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용어명 | 토광묘(土壙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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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 토광묘는 지하에 구덩이를 파서 여러 가지 형태의 무덤구덩이를 만들고 시신을 안치하는 매장방법을 총칭한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방형·장타원형·원형 등이 있으나, 장방형과 장타원형이 일반적이다. 시신을 직접 보호하는 목관이 묘광 속에 안치되거나 목곽이 설치된 형태의 것은 특별한 장구(葬具) 없이 시신만 안치하는 순수토광묘와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목관이나 목곽이 이미 부패하여 그 사용 여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토광묘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 통례이다. 또 이러한 모든 경우를 통틀어 토장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토광묘는 목관을 안치한 목관묘와 목곽을 설치한 목곽묘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엄밀하게는 묘광 안에 시신만을 안치한 토광묘와 묘광 안에 시신을 안치한 목관을 매장한 목관묘, 목관을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묘광 안에 목곽을 설치한 목곽묘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각 시대별 묘제와 고고학적 특징을 이해하는데 보다 정확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정밀한 발굴조사에 힘입어 목관과 목곽이 부패하여 없어진 경우라 하더라도 그 흔적을 찾아 목관 또는 목곽을 사용한 경우를 대부분 구분해 내고 있으므로 시신만을 직접 매장한 토광묘, 목관을 사용한 목관묘, 목곽을 설치한 목곽묘로 구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토광묘는 인류사회에서 가장 먼저 출현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묘제로서 세계적으로는 중기구석기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 이래 보편적인 묘제로 채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출현하는 묘제로 인식되어 왔지만, 전국에 걸친 여러 시기의 다양한 유적들이 대규모로 발굴조사됨에 따라 약간의 지역적·시기적 차이는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신석기시대부터 출현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용되고 있는 가장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묘제로 인식되고 있다. 남아 있는 봉토나 묘광의 형태, 묘광 내에 안치된 목관 또는 목곽의 흔적과 그 구조, 유 물의 부장 상태, 출토 유물 등을 통하여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삼국시대, 고려·조선시대 및 현대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무덤 형식은 토광묘 계통이라 하더라도 삼국시대 이후, 고려·조선·근현대의 토광묘와는 구분하여 주로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무덤의 한 유형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959년 서북한의 태성리고분군이 발굴된 이후 북한에서 한국식동검과 협봉동모가 출토되는 무덤들을 토광묘로 명명한 이래, 이 묘제 용어는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남한에서는 1980년대에 원삼국~삼국시대에 조성된 김해 예안리고분군에서 많은 토광묘(토광목관묘·토광목곽묘)가 발굴됨에 따라 토광묘에 대한 용어, 묘형 분류, 각 묘형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토광묘라는 묘제가 선사~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어 온 묘형이므로 토광묘라고 부르지 않고, 초기철기시대의 토광묘계통 무덤에 한정하는 무덤 유형으로 토광목곽묘로 부르다가, 초기철기시대~삼국시대의 토광묘 계통의 묘제에 대하여 시신을 안치하고 보호하기 위한 시설인 목관이나 목곽의 사용 여부에 따라서 직장토광묘, 목관토광묘, 목곽토광묘의 3종류로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정립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지역에 