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용어명 | 철겸(鐵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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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 철겸(鐵鎌)(쇠낫)은 풀을 베고 나무껍질을 벗기거나 전쟁 무기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물을 걷는 도구이다. 철겸은 현재의 낫과 형태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데, 농가에서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였던 필수적인 도구 가운데 하나이다. 풀이나 곡식의 줄기를 베거나 나뭇가지를 치고 꺾어 넘기는 데 사용하였던 도구로 용도 만큼이나 크기와 형태가 다양하다. 크기에 따라 대형과 중형, 소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중 수확에 적합한 것은 중형(날의 길이 17~21㎝)이다. 또한, 기부에 남아 있는 목질을 통해 자루와 인부가 이루는 장착 각도를 추정할 수 있는데, 장착 각도가 85° 이하인 것을 예각 겸, 85~100°인 것을 직각 겸, 101° 이상인 것을 둔각 겸으로 분류한다. 이 가운데 직각 겸이 수확 작업에 적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길고 얇은 철판의 한쪽을 접어 나무자루를 착장하는 방식과 쇠로 된 슴베를 나무 자루에 끼우는 방식이 있다. 청동기 시대 석기에 낫과 유사한 형태가 있으나 그 수가 적어 곡물을 걷는 낫인지는 알 수 없다. 청동기 시대에 대표적으로 곡물을 거두는 도구는 반달돌칼이 있으며, 이는 이삭을 하나하나 따는 도구였다. 철겸의 출현으로 곡물을 줄기까지 한꺼번에 수확하게 되었고 작업의속도가 훨씬 빨라지게 되었다.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철겸은 위원 용연동 유적 출토품이다. 여기에서는 반달쇠칼도 함께 출토되어 용도가 달랐는지, 수확 작물이 달랐는지 알 수 없다. 이와 동일한 형태의 철겸이 완주 갈동 2호 목관묘와 3호 목곽묘에서도 출토되었다. 모두 주조품으로 길이 24㎝ 이상의 대형이며, 기부와 등 부분이 돌출되어 있고, 자루를 장착하는 부분이 약간 파여 있어 날 부분과 구분되고 있다. 이 시기의 쇠낫은 중국 전국 시대 연나라계 쇠낫으로 남부 지역까지 영향을 미쳤으나, 원삼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단조제의 쇠낫이 유행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기원 1세기 이후 쇠낫은 날의 형태에 따라 곱은 날(曲刃鎌)과 바로선 날(直刃鎌)로 분화된다. 철겸은 전 체적으로 날이 직선적인 것에서 곡선적인 것으로, 날의 너비가 넓은 것에서 좁은 것으로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곡물을 수확하는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으며, 이는 농업의 발전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철겸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삼국 시대의 낫은 쇠로 된 날 부분을 나무 자루에 끼워 고정하였으나 이 시기의 것은 요즘의 낫과 같이 슴베도 쇠로 만들어 나무 자루에 박아 사용하였다. 보다 안정된 형태로 철겸을 나무에 고정하여 확실하게 벼 포기를 수확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조선 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된 실물 쇠낫은 화성 장지리 Ⅱ지구 KM004 목관묘 출토품과 진주 무촌리 1구 159호·2구 77호 구덩이무덤 출토품이 있다. 이 시기에는 낫이 곡물을 거두는 농기구로서 널리 사용되어 무덤에 실물을 부장하는 예는 드물고 작은 미니어쳐의 형태로 부장되고 있다. 고양 중산 지구 더부골 고분군은 목관묘군으로, 미니어쳐 철겸을 관(나무널)과 바닥 사이나 요갱(腰坑)을 파서 그 안에 매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철겸은 농기구 외에도 무기로서도 사용된 예가 있다. 삼국 시대 고분에서 쇠칼, 쇠투겁창, 화살촉 등의 무기와 함께 출토되기도 하며, 창녕 교동 89호분에서는 옻칠을 한 나무 집에 다른 무기류와 함께 넣어서 껴묻은 예도 있다. 또한 공주 하봉리 8-1호 목곽묘에서는 창고다리와 함께 철겸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무기의 일종이었음을 알 수 있다.(김재홍) |
| 참고문헌 | 철겸의 변화와 획기(안재호, 가야고고학논총 2, 가야문화연구소, 1997), 한국 고대 농업기술사 연구-철제 농구의 고고학-(김재홍, 도서출판고고, 2011) |
| 구분 | 용어 |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유물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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