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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원 신도비(朴明源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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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 비는 1790년(정조 14) 경기도 파주에 건립된 박명원신도비(朴明源神道碑)로 정조(正祖)가 직접 비문을 지었고, 비문의 글씨는 안진경(顔眞卿)의 글자를 집자하였으며, 전액의 글씨는 이양빙(李陽氷)의 글자를 집자하였다.
박명원(朴明源 : 1725~1790)의 본관은 반남이고, 자는 회보(晦甫)이며, 호는 만보정(晩葆亭)이다. 1738년(영조 14) 영조의 딸인 화평귀주와 결혼하여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지고, 품계가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이르렀으며, 벼슬은 오위도총부도총관, 장흥부제조, 제용부제조를 역임하였다. 1776년(영조 52)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3차례나 사은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현재 탁본은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20년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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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섭
박명원신도비
유명조선국 수록대부 금성위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 시 충희 박공 신도비명 병서
내가 왕위에 즉위한지 14년 되던 가을에 금성위 박공 명원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리의 학설은 처음 한나라와 진나라에서 시작하여 당나라와 송나라 대 성행하였습니다. 만약에 그 설이 허위인 것이라면 어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와 같이 신봉하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자도 비록 지리의 설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극구 반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자는 깊이 이 설을 연구하여 그 부모의 장례 모시는 땅을 이 지리의 설에 따라 구하였습니다. 또 산릉의 득실을 논하기를, ‘자손으로서 그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장사 지낼 때는 반드시 삼가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편안하고 탄탄하게 영원토록 하여 형체가 온전하고 또한 신령도 편안하여야 그 자손은 번성하고 제사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자연의 섭리이다.’라고 했는데, 그 학설이 황당무계한 것이라면 정자와 주자가 왜 그리 말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원소는 그 얼마나 중한 곳입니까? 오늘의 신하된 자들은 앞으로 만년대계를 생각해서 마음을 쓸 수 있는 데까지 써야 하고, 또 의리상으로도 스스로 숨김이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신이 비록 천지 지리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고 볼 수 있는 몇 가지를 논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잔디가 말라 죽는 것, 두 번째로 청룡의 지세를 꿰뚫는 것, 세 번째로 배후에 물의 형세가 세차게 부딪히는 것, 네 번째로 묘 뒤에 석축을 쌓아 자연의 정기를 끊어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이 네가지 잘못된 곳에 자리를 잡는다면 풍기가 불순하고, 토질이 온전치 못하고 지세는 너무 낮아 물이 고여 웅덩이가 됨은 말할 것도 없으며, 여기에 구렁이 흔적이 여기저기 들어오게 된다면 더욱 놀라고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신이 술사에게 들은 말이지만 그곳의 형국이 잘 짜여 있지 않은 것이 아니고 안대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수의 법으로 따질 때는 지가가 크게 꺼려하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한 말이 만에 하나라도 그럴싸한 점이 있다면 성궁이 어떻게 되고, 나라가 정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갑오년(영조 50, 1774년)에 처음으로 원소를 배알하신 후로 병신년(영조 52, 1776년) 즉위 후까지 생각이 모두 원소의 안부에 있어 새벽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밤에 촛불을 켜 놓으시고 침소에서 항상 편안하지 못하셨는데도 곁에서 들으니 수년 동안 어느 한 신하도 전하의 뜻을 헤아리는 자 없었다 하니 신은 적이 이를 개연하게 생각합니다. 