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용어명 |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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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 점토대토기는 구연부에 단면 원형이나 삼각형 혹은 타원형의 점토 띠를 덧댄 토기를 일컫는 말로 한글로 순화하여 ‘덧띠토기’라고도 부른다. 구연부에 점토 띠를 덧대는 것은 신석기 시대 말 이중구연토기나 청동기 시대의 팽이 모양 토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점토 띠를 붙이는 수법이나 공반 유물, 출토 유구의 성격 등에서 초기철기 시대의 점토대토기와 확실히 구분된다. 점토대토기(기형은 주로 점토대옹)와 함께 초기 철기 시대에 사용된 주요 토기로는 파수부호, 두형토기, (흑색마연)장경호, 천발, 뚜껑 등이 알려져 있으며 이 중 파수부호와 두형토기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유물의 변화상이 뚜렷해 점토대토기와 함께 연구의 주 대상이 되어 왔다. 점토대토기는 구연부에 덧대는 점토 띠의 단면 형태에 따라 크게 (단면)원형 점토대토기와 (단면)삼각형 점토대토기가 있으며 ‘원형 점토대토기→삼각형 점토대토기’로의 변화는 확실하다. 또 어떤 연구자는 단면 타원형 점토대토기를 원형 점토대토기와 삼각형 점토대토기 사이의 과도기적인 존재로 상정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삼각형 점토대토기의 한 종류로 보고 있다. 이런 원형 점토대토기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1990년대 중국 동북 지방과의 관련성이 지적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즉 원형 점토대토기를 차오양(朝陽), 선양9沈陽), 번시(本溪) 등 요중(遼中) 지역의 영천{량취안(凉泉)} 문화와 직접 연결시킨 것이다. 영천{량취안(凉泉)} 문화는 요중과 요북(遼北) 지역을 중심으로 요령식 동검·선형동부·점토대토기·(흑색마연)평저장경호·두형토기 등으로 구성된다. 이처럼 영천{량취안(凉泉)} 문화와 관련된 한반도의 원형 점토대토기는 기원전 5세기경 한반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등장기의 원형 점토대토기는 환상파수부장경호, 공심형 단각두인데 이런 유물들이 발견되는 곳은 남양주 수석리, 옹진 백령도, 보령 교성리, 안성 반제리 등 중서부 해안 지역이 중심이다. 이후 점토대토기 문화는 한반도 중서부 지방에서 재지계(在地系) 석기 문화를 받아들이는 등 한 번 지역화 되어 강원, 호남, 영남 지방으로 급속히 전파된다. 강원 지방의 강릉 방동리·송림리, 양구 현리 유적과 호남 지방의 화순 대곡리 유적 그리고 영남 지방의 김해 대청, 사천 방지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원형 점토대토기 중에는 구연 바로 아래에 꼭지가 부착된 것도 있는데 이런 형태는 보령 교성리, 청원 비하동, 장수 남양리, 안성 반제리 등 중서부 지방을 중심으로 출토된다. 다만 상주 병성동, 칠곡 심천리, 사천 방지리 유적 등 영남 지방에서 출토된 예가 일부 있다. 이후 영남 지역에서 점토대토기의 꼭지는 삼각형 점토대토기의 등장과 함께 사라진다. 한편 점토대토기의 확산 과정 중 전국(戰國) 연(燕)나라 계통의 ‘연화보-세죽리’유형 철기 문화가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완주 갈동·신풍, 장수 남양리, 익산 신동리 등전라북도 지방을 중심으로 등장한 이후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점토대토기는 영남 지방에서 기원전 200년을 전후하여 점토 띠의 단면이 원형에서 삼각형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를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사천 방지리와 늑도 유적이다. 특히 방지리 유적은 해안의 독립 구릉으로 원형 점토대토기에서 삼각형 점토대토기로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곳으로 앞서 살펴본 꼭지가 부착된 원형 점토대토기도 있다. 삼각형 점토대토기의 영남 지방 등장에 대해서는 신천 명사리 유적에서 출토된 삼각형 점토대토기를 지적하는 연구자가 많았으나 명사리 유적의 삼각형 점토대토기는 늑도 유적 이른 시기의 삼각형 점토대토기보다 형식학적으로 늦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따라서 영남 지역의 삼각형 점토대토기는 사천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원형 점토대토기가 형식학적 변천을 거쳐 나타났을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방지리 유적의 점토대 토기들은 이를 보여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영남 지역의 삼각형 점토대토기는 영남 해안 지역에서 발생한 이후 경주 금장리, 대구 신천동 621-1번지 유적이나 하동 띠밭골 유적처럼 생활 유적에서도 출토되지만 기원전 1세기 대를 중심으로 한 초기 목관묘인 창원 다호리, 대구 팔달동, 대구 월성동, 경주 조양동 유적에서도 와질토기와 함께 출토된다. 