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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신도비(洪常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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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세조(世祖)의 아들 이자 성종(成宗)의 아버지인 덕종(德宗)의 부마(駙馬) 홍상의 신도비명이다. 이 비석은 비좌이수(碑座螭首)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이수에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향하여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이며, 비좌에는 복련(覆蓮)과 안상문(眼象紋)이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지만 대부분의 비문은 판독할 수 있다. 찬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 좌의정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글씨와 그림에 능했던 이행(1478~1534)이다. 서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사헌(大司憲) · 경상도감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해서(楷書)에 능했던 김희수(1475~1527)이다.홍상(1457~151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덕종의 딸 명숙공주(明淑公主)와 혼인하여 당양군(唐陽君)에 봉해졌으며,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소이(昭夷)이다.비문의 전반부에는 공(公)의 가계도와 성품, 명숙공주와 혼인하게 된 일화에 관한 내용이며, 중반부에는 관직 생활과 연산군(燕山君)의 미움을 사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제주도까지 귀향을 갔으며, 중종(中宗)에 의해서 복직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후반부에는 공(公)의 장례에 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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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문
김은미
유명 조선국 수록대부 당양군 증시소이 홍공신도비명 병서
봉열대부 수 성균관사성 지제교 이행(李荇)은 글을 짓고,
조봉대부 수 사헌부장령 김희수(金希壽)는 글을 쓰다.
공의 휘는 상(常)이오, 자는 자강(子剛)이니 남양홍씨이다. 홍씨는 고려조에 휘 자번(子蕃)이 있어 충렬왕을 도와 벼슬이 첨의중찬에 이르고 경흥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정공인데 공은 그 후예이다. 고조의 휘는 유용(有龍)으로 증 의정부 좌찬성이오, 증조의 휘는 덕보(德輔)이니 증 영중추부사이며 조의 휘는 심(深)으로 증 의정부 영의정이오, 고의 휘는 응(應)인데 석덕과 중망으로 여러 조정에 걸쳐 정승을 지내고 익대좌리공신에 참록되었으며 벼슬은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고 익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비 안성이씨는 부호군 발생의 따님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용모가 형수하고 신골이 단방하였다. 세조대왕이 명숙공주(덕종의 딸)을 위해 부마를 고르는 중이었는데 공을 한번 보고는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여 가아(佳兒)라 일컫고 드디어 공주에게 장가들게 하니 공의 나이 열 살이었다. 일찍이 보제원에 호가하였는데 내시가 비서를 보고 천화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다가 칭하하면서 임금에게 미열(아첨하면서 기쁜척 함)하고자 하니 공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천화가 아니라 유화다.”라고 하였는데 공은 어려서부터 강정하기가 이와 같았다. 여러 차례 품계가 올라 숭덕대부에 이르고 당양군에 봉해졌는데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대하였다.
소혜왕후(덕종비 한씨)가 건강이 악화되니 공이 내의원의 제조로 시탕하여 병이 좋아지니 성종이 심히 기뻐하여 바로 광덕으로 진계하고 전답과 거기에 딸린 백성을 아주 후히 내렸다. 일찍이 종재(종척과 재신)들을 궐정에서 사연하였는데 충정공은 당시 의정이어서 공과 함께 서대를 띠고 참여하였다. 이때 마침 충정공의 띠에 갈고리가 떨어져 공이 자기의 띠를 풀어서 드리니 임금이 듣고 내고의 서대 한 벌을 하사하였는데 보는 사람마다 영광으로 여겼다.
공은 누차 도총관이 되어 오래도록 금병을 맡았는데 성종은 매번 밀지를 내려 공에게 하유하기를 군정은 추서를 숭상하고 침요를 막아야 한다 했는데 공은 심력을 다하여 임금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려 하였고 명이 떨어지면 원망함이 없으니 장자란 칭호를 들었다. 제조가 되는 것은 나라의 중임을 맡은 바가 많기에 다른 의빈(부마)들은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폐주(연산군) 때에 두 번 진계하여 수록대부에 이르렀는데 수록은 의빈의 극품이라 할 수 있다.