옛날 영조 신해년(영조 7, 1731년)에는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무신년 이래로 간격 없는 정분을 내세워 수차 왕께 건의하여 마침내 능침을 옮기게 하여 국가의 존령을 만대에까지 기릴 수 있도록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아! 열성조의 혈맥이 전해지는 것은 오직 성궁에게 달렸고, 3백년 종묘사직의 의탁도 오직 성궁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원소가 편안한 연후에야 성궁이 편안하고, 성궁이 편안해진 연후에야 자손 백대가 편안함을 점지 받을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이른바 종묘에 제사 올리고, 자손을 보존한다고 한 그 말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내가 대신과 재상 및 삼사의 신하들을 불러 그들의 의견을 모아 의문을 떨친 다음 공으로 하여금 수원읍 부근에다 자리를 보아 잡게 하고 그리로 옮겨 모신 것이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곳을 두고 말했던 자가 그 전에도 있었는데, 그도 역시 천재일우의 기회이고, 천리를 가도 만나기 어려운 자리라고 했었다. 그렇게 만나기 어려운 자리에다 우리 가문 억만년 끝이 없을 기반을 잡은 것은 그 공의 정성과 공로 아니었다면 누가 이 일을 해냈겠는가? 내가 그래서, 작년 가을 이후로 그를 은인이요, 공로를 세운 자로 여긴다고 했던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공의 자는 회보이고 본관은 반남이니, 사로왕은 그 시조가 된다. 후대에 와서 문정공 상충이 고려조에서 곧은 절의로 이름났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좌의정 평도공은, 금계군 충익공 동량이 공을 세워 이름을 내고, 금양위 문정공 미는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져서 드디어 우리나라 갑족이 된 것이다. 공의 증조는 태두로 군수를 지냈고, 조부는 필하로 참봉을 지냈다. 아버지는 사정으로 참판을 지냈고, 어머니는 함평 이씨 택상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 을사년(영조 1, 1725년) 10월 21일에 태어나 나이 14세 때 화평귀주를 아내로 맞으면서 금성위에 봉해지고, 여덟 번 벼슬자리를 옮긴 끝에 품계가 수록대부에 올랐다. 그 사이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겸 관태상 전의 선공 사재 장흥부와 제용부의 제조를 제수받기도 했으며, 또 사신이 되어 연경에 세 번이나 왕래하였고, 보문각의 서책을 쓴 공로로 말을 하사받는 은혜를 입기도 했다.
공은 성품과 도량이 간결하고 풍채가 준수하고 단정하였으며 몸가짐이 항상 획일하였다. 말하는데 있어서는 항상 다른 사람을 숭상하였고, 번거로움을 경계하였다. 비록 높은 벼슬 자리에 있으면서도 조용하기가 마치 정숙한 여자와 같았고 담백하기는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이 하였다. 혹 벼슬에 나아가 일을 할 때에는 심력을 다하여 안으로는 그 완벽함에 이르게 하고 밖으로까지 그 혜택이 넘치도록 하니 왕왕 사람들은 공의 능력에는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고고한 충성과 큰 절의는 늠름하게 빛나 마치 열사의 풍도가 있었으며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꺼리지 않고 기어코 다하였다. 화평귀주의 내조 또한 이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착했으니 곧은 것을 같이하고 위태한 것을 도와 엎어지는 것을 부축하였으니 볼 만하지 아니한가? 무진년을 전후하여 공의 부부가 왕실에 수립한 공 크게 빛나니 이는 영원히 인멸되지 않을 것이로다. 공과 같은 사람을 일러 어찌 나라의 공신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부모님을 섬기는데 살았을 때는 사랑으로, 돌아가셔서는 애모함이 마치 어린 아이의 마음 같이 진심으로 하였다. 묘지를 이장하기 위하여 10여년을 두고 기호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힘든 줄 모르고 풍수로 이름난 자만 있으면 비록 미천한 중이라 하더라도 후한 사례를 주어 맞이했다. 형제 사이에도 우애가 돈독하여, 중형이 서거하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폐가 상하고 또 몇 차례에 걸쳐 두 귀가 멀기까지 하였다. 홀로 된 형수가 외롭고 의탁할 곳이 없게 되자 집을 사드리고 또 후사를 세워 뒤를 잇게 하였으며 항상 생계를 염려하여 두루 보살펴 드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조상을 받드는 일에 있어서도 먼 선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원대한 계획으로 자기가 먼저 출자하고 또 일가들을 설득해서 제전을 사서 사당에 제사지냈다.
