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용어명 | 전곡리유적(漣川 全谷里遺蹟 / Jeongok-ri Si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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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 사적.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일원에 위치한다. 서울에서 의정부, 동두천을 거쳐 한탄강을 건너거나, 서울에서 문산, 적성을 거쳐 한탄강을 건너면 해발 60m 내외의 비교적 평탄한 대지가 펼쳐지며 이 일대에 유적이 자리한다. 전곡리유적은 1978년 주먹도끼가 채집되어 당시 서울대학교 김원룡에 의해서 감정되고, 다시 영남대학교의 정영화에 의해서 아슐리안 주먹도끼로 확인되었다. 현재의 제1지구인 최초로 석기를 채집한 지점의 남쪽 건너편 지역에서 다량의 주먹도끼가 수습되었는데, 특히 현재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주먹도끼들이 발견된 지점을 제2지구로 하였다. 그리고 그 동편의 넓은 지역에서도 많은 석기가 채집되었는데, 이 지역에 들어서 있던 벽돌 공장에서 오랫동안 이 지역의 점토를 채취하였기 때문에 많은 석기가 공장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 벽돌 공장 일대를 제3지구로 하였다. 그리고 제1차 발굴을 하는 동안 발견된 강 건너의대지인 고능리 일대를 제4지구로 명명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현재 유적의 동편 언덕 일대를 조사한 바 있는데, 이 지역에서도 동일한 퇴적물 속에서 유물이 노출되어 제5지구로 설정하였다. 제1차 발굴조사는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주관으로 1979년3월 26일부터 4월 13일까지 지속되었는데,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구석기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연합 발굴을 실시한 것이다. 이 발굴에 참여한 팀과 고고학자로는 서울대학교 박물관 이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 영남대학교 정영화, 경희대학교 황용훈, 건국대학교 최무장 등이 발굴팀으로 참가하였다. 제1차 발굴에서는 제2지구의 중심 지역에 대각선으로 시굴 피트를 배치하여 발굴하였다. 이들 구덩이들의 발굴에서는 대체로 5×5m 크기의 발굴 구획으로 시작하였지만 대부분 발굴을 마무리 짓지 못하였다. 제2차 발굴은 국립문화재연구원으로부터 학술 용역을 받아서 실시되었는데, 1979년 9월 17일부터 10월 20일까지 진행되었다. 이 발굴은 1차 조사와 같은 체제로 진행되었고, 발굴 지점도 확대없이 기존의 미완 지점을 발굴하면서 몇몇 새로운 피트를 발굴하게 되었다. 제3차 발굴조사는 1~2차 발굴조사에서 불분명하였던 층위 구조를 확인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1980년 10월 3일부터12월 29일까지 68일 동안 진행되었다. 제4차 발굴조사까지 여러 기관이 제2지구 내에서 피트를 몇 개씩 발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합발굴의 경우 혼란이 야기된다는 점과 예산 효용성에 대한문제점이 지적되어 일단 서울대학교가 책임지고 나머지 부분을 마무리 짓기로 하였다. 이 4차 발굴조사에서는 일부의 사질 황색 점토층에서 대량의 유물이 집중되어 나타났고, 이 중에는 대형의 천석도 있었다. 제5차 발굴조사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하나는 3차와 4차 조사에 연속하여 드러났던 석기가 출토된 황갈색 사질점토층의 연결 상황에 대한 확인으로서 그 연결상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저명한 구석기 고고학자인 클라크John Desmond Clark의 방한에 앞서서 공동 토론을 위한 자료 수집을 위해서 연속된 3개의 소규모 피트를 발굴하였다. 클라크의 견해의 요지는 전곡리유적의 퇴적물은 포타슘-아르곤Potassium-argon연대측정 결과가 제시한 상한 연대인 27만년에서 10만 년 전 마지막 간빙기 사이에 퇴적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주먹도끼는 그 형태적인 특성이 아프리카의 상고안 석기 공작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1983년에 실시된 제6차 조사는 고고학 분야의 발굴조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유적의 지질 및 생물학적인 분석을 위한시료를 채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지리학, 지형학, 생물학, 고고학의 네 분야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야외 관찰과 아울러 피스톤 코어를 채취하여 분석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고고학팀은 전곡 일대의 지질구조를 확인하는 작업을 실시하였는데, 전곡리 1지구의 현무암 단애 하부에 현무암과선캄브리아기의 지질구조와 접촉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시굴 피트를 넣어 현무암 아래에 상당한 두께의 하천 퇴적물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제7차 조사는 도로 건설을 위하여 지형을 평탄화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문화재관리국에서 진상을 파악하고 긴급 발굴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이 발굴도 배기동에 의해서 조사되었으며, 지형이 절단되거나 절단될 예정이었던 지점에 대해서 진행되었다. 