초기 목관묘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타날문단경호, 주머니호, 조합우각형파수부호, 두형토기, 삼각형 점토대토기 옹 등인데 이 중 타날문단경호를 제외한다면 다른 기종은 이전 단계에 삼각형 점토대토기와 함께 출토되던 것들이라 영남 지방 초기 목관묘의 주인공이 삼각형 점토대토기 문화와 깊은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영남 지방의 삼각형 점토대토기는 목관묘군에서 소멸하는데 대개 기원전·후의 어느 시기로 보는 편이 적당하며 변한 지역에서 진한보다 약간 늦은 시점까지 잔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삼각형 점토대토기의 분포를 살펴보면 영남 지방은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서도 출토되지만 그 외 지역은 대개 해안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해남 군곡리 패총이나 시흥 오이도, 인천 영종도, 평택 원정리 유적 등이 대표적이며 앞서 살펴본 바처럼 명사리 유적에서도 삼각형 점토대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런 현상은 삼각형 점토대토기가 서북한과 서해안, 남해안을 따라 전파되지만 지역적으로 주류를 형성한 곳은 영남 지역이며, 영남을 제외한 곳에서 삼각형 점토대토기는 간헐적으로 확인될 뿐이다. 한편 점토대토기가 등장한 이후 금속기와 무덤의 변화가 아주 뚜렷하게 확인된다. 등장 직후 기원전 4세기대에 세형동검을 비롯한 한국식 동검 문화가 성립하며 무덤 위에 돌을 쌓은 적석석관묘(혹은 적석목관묘)가 등장한다. 청동 의기는 초기에 방패형동기, 나팔형동기와 조문경 같은 요령식 청동 의기가 나타나지만 이후 정문경과 함께 팔주령, 쌍두령 같은 방울류로 대표되는 한국식 청동 의기가 나타나 성행한다. 한편 기원전 200년을 전후하여전라북도를 중심으로 하여 적석이 없는 목관묘와 함께 연나라의 철기가 등장하는데 철부(鐵斧), 철착(鐵鑿), 철사(鐵?), 철겸(鐵鎌)과 삭도(削刀)가 대표적이며 주조철기가 중심이다. 이후 목관묘와 철기는 변·진한 지역으로도 확산되는데 마한 지역의 전국식 주조철기(鑄造鐵器)도 일부 있지만 곧 변·진한 특유의 단조철기(鍛造鐵器)가 나타나 성행한다. 한반도에서 점토대토기 문화의 등장은 고조선계 유이민이 한반도로 유입되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 준다. 즉 기원전 5세기를 전후한 시기 중 지역의 일부 주민이 한반도 중서부 지역으로 파급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후 요하 중류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 동북 지방, 한반도 북부(대동강, 청천강 유역), 한반도 중서부와 한반도 남부를 잇는 연결망을 통해 점토대토기 문화가 확산된다. 이런 점토대토기 문화의 확산 경로가 이후 전국계 철기 문화나 봉상파수부호의 남부 지방 전파, 제주도와 북부 규슈(九州) 지역으로의 점토대토기 문화 전파와 자연스레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후 변·진한의 분묘에 부장되는 토기 역시 점토대토기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점토대토기를 비롯한 초기 철기 시대의 토기를 바탕으로 삼한의 토기 문화가 형성되었음을 보여 준다. 삼한 사회가 성장하여 곧 백제, 신라, 가야로 발전하게 되므로 한반도 남부 지방 고대 토기 문화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준 초기 철기 시대의 토기 문화는 큰 중요성을 지닌다.(박진일) |
| 참고문헌 | 한국고고학개설(김원룡, 일지사, 1986), 우리나라 초기철기문화의 전개과정에 대한 약간의 고찰(박순발, 고고미술사론 3, 충북대학교고고미술사학과, 1993), 한국식 동검문화의 성격-성립배경에 대하여(이건무, 동아시아의 청동기문화, 문화재연구소, 1994), 변·진한사회의 고고학적 연구, (이재현,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점토대토기, 그리고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박진일, 한국청동기학보 창간호, 2007), 명사리식토기고(박진일,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창설20주년기념논문집,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2010), 한반도 점토대토기문화 연구(박진일,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
| 구분 | 용어 |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유물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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