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백묘지명(崔婁伯墓誌銘)
- 시대
- 고려
- 연대
- 1205년(희종 1)
- 유형
- 묘지
- 재질
- 돌
- 크기
- 높이 40.0cm, 너비 76.0cm, 글자크기 1.5cm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 출토지
- 미상
- 서체
- 해서(楷書)
- 찬자/각자/서자
- 미상 / 미상 / 미상
- 지정사항
- 비지정유산
- 연구정보
개관
최루백(崔婁伯, ?~1205)은 고려 때 수원의 아전 상저의 아들이다. 15살 때 아버지가 사냥 갔다가 범에게 물려죽자 어린 나이에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고 산으로 가서 범을 발견하였다. 배불러 잠이 든 범을 도끼로 쳐서 죽이고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가져와 깨끗한 그릇에 담아 홍법산에 장례 지내고는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 동안 살았다. 그 후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한 것으로 보이는데 묘지명은 결락이 심하여 자세한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그는 효행으로 인하여 『고려사(高麗史)』열전에 실렸고 조선시대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에도 실려 있다. 뿐만 아니라 경기 화성시 봉담면 분천리에는 그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비각이 있는데, 원래의 비각은 봉담면 수기리에 위치해 있었다 하며, 현 위치 일대가 최루백의 사패지(賜牌地)였다고 한다. 현재의 화강암 정려비(旌閭碑)는 조선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앞면에 ‘고려효자한림학사최루백지여(高麗孝子閑林學士崔樓伯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비각 뒤쪽 7m지점에는 최루백의 부 최상저의 유허비 비각이 최근에 건립되어 있는데, 최상저는 수원최씨(水原崔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의 벼슬은 조산대부 국자제주(朝散大夫 國子祭酒)에 이르렀으며, 염경애(廉瓊愛)와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고, 염경애의 사후 다시 재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최루백이 지은 첫 부인 염경애의 묘지명이 남아 있다.
관련 금석문
판독문/해석문
| 해석문 | 김용선 | ||
| 판독문 | 김용선 | ||
| 판독문 | 허흥식 |
참고문헌
| 단행본 | 2012 | 金龍善, 『第五版 高麗墓誌銘集成』, 한림대학교출판부 |
| 단행본 | 2005 | 任世權·李宇泰, 『韓國金石文集成 : 고려12 묘지명5』32, 한국국학진흥원 |
| 단행본 | 2004 | 김용선, 2004, 『고려 금석문 연구-돌에 새겨진 사회사』, 일조각 |
| 단행본 | 2001 | 金龍善, 2001,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 단행본 | 2001 | 金龍善, 2001, 『高麗墓誌銘集成(第三版)』,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 논문 | 1989 | 金龍善, 1989, 「高麗 支配層의 埋葬地에 대한 考察」『東亞硏究』17; 2004『고려 금석문 연구-돌에 새겨진 사회사』, 일조각 |
| 단행본 | 1984 | 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中世上, 亞細亞文化社 |
| 논문 | 1982 | 朴龍雲, 1982, 「高麗時代 水州崔氏家門 分析」『史叢』26 |
| 단행본 | 1976 | 劉燕庭, 1976, 『海東金石苑』下, 亞細亞文化社 |
| 단행본 | 1963 | 李蘭暎, 1963, 『韓國金石文追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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