제8차 조사는 한탄강 유역의 동편 언덕에서도 많은 석기가 지표 채집되었지만, 이 지역은 아직도 지구 지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어, 조사를 통해 사적 지정 구역 외부의 중요성을 알릴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국립문화재연구원의 용역을 의뢰 받아 시굴조사적인 성격의 발굴을 실시하게 되었다. 의무대가 있는 지점의 뒤편산등성이 중심을 기준으로 3개소에 발굴 피트를 구획하여 이 지역에 대한 전체적인 지층 구조를 조사하였다. 이 발굴조사를 통해 이 지역도 서편의 사적 지구와 동일한 구조의 퇴적층이 남아 있으며, 석기가 출토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어 제5지구로 임의 지정하였다. 제9차 발굴조사는 1990년대에 들어서서 2지구의 도로가 확장됨에 따라 또다시 단면 상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고 유물이 사면에서 발견되어 문화재관리국에서 현장 답사를 실시하여 긴급 발굴을 진행하였다. 이 발굴은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배기동의 주관으로 1992년 3월 31일에 시작되어 6월 28일까지 진행되었다. 이 발굴의 대상 구역은 1지구와 2지구에 걸쳐 있었는데, 1지구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9차 조사에서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이 발굴 역시 도로의 절개 사면을 따라서 피트를 배치하여 조사를 실시하였다. 제2지구의 작은 능선 부분의 사질층 바로 윗면에서 유물 집중면이 드러난 사실은 9차 조사의 대단히 중요한 성과이다. 이 발굴을 통해 총 11개의 피트에서 주먹도끼를 비롯한 422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제10차 발굴조사는 동두천에서 연천을 잇는 도로에 대한 조사로, 사적으로 지정된 구역을 관통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적에 대단히 근접해 있어, 유적과 동일한 지층 구조를 가진 지형의 중심을 지나게 된다는 점에서 반드시 조사해야할 사 안이었다. 발굴은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주관으로,1994년 11월 18일부터 1995년 6월 12일까지 8개월 가까운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3지구의 북편에는 층위가 잘 남아 있었으며 유물의 집중면이 확인되었다. 이 발굴에서 총 1,021점의 석기가 수습되었다. E93N65-피트에서는 유물이 집중되어 나타났고, 이 유물 중에 접합되는 석기가 다수 발견되어 주목되었다. 제11차 발굴조사는 유적의 전면적인 시굴조사로 이루어졌다. 1999년 문화재청이 전체 사적 범위에 대한 시굴조사를 기획하고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2000년 7월부터 2001년 2월까지 약 8개월간 조사가 진행되었다. 총 209개의 피트가 설치되었으며, 그중 73개 피트에서 400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이후에는 11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E55S20피트에 대한 전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피트는 시굴조사 시 퇴적층이 잘 남아 있어 전곡리유적의 형성 과정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제12차 발굴조사는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2지구의 농협 판매 시설 부지에 대한 조사로 1지구의 북동편인 3번국도와 인접한 지역이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2004년5월 6일부터 동년 7월 31일까지 조사를 실시하였다. 전체 14개의 피트에서 모두 140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주먹도끼1점을 비롯하여 찍개 5점, 다각면원구 1점 등의 성형석기와 석핵이나 박편 그리고 버리는 석재 종류가 확인되었다. 제13차는 전곡선사박물관이 건립되는 부지에 대한 조사로, 시굴조사는 2006년 4월 7일부터 6월 11일까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는 2007년 12월 27일부터 2008년 6월까지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에서 진행하였다. 조사 대상 지역은 전곡리 176-4 일대와 사적 지정 구역 동남부 및 그 주변을 포함하는 곳으로 박물관 부지 전체 면적 77,058㎡ 중전면 발굴이 필요한 건물 부지 10,800㎡에 대한 조사이다. 원 발굴은 2000년~2001년도에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사적 지구 전체에 대한 조사를 근거로 구석기시대 문화층의 부존 여부를 정밀히 확인하는 것이었으나, 고구려시기의 성곽과 건물의 흔적이 확인되어 발굴조사까지 이어졌다. 고구려 토기편이 출토되었고, 지표 상에서 몸돌류의 석기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제14차는 5지구로 명명된 지역에 임대 아파트 부지에 대한조사로 실시되었다. 기간은 2006년 8월 21일부터 2007년 11월23일까지로 시굴조사부터 추가 발굴조사까지 진행되었다. 총111기의 피트 및 확장 피트를 설치하였으며, 1,613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주요 유물로는 가로날도끼, 피크형도끼 등을 포함한 주먹도끼류 7점이 있으며, 이를 포함하는 대형 석기가 30점, 소형 석기가 30점, 그 외 몸돌과 격지가 다수 확인되고 있다. 