공의 가정생활은 임금께서 성조가 귀주를 너무 사랑하신 것을 생각하여 귀주가 사제에 가 있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에 부마도 사제에 가 있는 날은 일년에 겨우 8일밖에 안 되었다. 귀주가 죽은 후에도 집의 모양을 귀주가 있을 때와 똑같은 법식을 따라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있으며, 병신년(영조 12, 1736년) 이전에는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갈 때 반드시 귀중의 사당에 가서 안부를 여쭈었다. 처음 귀주가 공에게로 시집갈 때 대군의 옛집이 이현에 있었는데, 그 집을 공에게 주자, 공은 글을 올려 극력 사양하였으므로 끝내는 다른 집으로 바꾸어서 주었고, 혹시 특례로 민전을 주는 경우가 있으면 반드시 명령을 철회하도록 간청하였다. 만약 억지로 주면 첩안만 집에다 간직하고 감히 실물은 받지 않았으며, 그릇이나 노리갯감 중에도 궁중에서 쓰던 오래된 물건이면 반드시 간곡하게 청하여 꼭 돌려보내고 자기 집에다 두지 않았다. 천성이 산과 물을 좋아하여 들 밖에도 작은 집을 짓고 꽃과 대나무 등을 심어 두고는 지팡이 짚고 거니는 것을 보면 맑은 눈동자에 하얀 머리가 마치 세상 밖의 사람처럼 매우 깨끗하였다.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이었지만 많이 마시지는 않고 거나할 정도면 시나 읊조리며 그렇게 늙어갔다.
조정에 있을 때는 대궐에 출입을 삼가는 법도를 지켜 이를 항상 유의하였으며 이것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조금도 실수한 일이 없었다. 무릇 면대할 일이 있을 때에도 여러 의빈들과 함께하지 아니하면 머뭇거리면서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였으며 매번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다가도 대화가 조정의 일에 미치면 반드시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응하지 아니하였다.
공의 아들 상철은 젊은 나이에 대과에 장원하였으나 공은 문을 닫고 대면조차 하지 않으니 조사들이 오히려 마음이 위축되어 매우 근심하였다. 조카 종덕 · 병전도 수십 년간 벼슬자리에 있었으나 한번도 사사로이 전주에 관여하지 않았다. 공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또 전주에도 관여하지 않음이 실로 이와 같았다. 당시는 정파싸움으로 조정의 의견이 사방으로 갈라져 세상이 백번이나 변하고 권문세가의 집안이 후에 대부분 피에 몰려 몰락하였으나 공만은 홀로 이를 면하여 이름을 보존하고 가문을 유지하였으니 이는 공이 항상 조심하고 법을 지켜 스스로 처신을 잘하였기 때문이다.
영조께서 여러 의빈들 중에서 특히 공을 사랑하여 궁궐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은례로 시종일관하셨다. 나의 선군께서도 공을 가장 애지중지하여 어려운 일만 있으면 곧 공에게 가 자문했으므로 공이나 화평귀주나 거기에 너무 감격하여 조정 밖에서는 감히 알지도 못하고 국사에도 기록이 안 된 결점을 보완하고 정성껏 도운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늦게 태어난 내가 어찌 그 속을 다 알 것이며, 또 안다고 한 들 어찌 차마 그 말을 할 것인가? 항상 구슬과 같은 맑은 목소리로 첩지에 비답을 올렸고 그 세밀함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지금에 이르러서까지도 공의 그 모습이 상상되어지는구나! 선희궁의 칭호같은 것도 상소하여 칭호를 바꿀 것을 건의하였으니 이 한가지 일만 보아도 공의 특이한 충성을 알겠도다.
아아! 내가 대리청정을 할 때도 공은 선왕께 다 갚지 못한 은혜를 생각하여 알면서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무슨 일이라도 힘이 든다 하여 꺼려하지 않는 등 공의 행적을 쓰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연경을 갈 때만 해도 계속된 장마로 물이 넘쳐 임진강 길이 막혔으므로 공을 따라간 사람들 모두가 조금 머물자고 만류하였지만 공은, “사행 길은 기한이 있는 것인데, 그러면 나에게 왕명을 풀밭에 버려 버리란 말인가?”하고는 그들 말을 듣지 않고 길을 재촉해 물을 건넜는데, 물도 방해를 하지 못했다. 열하에 이르자 예부가 공을 강요하여 번승에게 절을 하도록 했는데, 공은 그때도 꼼짝 않고 서서 말하기를, “내가 신하로서 외교상 오지 않았다면 나는 능히 너희들에게 무릎을 꿇을 수가 있으나 지금은 사신이니 그럴 수 없다.”라고 하고는 저들이 아무리 꾸짖어도 마침내 굴하지 아니하였다. 또 장례 일을 보살핀 것만 하더라도 내가 공에게, 옛날 영안위와 동양위가 하던 대로만 할 것을 특별히 명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제도에 의빈은 항상 감무를 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병오년(정조 10, 1786년) 왕세자가 죽었을 때 초상에서부터 장례 때까지 심지어 장지 정하는 일까지도 그 모두를 공에게 맡기자, 공은 더위를 먹어 거의 위태로운 상태였는데도 감히 쉬지 않고 더위를 무릅쓰고 동분서주하여 별탈없이 일을 마쳤으니, 이는 모두 공이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실적인 것이다. 그 큼직큼직한 것들이 그러한데 나머지 일들을 논해 무엇하리! 공에게는 작은 영정 두 장이 있었는데, 영조께서 거기에다 어필로 찬을 써주셔서 돋보이게 하셨다. 한평생 독서를 좋아하고 필찰에도 능했지만 특히 시에 능하였다. 저술로는『만정보시집』이 있고, 그 밖에 『연행록』,『열하일기』 등 약간의 책이 있다. 만보라는 호는 바로 내가 공의 집에 갔을 때 공의 집에 지어준 것이다. 공이 만년에 여가를 즐기겠다고 하여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여 내가 특별히 이를 허락하였더니, 마침내 경술년(정조 14, 1790년) 3월 25일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66세였다.