따라서는 이와 같은 묘제를 통틀어 토광묘라고만 부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토광 내에서 목관 또는 목곽의 사용 여부를 정확히 변별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에서 조사된 많은 원삼국시대 토광묘 계통 무덤에 대한 정밀한 발굴 결과에 힘입어 초기철기시대 이후의 토광묘 계통 묘제는 토광에 직접 시신을 매장한 경우보다는 묘광에 목관을 안치하거나 목곽을 설치한 경우가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됨에 따라 토광직장묘, 토광목곽묘, 토광목관묘로 구분하여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이 3가지 유형 모두 기본적으로 묘광을 파고 지하에 매장하는 토광묘계통의 묘제이므로, 굳이 토광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간단히 토광묘, 목관묘, 목곽묘로 개념이 규정되어 정착되어 가고 있다. 각 묘형들은 각 시기적·지역적 특징을 나타냄과 동시에 각 묘형이 지닌 여러 가지 고고학적 특징들이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신석기시대~초기철기시대 이전의 토광직장묘를 토광묘로, 초기철기시대~삼국시대의 것을 목관묘와 목곽묘로 구분하는 것이 그것이 지낸 역사·문화상을 잘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목재 유기물인 목관, 목곽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으므로 여전히 통틀어서 토광묘라 하고 있다. 먼저 신석기시대의 토광묘는 통영 연대도, 부산 동삼동 유적 등에서 확인되었으며, 최근 조사 예가 점차 증가하여 신석기시대에 확실히 사용되었던 묘제였음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토광묘는 묘광의 형태가 정형적이지 못한 장방형 또는 장타원형의 것들이 대부분이며 토광의 깊이도 그리 깊지 않으며, 시신을 직접 매장한 형태뿐이다. 토광묘와 더불어 가장 전통적인 묘제의 하나인 옹관묘도 신석기시대 토광묘와 함께 확인되고, 무덤에 묻힌 피장자가 뼈나 이빨, 조개껍질로 만든 목걸이·팔찌·발찌 등의 장신구를 착용하고 안장되어 있는 등 토광묘와 같은 무덤을 축조하는 관념과 내세 관념이 이 시기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서도 부여 송국리유적을 비롯한 여러 유적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시신을 직접 매장하는 토광묘 또는 석개토광묘 등이 신석기시대의 전통을 이어서 계속 사용되었음이 확인되고 있으나, 지석묘나 석관묘·석곽묘·옹관묘 등 청동기시대의 보편적인 묘제에 비해서는 제한적으로 확인되고 있어서 청동기시대에 주류를 이룬 묘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지석묘의 하부구조인 석곽묘이기는 하지만, 창원 덕천리 2호묘와 같이 석곽 안에 시신을 넣은 목관의 매장 흔적을 보여주는 예도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 토광묘에 목관이 사용된 것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경우 그 이후 초기철기시대에 통나무목관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을 참고하면 통나무목관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청동기시대의 토광묘는 양 단벽이 둥그스름하게 처리된 평면 장타원형이 많으며, 석개토광묘의 경우 석관묘나 석곽묘의 묘광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것과 같이, 장타원형 또는 장방형의 묘광이 2단 또는 1단으로 파인 것들도 있다. 부여 송국리 55지구에서 조사된 석개토광묘의 경우도 무덤 내부 토층의 조사결과, 목관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면 매우 정형적인 토광묘가 출현하여 원삼국시대 전기 토광묘로 계승된다. 기원전 4~1세기의 초기철기시대 토광묘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목관이 사용되지 않은 토광직장묘가 보편적인 것으로 파악되어 왔으나 최근의 조사에서는 이 시기 토광묘(수장묘)에는 통나무 목관이 사용되고, 목관과 묘광 벽면 사이의 공간과 목관의 상부를 할석으로 채우는 형태의 적석목관묘가 이 시기의 특징적인 묘제로 파악되고 있다. 이 묘제는 북한지역에서의 정밀한 조사 예가 알려지지 않아 확인할 수 없지만, 한반도 서북한 지역에서 남부지방에 이르기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서북한지역- 서북한 지역에서 한국식동검문화 관련 청동기와 전국계의 주조철기가 출토되는 토광묘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기원전 4~3세기경으로 파악되고 있다. 