특히 출토된 규암제 가로날도끼는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석기 공작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제15차는 도로 부지에 대한 조사로, 시굴조사가 2008년 3월 19일부터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현 국방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발굴조사는 2008년 10월 15일부터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하였다. 대표 유물로는 주먹도끼, 찍개, 긁개, 뚜르개 등이 있다. 이러한 본격적인 발굴조사 이외에도 토지 소유주의 민원에 의해서 간단한 시굴조사가 몇 차례 있었다. 유적이 위치한 전곡읍은 한탄강이 남쪽으로 곡류하며 감싸고 도는 편평한 대지 상의 지형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지역은 서울과 원산을 연결하는 좁고 긴 추가령지구대의 일부로서 이 추가령곡은 그 길이가 약 180㎞에 이르는 남북을 갈라놓고 있는 구조곡이다. 과거 철원 평강 일대의 화산폭발에서 흘러나온 현무암이 구조곡을 따라 메워지면서 현재 강의 양쪽 또는 한쪽에 대지 상의 지형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현무암은 제4기 중기 갱신세에 분출한 것으로서 현재 전곡리유적이 위치한 일대의 현무암은 약 50만 년전, 현재 전곡읍사무소를 경계로 북쪽의 것은 약 17만 년 전에 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곡리 대지는 큰 구릉이나 특별히 돌출한 지형이 없는 전체적으로 평탄한 지형으로 제일 높은 곳이 해발 약 61m 정도의 높이를 갖고 있는 지대에 형성되어 있는데, 이 평탄한 대지 상의 지형에 적색 혹은 황갈색의 두터운 점토층이 전 지역에 분포하며 이 점토층이 있는 곳에서 흔히 석영암 또는 규암제의 석기가 발견되고 있어, 사실 이 전곡읍 전 지역이 석기 산포지라고 할 수 있다. 전곡리유적은 1979년 1차 조사가 이루어진 이래로 지난 30여 년간 15차례의 크고 작은 조사가 이루어져 각 지점마다세부 층위에 있어서는 차이가 나타나지만 전체적인 퇴적 양상은 용암이 흐르다 식어 형성된 현무암 대지 위에 수성 퇴적물인 모래층이 쌓이고 그 위로 수성 혹은 풍성 기원의 점토 퇴적물이 쌓여 있는 양상이다. 지점에 따라서 모래층이 없이 점토 퇴적물이 쌓여 있기도 하다. 유적 내에 해발이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하며, 전곡리유적의 대표적인 층위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는 2지구의 E55S20-Ⅳ 피트를 중심으로 층위를 살펴보면 기반암인 현무암반의 상부로 회청색 실트층- 회황색 실트층 - 명황갈색 실트성 점토층 - 명갈색 미세 사질점토층 - 갈색 미세 사질점토층 - 갈색 점토층 - 황갈색 점토층 - 갈색 점토층 - 적갈색 점토층 - 암갈색 점토층 - 갈색점토층 - 적갈색 점토층 - 갈색 점토층 - 표토의 순으로 현무암반 위로 실트성 퇴적물이 확인되고, 사질점토층, 점토층이 퇴적된 양상이 확인된다. 점토층에서 총 5매의 토양쐐기구조가 확인되었고, 지표 하 약 30㎝의 첫 번째 토양쐐기 하부에서 아이라-탄자와 화산재姶良Tn火山灰, AT가 발견되었고, 이보다 약 70㎝ 아래에서 보다 오래된 기카이-토주라하라鬼界葛原火山灰, K-Tz가 검출되었다. 전곡리 구석기 공작의 성격에 있어서 대표적인 특징은 아슐리안형의 석기 공작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발견 당시까지 동아시아 지역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것으로 전곡리유적 석기 공작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곡리 석기 공작의 중요성은 이 유적의 층위 보존이 대단히 잘되어 있다는 점이며 형성 과정을 잘 보여주는 층위 속에서 이러한 아슐리안 석기를 포함한 석기공작이 인간의 행위를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된 상황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도 이 전곡리 구석기 공작이 동아시아 지역에 나타나는 주먹도끼 공작의 기능성과 다른 석기 공작과의 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유적의 구조가 광범위한 지역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적의 규모는 당시의 고인류의 생활을 복원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장점이며 구석기시대 유적으로서 유례가 드문 경우라 할 수 있다. 전곡리유적에서 현재까지 1~15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한 유물의 총 수량은 약 6,400점이다. 또한 지표에서 채집한 유물의 수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매우 많은 편이다. 석기 공작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아슐리안형 석기 공작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석기에 가공이 적고 형태적으로 정형성이 높지 않은 특성을 관찰할 수 있다. 석기는 대체로 한탄강이나 임진강 변에서 흔히 있는 석영 맥암이나 규암 등의 강돌을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부 다른 종류의 석재, 즉 이 지역에서 흔한 현무암, 편마암 등도 소량 확인되고 있다. 석기 중 대형 석기로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류, 즉 타원형 또는 첨두형의 주먹도끼, 가로날도끼, 대형첨두기pick, 찍개류, 대형의 긁개 그리고 다각면원구 등이 있다. 