운 친족으로 다난한 시절을 만나 어렵게 고생하고 근심하고 두려운 일을 모두 겪었다. 순조임금께서 천지의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받들어 ~마멸~ 다시 해와 달의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20년이다. 평소 행실이 순박하고 독실하며 경사를 길러 복을 쌓아 우리 성상의 임금이 되시는 운수를 크게 발하였다. 비록 역사책에 대횡(大橫 : 거북점에서 큰 가로무늬가 나타나는 것으로 제왕이 된다는 징조)의 조짐이 실려 있으나 강화도 상관리에서 영엽거(軨獵車 : 가볍고 편리한 작은 수레로 한 무제의 증손인 한 선제를 봉영할 때 쓴 수레)로 모시고 오니 천년에 한번 있는 아름다운 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아아! 어찌 하늘의 운수가 아니겠는가? 우리 태모께서 위기에 임하는 계책이 천하를 ~마멸~ 안정시킴에 이르러 우리를 태산 반석으로 묶어 믿고 좇아 하늘과 백성이 영원히 돌아 갈 바가 되었으니 천하 만세에 말할 수 있음이 그지없을 것이다. 아아! 아름답도다. 명하노니,
훌륭하신 대원군 장헌세자의 손자,
영명한 아드님 그 근원 깊기도 해라.
그 효성과 그 우애로 고생하고 감싸 안으며
더욱 곧음으로 삼가고 착한 일은 반드시 이행하였네.
순조임금의 큰 조화 선조의 뜻을 따라 다만 용서할 뿐이 아니요,
실로 밝고 크게 기틀을 열어 주시도다.
그 밝게 열림 끝이 없어 성인이 들어와 계승하시니
천만년에 하늘의 명령 비로소 이루어지네.
예는 엄숙하여 정은 막히니 옛날 본받을 바 있네.
본받을 것은 무엇인가? 능히 공경하고 성실한 것이라네.
고요한 산소는 이에 편안하고 이에 높으니
영원하고 확고하여 우리에게 번창함을 내리리라.
비석이 이루어진 뒤 6년이 지나 포천의 해룡산 선단리의 남향언덕에 이장을 하여 완양부대부인과 함께 모시니 바로 병진년(철종 7, 1856년) 3월 26일이다. 글을 새긴 비석은 옛날에 세운 것을 쓰고 신 두순(斗淳)에게 비석의 뒤에 사유를 추가로 기록하라고 명하셨다. 중궁전하는 안동김씨로 영돈녕부사 양은부원군 문근(汶根)의 따님이니 신해년(철종 2, 1851년)에 책봉 예식을 하여 비석에 실리지 않았으니 아울러 공경히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