서북한지역과 남부지역 모두 적석목관묘는 토광묘에 통나무목관이 채용되고 한국식동검문화 관련 청동기들과 함께 전국계 주조철기가 함께 출토되며, 초기철기시대 적석목관묘의 계통을 잇는 원삼국시대 초기의 적석목관묘에 요갱시설이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중국 전국시대 묘제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적석목관묘는 이전의 청동기시대 토광묘의 변화·발전 형식이라기보다는, 이 시기에 이루어진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전국시대 묘제가 새로 유입되어 출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북한 지역의 경우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내부 구조가 명확하게 밝혀진 자료가 거의 없어 이와 같은 적석목관묘가 확실히 존재하였는지 불분명하지만, 황해도 서흥 천곡리·신계 정봉리·봉산 송산리(솔뫼골)·재령 호산리·배천 석산리 등 서북한 지역에서 조사된 이 시기 무덤 가운데 석곽묘나 위석묘, 토광묘로 분류된 무덤 중에 남부지방에서 확인되는 적석목관묘에서처럼, 한국식동검 관계 청동기와 주조철기가 조합되어 출토되고 있는 예들도 많이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특히 위석묘로 분류한 것은 적석목관묘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이해된다. 그 중 석곽묘 계통의 무덤들은 강상묘와 루상묘 등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전기의 요령식동검문화 단계의 석곽묘 전통을 잇는 것으로, 토광묘(적석석관묘 포함) 계통의 무덤들은 전국시대 연국(燕國) 묘제의 영향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 토광묘는 부장품의 구성 내용에 따라서 평양 천천리 유적·남형제산 유적과 같이 한국식동검·동사·정문경 등이 기본조합을 이루는 것과 배천 석산리·북창 하세동리·용산리유적 등에서 확인되는 것과 같은 전형적인 한국식동검·동모·동과·주조철부 등이 기본 부장품 조합을 이루는 것 등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전자는 기원전 3세기 대를 그 상한으로, 후자는 기원전 2세기 중엽을 그 하한으로 하고 있는데, 적석목관묘는 출토유물 면에서 볼 때 후자와 관련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서북한 지역의 토광묘도 한국식동검문화 관계 청동기와 전국계 주조철기의 유물조합상이나, 단독묘로 독립적으로 조영되어 있는 점에서 각 지역의 지배자의 무덤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초기의 토광묘들은 기원전 2세기 후반을 전후하여 남포 태성리고분군, 황주 천주리·갈현리·금석리고분군, 함흥시 이화동 토광묘군 등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군을 이루면서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 시기의 토광묘들은 충적지가 내려다보이는 낮은 구릉지대에 주로 분포하며, 주로 깊은 묘광에 목관을 안치하고 목관 안팎에 한국식동검·동과·주조철부 등을 부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시기부터 목관묘가 군집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는 각 지역별 소국의 읍락 또는 국읍의 우세집단이 등장하는 현상으로 설명되고 있다. 기원전 2세기 중엽 이후, 서북한 지역에서는 종래의 토광(목관)묘에 서 평양 낙랑구역·만경대구역·용추동, 남포 태성리, 온천 갈성리, 황주 흑교리·금석리·천주리·순천리·청룡리·선봉리, 봉산 송산리, 은파 금대리·갈현리·옥현리, 재령 부덕리, 안악 복사리, 은율 은성리고분군 등 평안남도,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목곽묘군으로 변화·발전하게 된다. 새로 나타나는 목곽묘의 분포지역이 이전 시기 토광묘가 집중 분포하던 지역과 대체로 일치하는 점에서 서북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집단의 주 묘제가 토광묘에서 목곽묘로 변화·발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목곽묘군들은 대개 수십 기에서 수백 기가 군집되어 대고분군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아 이전 시기 목곽묘군 단계보다 훨씬 규모가 커진 고분군으로 구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북한 지역 목곽묘는 하나의 장방형으로 격식화된 묘광 내에 목곽을 설치하고 그 안에 하나의 판재상자형목관이 안치된 단장목곽묘로 출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채용된 목곽과 판재상자형목관은 이전 시기 토광묘에서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요소들로서 그 계통을 낙랑군 설치와 함께 유입된 중국 한 대 목곽묘에서 찾거나, 낙랑 설치 이전 서북한 토착사회에 이미 채용되어 있던 묘제로 파악하는 의견들이 있다. 