소형 석기는 두드러지는 것은 없으며 대체로 몇 차례의 타격으로 사용할 부분을 가공하는 방식으로 뚜렷하게 날을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긁개날, 톱니날, 홈날 등을 만든 것들이 보이는데 박편이나 부정형의 석편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고 석핵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박편들은 대체로 횡장박편이 많은데 측면이 불규칙한 것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석핵은 초기 단계에서부터 상당히 박리가 진행된 것에 이르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초기 단계의 것들로는 몇 편의 박리흔이 남아 있는 강돌 이나 부정형의 대형 석재들이 있고 상당히 지속적으로 박리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주산알 모양의 소위 유사 원추형의 석핵도 있다. 이것은 크기도 작아서 상당히 발전된 박리 기술로 판단된다. 토층의 깊이에 따라 석기의 제작 기술의 차이를 관찰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상부층에서 작은 석기들이 발견되어 박편 제작 기술상의 변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기술상의 변화가 뚜렷하지는 않다. 상부층에서 아이라-탄자와 화산재姶良Tn火山灰, AT가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석인기법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향후 전곡리유적의 상하부 층위에 있어서 석기 제작 기술상의 변화를 확인하는 작업이 석기 공작 연구에 있어서 당면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전곡리유적의 연대 문제에 있어서 현무암과 퇴적층의 연대에 관한 연구가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졌다. 먼저 현무암의 경우 전곡리를 비롯한 파주 임진강안 여러 지점의 현무암은 같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되고 있으나, 한탄강의 하류 지점에서 두 개의 다른 범위의 연대가 얻어져 주목된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전곡리유적의 현무암의 연대는 약 50만 년 전으로 알려진 반면에 은대리 부근의 연대는 17만 년 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아주 가까운 거리의 지역 안에 상당한 연대 차이를 보이는 현무암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불과 2~3㎞ 떨어진 지점에서 기원이 다른 현무암이 확인되어 향후 현무암에 대한 집중적인 연대 측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현무암의 연대 측정과 더불어 현무암반 위의 수성 퇴적물과 함께 풍성 혹은 사면 붕적 기원의 퇴적물들이 남아 있는데 이들 퇴적물에 대한 열형광TL연대측정으로 얻은 연댓값들이 있다. 우선 연천 전곡리와 포천 영평천 부근에서 얻어진 것들은 5만 년 전 내외로 알려져 있지만 과거의 열형광TL연대측정에 의한 연댓값에 대한 신뢰가 높지는 않다. 한편인근 파주 가월리·주월리유적에서 얻어진 연대가 20만 년전까지 올라가는 것이 있다. 아직 열형광TL연대측정에 의한 연댓값에 대한 신뢰도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적어도 갱신세중기 후반의 연대가 얻어지고 있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비교적 최근 전곡리의 퇴적물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2만 5천 년 전의 아이라-탄자와 화산재姶良Tn火山灰, AT가 최상층에서 나오는 반면 지표 하 1m 정도의 지점에서는 약 10만 년 전 일본에서 기원한 화산재가 발견되어 이 정도 깊이의 퇴적물은 적어도 9만 5천 년 전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고 그 아래의 퇴적물은 이보다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전곡리유적 하부의 수성 퇴적물이 상부의 퇴적물과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현무암의연대가 50만 년 전이라는 연대를 간접적으로 확인하여 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배기동) |
| 참고문헌 | 전곡리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3), 전곡리-1986년도 발굴조사보고-(서울대학교박물관, 1989), 전곡리구석기 유적발굴조사보고서-1992년도-(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1993), 전곡리 5지구 구석기 유적 발굴조사-1991년 보고-(배기동·최재호, 보성강·한탄강유역 구석기 유적,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94), 전곡리구석기 유적-95년도 발굴조사보고서-(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1996) 전곡구석기 유적- 2000-2001 전면시굴조사보고서-(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2001), 연천 전곡농협 신축부지 일대 발굴조사 보고서 (서울대학교 박물관, 2006), 전곡리구석기 유적 제5-2지점 발굴조사보고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 2009), 전곡 중2-5호선 개설공사 구간 내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 (서울대학교 박물관, 2011),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적 (국방문화재연구원, 2011) |
| 구분 | 유적 |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구석기시대편) |
만족도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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