갑자년(연산군 10, 1504년) 사화에 공은 함평으로 귀양갔다가 오래지 않아 안성으로 양이(죄상을 참작하여 근지로 옮겨줌) 되었는데 연산군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아 다시 거제도로 귀향가게 되었다. 이윽고 연산이 공을 원망함이 날로 깊어 기어코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하여 제주에 유배하라 명하였는데 제주는 옛날의 탐라국으로 바다길을 무려 구백리나 건너야 하니 중죄나 대벌이 아니고서는 이런 처치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불측의 화가 곧 조석으로 닥칠 듯하여 조야가 모두 공을 생각하고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조용히 길에 오르고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압송원이 권세를 믿고 능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공은 이연히 받아들이고 기분 나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호라! 곤경에 처해서도 원망하지 않고 화를 당하여도 슬퍼하지 않음은 비록 궁거한 포의로 자수 자립하여 절의에 탁명하고자 한 사람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바가 있을 터인데 하물며 부귀 속에서 성장하고 사치에 익숙해져 한가히 지내며 몸이나 가꾸고 간난이나 궁고한 처지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하루 아침에 애매하고 죄도 아닌 일로 엎치고 덮쳐 빈사상태에서 바다길을 건너 이매와 함께 거처하고(인적이 없다는 뜻) 부질만이 곁에 있는데도 천명인양 편안하게 받아들여 본시 그러했던 것처럼 하였으니 그 훌륭하고 넓은 도량은 천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람이 감히 흉내나 낼 일이던가?
금상(中宗)께서 천조하여 즉시 역마를 내어 소환을 명하였고 양도(전라도, 충청도)의 관찰사에게 노상에서 위로의 잔치를 베풀게 하였으며 특별히 원종공신의 호를 내리고 권우가 유별났으며 절일이나 생일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중사(내시)를 보내서 선온하고 하사품이 잇따랐다. 병이 나니 내의를 보내서 진료하도록 하였는데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이 진도하여 조정과 저자를 이틀간 철폐하고 부증도 다른 때보다 후하게 내렸으며 또 따로 승지를 보내서 조제를 올리게 하였다. 태상(봉상시)에서는 시호를 논의하여 소이(昭夷)라 하였다.
공의 기량은 홍위하나 의도는 화이하였는데 용모도 거기에 걸맞았다. 몸가짐이 근칙하여 부귀한 티를 남에게 보이지 않으니 사람마다 현상으로만 짐작했지 귀한 종척인 줄은 몰랐다. 공은 성화 정축년(1457년, 세조 2년) 정월에 낳아 정덕 계유년(1513년, 중종 8년) 4월에 졸하였으니 향년 57세이다. 공주는 공보다 31년 먼저 졸하였는데 1남을 두어 백경이니 병진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공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역시 공보다 앞서 졸하였다. 백경의 선실 이씨는 우윤 의의 따님인데 1녀를 두어 신홍필에게 출가하였다. 계실 하씨는 장사랑 윤문의 따님인데 자녀는 없다. 공은 정덕 계유년 6월에 양주 아차산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명하기를,
아름답도다! 남양이여, 그 호도 당성이로다.
팔사의 뒤로는 홍씨가 가장 저명했도다.
지난날 고려조에서는 경흥군이 현달했는데,
그 유서 멀리 멀리 충정에게 모아졌도다.
충정의 덕성을 신료들의 의표가 되었더라.
이분이 우리 공을 낳으셨는데 나라의 근친이 되었도다.
작위는 높아 숭반에 올랐고 귀하기로는 의빈이 되었느니라.
교만하지도 않고 인색하지도 않음을 말로만 듣다가
이제야 그러한 사람을 보게 되었네.
중년에 혼란을 겪었는데 비명(非命)의 곤돈(困頓)이였도다.
몸도 해도로 귀향가 죽음의 끝에 달하여
사람들은 두려워 했으나 공의 낯빛 찌푸림이 없었도다.
순리로 받아들였으니 내 몸에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부귀해도 음란하지 않고 위무에도 마음 변하지 않았느니다.
예부터 어렵다 한 것을 공만은 겸해서 간직하였도다.
성명께서 재조(반정)하시고는 역마잡혀 불려 들였는데,
이르기를, 공은 돌아오시오. 빨리도 말고 더디지도 말라.
또 방백에게 명하여 중도에서 맞아 잔치 베풀라 하였느니라.
공은 은명에 감사했는데 권우는 유별났도다.
공이 조정에 돌아오니 임금은 족노라 부르고
노문(위문)과 총사는 앞뒤로 길을 이었느니라.
공에게 이르기를, 오래 오래 살아서 나라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어
어천만년 우유해 보자 하였지.
그런데 병 한번 들자 홀연히 갔는데 갑자가 돌도 못될 줄이야.
구중에서도 진도하시었고, 부증은 더욱 컸도다.
내가 듣자하니 옛사람들은 적선에 여경이 있다 하였는데
공은 뒤도 없고 오래 살지도 못하였도다.
공에게는 무슨 원한이 있으리오만 선만은 행하였으니 내 마음 상하는구려.
덕만은 민멸하지 않는 것, 뒤로 전해짐은 길지어다.
이 명을 묘 앞 네거리에 새기나니
꼭 큰 돌이라야 견고함은 아닐 것이니, 문자의 전해짐에 있을 것이리라.
정덕 기원 9년 갑술 여름 4월 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