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대자대부 정평공(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兵部事 大子大傅 靖平公) 김씨(金氏) 묘지명
김씨의 가계는 신라(新羅) 왕실에서 나왔다. 처음 탈해왕(脫解王)이 밤에 금성(金城)의 서쪽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알아보도록 하였는데, 금빛의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왕이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것을 가져오게 하자, 한 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생김새가 훌륭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며, 이에 데려다 길렀다. 그가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성(姓)으로 삼았다.
2 그후 김씨의 자손이 계속 이어져 왕위에 오른 이가 50여 명이나 된다.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우리 대조(大祖, 太祖)가 군복자락을 휘날리며 장차 통일하려고 하니, 왕은 형세가 힘껏 싸우지 못할 것임을 알고 곧 나라를 들어 귀부하였다.
3 태조가 덕스럽게 여겨 상부 정승공(尙父 正承公)으로 봉하고, 지위를 대자(大子, 太子)보다 위에 두었으며, 장녀 신란공주(神鸞公主)를 처로 삼게 하였다.
4 이전에 만일 경순왕이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워 임금의 군대에 저항하고 세력이 다하여 굴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반드시 그 종족이 짓밟히고 무고한 백성들은 참살당하여 간과 뇌가 땅바닥에 으깨어졌을 것이다. 왕이 이에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이 속한 곳을 있음을 알고 싸우지 않고 항복을 약속하였으니, 나라에는 큰 공을 세우고 인민들에게는 음덕을 주어서, 그 후손이 이 나라에서 반드시 관작과 복록을 누리게 되었다.
공은 그 후손이니, 공의 증조부 한공(漢公)은 공부시랑(工部侍郞)이고, 조부 경보(景輔)는 북면도감판관(北面都監判官)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세린(世麟)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여러 차례 추증되어 사공 상서좌복야(司空 尙書左僕射)가 되었다.
공의 이름은 봉모(鳳毛)인데, 정원(貞元)
5 3년 을해년(의종 9, 1155)에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내시(內侍)에 속하였는데, 임금을 모신 공으로 예빈주부동정(禮賓注簿同正)에 뛰어올랐다. 임진년(명종 2, 1172) 봄에 대구
6위(大丘尉)에 임명되어 나갔다가 이듬해에 다시 내시에 속하게 되었다. 그 때 남쪽 군(郡)에서 초적(草賊)이 크게 일어나자, 임금이 토벌할 것을 명하여 공은 근신(近臣)으로서 종군하였다. 마주 싸우게 되었는데 적이 속임수를 쓰면서 급하게 공격하니, 그 때 병마녹사(兵馬錄事) 이인정(李隣定)이 말을 잘못 몰아 땅에 떨어졌다. 공이 즉시 손을 뻗어 자신이 탄 말에 끌어 올렸으나, 인정이 이미 기운을 잃어서 금방 다시 떨어졌다. 공이 이에 말에서 내리자 적들이 말을 타고 달려와 에워싸서 매우 급하게 되었는데, 공이 잠깐 사이에 말에 올라 타고 칼을 빼어 분연히 공격하였다. 적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물러났으니, 공이 용감하게 싸워 이기는 것이 이와 같았다.
정유년(명종 7, 1177)에 명복궁녹사(明福宮錄事)로 발탁되고, 군기주부 상식국직장(軍器注簿 尙食局直長)을 거쳤다. 경술년(명종 20, 1190)에 춘방통사사인(春坊通事舍人)을 거쳐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고,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올랐으며 잠시 뒤에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로 옮겼다. 위위소경 겸 지합문사(衛尉少卿 兼 知閤門事)에 임명되고, 형부시랑(刑部侍郞)을 거쳐 여러 차례 옮긴 다음 대부경(大府卿)이 되어 동북면지병마사(東北面知兵馬使)가 되어 나갔다.
공은 성품이 신중하고 부지런하여, 무릇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종사하면서 임무를 맡아 잘 다스렸고, 외국의 방언(方言)과 속어(俗語)에 이르기까지 훤하게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신종(神宗)이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하자 금(金)나라의 선문사(宣問使)가 이에 이르러 먼저 전 국왕<明宗>을 알현하고 그 다음에 새 임금에게 명(命)을 알리겠다고 전해 오니, 조정의 의논하였으나 어렵게 여겼다.
7 이 때 공이 이전에 공예대후(恭睿大后)
8가 승하하였을 때 금(大金)의 칙제사(勅祭使)가 따져 묻자 역관(譯官)과 행인(行人)이 아무 말도 못하였으나 공이 능히 마주 대하여 분명하게 밝힌 일이 있었으므로,
9 의논하는 자들이 공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관(館)으로 가서 형편을 보아가며 타이르고, 물음에 따라 대답하고 따지니, 그들이 모두 의심을 풀고 따랐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이 더욱 중하게 여겼다.
무릇 국가의 연향(宴享)과 대례(大禮)에 공을 전례(典禮)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응대하는 것이 민첩하고 행동거지가 자세하고 훌륭하여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며 복종하였다. 그러므로 인진사(引進使)에서 판합사(判閤事)에 이르기까지 무릇 다섯 개의 관직을 거치는 동안 모두 지합문사(知閤門事)를 겸하였다. 계해년(신종 6, 1203) 겨울에 추밀원부사 형부상서(樞密院副使 刑部尙書)에 임명되고, 동지원사(同知院事)를 거쳐 병부(兵部)로 옮겼다.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로 뛰어 오르고, 참지정사 판공부사(叅知政事 判工部事)를 거쳐, 정묘년(희종 3, 1207)에 중서시랑평장사 대자대부(中書侍郞平章事 大子大傅)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이 들자 여러 번 글[表]을 올려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아직 나이가 되지 않았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이 병들고 또한 쇠약해진 것을 염려하여 동중서문하평장(同中書門下平章::TEXT)으로 승진시키고 이에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도록 하였다. 금(大金) 대안(大安)
10 1년 기사년(희종 5, 1209) 6월에 병이 더욱 깊어져서 이 달 29일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몹시 슬퍼하여 사흘 동안 조회를 그쳤다. 시호를 정평공(靖平公)이라 추증하고, 근신에게 명하여 장례일을 돕게 하였다. 이 해 7월 병진일에 대덕산(大德山) 서쪽 기슭에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장례를 지내려 하면서 집안 사람이 ▨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명(銘)하여 이른다.
김씨의 선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神)으로
선원(仙源)은 아득하게 오래되어, 공(功)이 쌓이고 어진 이가 거듭 나오도다.
우리 태조 때에 하늘에 부응하고 인사에 순종하여
그 후손인 경순왕이 싸우지 ▨(않고) 신하로 내부해 오니,
나라에 공이 있고 백성에게 덕이 있어
대대로 이어진 복이 공(公)에 이르러 새롭게 되도다.
지위는 높아 삼태(三台, 三公)에 오르고 나이는 칠순을 바라보았으나
▨▨ 세상을 떠나 이제 참[眞]으로 돌아가셨네.
훌륭한 이름을 전하고자, 명(銘)을 지어 여기 단단한 돌에 새기노라.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 상(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