공이 임종할 때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라 은혜를 보답하지 못해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내가 죽으면 국장을 하지 말라.”하고는 자기 사적인 일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었다. 참으로 어질도다! 나도 공의 유지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다만 조문하고 제사드리고 부의를 보내는 것을 항상된 전례에 비하여 조금 더하게 하였고 글 담당하는 신하에 명하여 공의 행장을 짓도록 하였으며 태상시에 명하여 공의 시호를 의논하라 하였다. 5월 16일 귀주의 묘에 합장하였다. 귀주는 영조의 셋째 따님으로 영빈 이씨 소생인데, 그의 효성과 우애에 대하여 영조의 칭찬이 대단하였으며, 나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에서,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든 사람이라고 했으니 여기에서 현명한 규범을 알 수 있다.
공은 형의 아들 상철을 취하여 양자로 삼았으니 지금 문과에 합격하여 부윤으로 있다. 측실에서 아들 종선 · 종현 · 종건 · 종연을 두었고 딸은 장선 · 서근수 · 이건영에게 출가하였다. 상철의 후사는 양자로서 홍수를 두었는데 참봉을 지냈고, 홍수의 아들은 제일이고, 딸은 이희선 · 홍정규에게 출가하였다. 아아! 공의 언행과 공로를 명법에 맞게 명을 해야 할 것이지만, 어느 누가 나보다 공을 잘 알 것인가? 내가 공에 대해 비록 서툰 말이지만 아낄 것인가? 이에 서를 쓰고 명을 한다. 명은 다음과 같다.
박씨의 본관은 금성인데 대대로 벼슬을 이어받아 그 명성 빛났네
공께서 세우신 훈공 금북에 새겨지고 곧기는 옥형과 같았다네
그 꽃다운 명성 계속 유전되어 훌륭한 문장 국가 전책을 맡았는데
공이 그 뒤를 이어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네
선왕께서 아름답다고 칭찬하고 명문의 착한 자손이라고 하여
향기로운 바람 속에 자색 굴레의 말 탈 사람을
거기에서 물색하셨지
공은 그렇게도 진실하여 요조숙녀의 좋은 짝이었고
겉은 유하여도 속은 강직하였으며
어른에게 공손하고 어린이를 사랑했다네
수컷이 암컷을 지키는 분수의 이치를 알아 내가 그에게 가르침 받았지
감히 몸을 굽혀 인사하지 않으리오, 양조의 은혜 그렇게 두터웠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큰 절의 지켜 홀로 천균의 무게를 감당하셨지
높고 높은 저 산봉우리 아름다운 기운이 서려있네
어느 누가 저런 공을 차지할고 성하고도 빛나며 번창하도다.
공이 비록 죽는다 해서 무슨 여한 있을까, 죽어 온 백성 슬퍼하고 살아 영예 누렸으니!
그대의 노고 내 보답하지 못했으니 나는 그대에게 많은 빚을 졌구나
오직 그대를 기리는 돌만이 있어 교룡의 머리처럼 우뚝하구나
공의 행략을 깊이 새겼는데 꾸며댄 말은 절대 없다네
화락한 군자여, 어찌 잊을 날 있으리
숭정기원후 세 번째 경술년(정조 14, 1790년) 월 일 세움.
전자는 이양빙의 글을 모았고, 비문은 안진경의 글자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