이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하여 대체로 기원전 2세기 중엽 낙랑군 설치 이전에 고조선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채용되어 있었던 묘제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경우도 고조선 토착사회의 토광묘에서 자체적으로 변화·발전된 묘제라기 보다는 낙랑군 설치 이전,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전국시대 또는 한 대 목곽묘의 영향으로 출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단장목곽묘는 출토유물 면에서 정백동96·97·185·205·206호묘와 석암리 목곽묘의 경우와 같이 한국식동검 관계 청동기와 고조선 전통의 거마구, 철제 무기류·공구류가 부장되고, 토기는 부장되지 않는 이른 시기의 유형과 한국식동검 관계 청동기가 제외되고, 새로 화분형토기·배부른단지 등의 토기류를 함께 부장한 늦은 시기의 유형으로 크게 구분된다. 그 중 특히 수레부속구와 토기류는 목곽묘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요소이다. 그 중 한국식동검과 거마구, 철제 무기와 농공구 등을 포함하고 있는 기원전 2세기 중엽경의 목곽묘는 위만조선 당시의 지배자 무덤으로, 한국식동검이 제외되고 토기류가 부장된 늦은 시기의 목곽묘는 고조선 전통을 유지하는 목곽묘이면서도 일산살꼭지, 오수전, 곡봉형 대구(帶鉤) 등 새로운 한식 요소들도 포함되고 있는 점에서 낙랑군 설치 이후인 기원전 1세기대의 토착 고조선 사람들 중의 낙랑 관인의 무덤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낙랑 설치 이후에는 중원의 한 대 목곽묘의 영향이 크게 미치면서 서북한 지역의 목곽묘는 이혈·병혈합장묘 단계를 거쳐서 귀틀무덤으로 일컬어지는 전형적인 낙랑목곽묘로 변화·발전하게 된다. -중부지역- 적석목관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충청·전라의 서남해안 지역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된 묘제로 파악되기도 하였으나, 최근 들어 한강유역의 중부와 영남지방의 여러 유적에서 적석목관묘와 한국식동검문화 관계 청동기·주조철기 세트 유물들이 확인됨으로써 남한 전역에 걸쳐 사용된 묘제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의 경우 파주 당하리, 수원 율전동, 안성 반제리·만정리, 화성 발안리유적 등에서 지금까지 총 11기의 초기철기시대 토광묘가 조사되었는데, 내부 구조를 잘 알 수 없는 수원 율전동유적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토광 벽면을 따라 할석 뒷채움 형식(내부에는 통나무목관이 안치된 것으로 추정)과 형태를 알 수 없는 목관이 사용된 것, 화성 발안리1·2호묘와 같이 통나무목관이 사용된 것 등이 확인되고 있으며, 무문토기·원형점토대토기·흑도장경호·천하석제식옥 등 토기류와 장신구류는 일반적으로 부장되어 있는 반면, 한국식동검과 주조철기 세트유물이 출토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 충청·전라지역과 영남지역의 적석목관묘와는 출토유물 면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중부지역의 경우도 이 시기에 적석목관묘 또는 통나무목관이 일반적으로 사용된 묘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부지역의 적석목관묘 또는 토광묘의 출현에 대하여 서해안을 통하여 유입 된 충청·전라지역 적석목관묘의 영향으로 보기도 하고, 충청·전라지역의 적석목관묘와는 구조나 출토유물 면에서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충청·전라지역보다 이른 시기에 나타난다는 점을 들어 압록강~청천강~원산만으로 이어지는 내륙지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아직 자료가 적어 확실치는 않다. 그 후 이 지역에서는 2세기대 이후 목관 또는 목곽을 매장주체부로 한 주구토광묘와 즙석식분구묘가 나타나기까지 이러한 적석목관묘 또는 토광묘를 계승한 무덤 형태나 새로운 묘제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공백지대가 되는 것도 이 지역 초기철기시대 묘제의 출현과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부지역(영동·영서)에서 나타나는 이 시기의 묘제 공백현상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한 무덤에 함께 묻히는 매장방법인 지상식 대형목곽묘가 사용된 옥저 등 북부지역 묘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무덤이 지상식이었던 관계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멸실되어 고고학적 흔적으로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충청·전라지역- 초기철기시대 적석목관묘 또는 토광묘와 출토유물 세트가 남한에서 가장 먼저, 비교적 명료하게 확인된 충청·전라 서남해안 지역의 경우 초기에는 대전 괴정동유적이나 화순 대곡리 유적의 수습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북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위석식 석곽묘 또는 석관묘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화순 대곡리 유적의 매장주체부에서 출토된 커다란 통나무 조각이 그 후에 통나무목관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 창원 다호리1호묘의 통나무목관과 동일한 구조의 통나무목관의 잔편으로 파악됨으로써 그간에 알려진 한국식동검 관계 청동기와 주조철부·철착 등의 전국계 주조철기, 점토대토기·흑도장경호 등의 토기세트 유물이 출토된 토광묘, 위석식석곽묘, 석관묘 등이 대부분 적석목관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논산 원북리유적 등에서 조사된 바와 같이 적석목관묘 외에 토광묘도 보편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충청·전라지역에서 확인되는 적석목관묘는 당진 소소리, 부여 합송리, 장수 남양리유적 등에서 수습된 유물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주조철부·철착 등 전국계 주조철기와 세형동검·동모·정문경 등의 한국식청동기가 세트로 부장되는 특징이 있는데 이러한 한국식동검 관계 청동기와 전국계 주조철기의 세트 부장은 고려채·세죽리·연화보·쌍산자·용연동·송산리·석산리·이화동·호곡·오동유적 등 소위 세죽리-연화보유형의 유적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 유적들은 대체로 중국 요동지역~압록강~청천강~서북한~충청~전라지역에 걸쳐 있는데, 서해안을 따라 연결망을 이루고 있어서 이러한 유물들이 부장된 충청·전라지역의 적석목관묘의 유입경로를 추정할 수 있다. 종래 이른 시기의 적석목관묘 및 출토유물들이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집중되고 있는 점을 근거로 그 계통에 대해서 중국 산동반도에서 서해안의 해로를 통하여 중국 전국시대 묘제와 주조철기 관계 유물들이 유입되어 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하였으나, 새로운 조사 례의 증가와 함께 내륙 루트를 통하여, 직접적으로는 서북한 지역을 통하여 유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적석목관묘는 단독묘로 존재하는 입지적인 면이나 무덤의 규모와 구조, 출토유물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토광묘에 비해 탁월하여 상위의 묘제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충청지역에 비해 전라지역에서는 다소 늦은 시기에 적석목관묘와 토광묘가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최근 전라북도지역에서도 전형적인 전국시대 주조철기가 공반되는 이른 시기의 적석목관묘가 확인되고 있으나, 완주 갈동, 전주 여의동, 익산 평장동·신동리·용제리·오금산유적 등 주로 충청지역에 인접한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전라남도지역의 경우는 함평 초포리, 화순 대곡리유적의 경우와 같이 이른 시기의 적석목관묘에서는 충청지역과는 달리 철기와 토기는 전혀 출토되지 않고, 충청지역에서 그 이전 시기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한국식동검과 청동 의기류(방울류)만 출토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 후 기원전 1세기대에 이르러서야 고창 예지 리, 영광 군동유적 등에서 확인된 바와 같은 주조철부 등이 간헐적으로 출토된다. 이러한 현상은 호남 남부지역으로는 초기철기시대 적석목관묘와 그 부장유물 세트가 정형적인 형태로 파급되지 못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영남지역- 영남지역의 경우 초기철기시대에 해당하는 토광묘나 적석목관묘의 구조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대구 평리동·신천동·만촌동·비산동, 영천 어은동, 경주 입실리·죽동리·구정동유적 등에서 출토된 한국식동검·동모·동과·동령·간두령·소동탁·우각형동기·일산살꼭지·조형검파·마형대구(馬形帶鉤)·호형대구(虎形帶鉤)·동포·각종 청동장식·철검·철촉·철부 등 유물의 구성 내용이 다른 지역과 약간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기원전 2~1세기대의 한국식동검문화 후기 유물들이 대구·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한국식동검문화 후기 유물들은 대부분 구릉이나 산기슭에서 출토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충청·전라지역의 적석목관묘의 입지와 비슷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한국식동검 관계 유물이 출토된 유구는 다른 지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적석목관묘 또는 토광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조사되어 그 구조와 출토유물의 내용이 정확하게 알려져 있는 적석목관묘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훨씬 늦게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지역의 적석목관묘에 한식유물과 서북한 지역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점을 근거로 대체로 기원전 1세기대의 원삼국시대 초기 묘제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적석목관묘의 특징인 평면 타원형의 깊은 묘광·적석시설 등과 같이, 이전의 한국식동검문화 단계에서부터 이어져온 재지적인 요소 이외에, 통나무관·요갱 등과 같은 특징들은 중국 황하 이남의 강남지역으로부터 서북한 지역을 거쳐서 전국~한초의 혼란기에 이주민 집단에 의해 전래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대구 팔달동·경산 임당·밀양 교동·경주 조양동유적(5호묘) 등에서 확인되는 초기 목관묘는 장타원형의 깊은 묘광에 적석 시설과 통나무관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목관묘의 특징은 화순 대곡리유적 등 그 이전 시기 충청·전라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한국식동검문화기의 적석목관묘의 연계선상에 있는 묘제이다. 이는 묘제에 나타나는 특징뿐만 아니라, 출토유물이 한국식동검·주조철부·철착 등 초기철기시대 유물과 같은 구성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도 입증된다. 그런데 영남지역에서 나타나는 이 묘제와 부장품 세트관계는 서북한지역과의 관련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견해도 있으나, 전국계의 주조철부 등이 서북한 지역에서 중부, 남부지역에 걸쳐 두루 확인되고 있고, 적석목관묘의 묘제 자체도 초기철기시대 서북한 지역에서 영남지역에 이르기까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서북한 지역 묘제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영남지역에서 나타나는 적석목관묘와 그 출토유물 세트가 서북한 지역으로부터 어느 시기에, 어느 지역을 거쳐서 영남지역으로 유입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영남지역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초기 목관묘와 부장품 세트의 출현 배경을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보는가, 또는 그 이후로 보는가에 따라 다르다. 전자의 경우 기원전 3~2세기경에 나타나는 충청·전라지역과는 달리 영남지역에서는 성운문경·오수전·청동 대구(帶鉤)·동탁 등과 같은 한식 유물들이 공반되는 경우가 많고, 낙랑군이 설치된 기원전 2세기 말 이후에 급격히 나타나므로, 낙랑군의 설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 적석목관묘를 비롯한 가장 이른 시기의 목관묘에서 출토되는 타날문단경호와 주조철부·철착 등이 전국계토기와 철기문화의 파급에 의하여 서북한 지역에서 낙랑군이 설치되기 오래전부터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낙랑군 설치와 관계없이, 그 이전에 영남지역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 남한지역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유입된 충청·전라지역으로부터의 영향으로 보기도 하지만, 충청·전라지역에서는 타날문토기가 전혀 공반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식과 북방계 청동기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이 지역의 유물 내용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영남지역 적석목관묘 출토 부장품은 종래의 한국식동검·주조철부·철착 세트에 더하여 철단검과 철모 등의 철제 무기류가 부장되는 등 서북한 지역의 부장품 세트와 좀더 가까이 연결된다. 이러한 양상은 영남지방의 초기 적석목관묘와 그 출토유물은 전국계 요소로서 서북한 지역을 통하여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조양동38호묘, 울산 다운동 나-9호묘 등 통나무목관에 뒤이어 나타나는 판재상자형목관은 청동기시대 이래 동북아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석관묘에서 변화·발전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 시기부터 목재 재질로서 ‘ㅍ’, ‘ㅂ’자형 목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점에서 낙랑 목곽묘의 전형적인 목관 구조와 통하므로 서북한 지역 낙랑 목곽묘 목관구조의 영향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시기에는 판재상자형목관과 통나무관 등 두 가지 형식의 목관이 존재하였지만, 그 이전의 한국식동검문화 단계부터 이어져온 통나무목관은 점차 사라지는 반면, 새로 들어온 목관 형식인 판재상자형목관 형식으로 통일되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 시기에 낙랑의 장송관념이 체계적으로 유입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목관묘의 마지막 단계에는 울산 다운동 나-19호묘의 경우와 같이 통나무목관을 안치하고 그 외부에 판재 혹은 각재도 함께 사용한 구조라든지, 경주 사라리130호묘와 같은 목곽계목관묘가 나타나는 등 목관묘에서 목곽묘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형식의 목관묘는 기존의 목관묘에 새로이 목곽묘의 요소가 절충되어 나타나는 외래계 묘제로서 특히 낙랑 목곽묘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러한 목관묘에서 목곽묘로의 변화 과정도 서북한 지역 목곽 또는 목관의 제작기술과 관념이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영남지역 진·변한의 판재상자형목관묘는 재지 목관묘의 전통 위에 새로이 서북한의 낙랑 묘제의 관념이 유입되어 일정한 변용과정을 거쳐 정착되어간 묘제라 할 수 있겠다.(김길식) |
| 참고문헌 | 의창 다호리유적 발굴조사 진전보고(이건무 외, 고고학지 1, 한국고고미술연구소, 1989), 무덤에서 본 삼한사회의 구조 및 특징(한국고대사논총2,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1), 낙동강 하류지역 토광목관묘의 등장과 발전(임효택, 삼한사회와 고고학, 1993), 세형동검문화기의 묘제에 관한 고찰(이경순, 동의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4), 영남지역 목곽묘의 구조(이재현, 영남고고학 5, 영남고고학회, 1995), 삼한고고학연구(최종규, 서경문화사, 1995), 낙랑고분문화 연구(高久健二, 학연문화사, 1995), 대구 팔달동유적 목관묘에 대하여(진수정, 제9회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발표회 자료집, 1998), 임당유적 원삼국시대 목관묘(김수남, 임당유적의 고분과 생활유적, 한국상고사학회, 1999), 1~3세기 호 남지역 묘제의 다양성(임영진, 동아시아 1~3세기의 주거와 고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1~3세기 영남지역 고분의 문화변동(박승규, 동아시아 1~3세기의 주거와 고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세형동검시기의 영남지역 묘제(이청규, 제5회 영남·구주합동고고학대회-세형동검문화의 제문제-, 2002), 변·진한사회의 고고학적 연구(이재현, 부산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3), 경기지역의 초기철기시대 유적과 유물(진수정, 기전고고 4, 경기문화재단 기전문화재연구원, 2004), 韓半島南海岸新石器時代の埋葬遺構(任鶴鐘, 季刊古代文化59-2, 2007), 진·변한지역 낙랑문물의 유입 양상과 그 배경(김길식, 낙랑 문화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7), 다호리유적 발굴의 의의(이건무, 갈대밭 속의 나라 다호리, 국립중앙박물관, 2008), 경기지역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유적의 발굴조사 성과와 향후 과제(서길덕, 경기도 문화유적 발굴조사의 회고와 전망, 2009) |
| 구분 | 용어 |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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