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송국리 유적(扶餘 松菊里 遺蹟)
설명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에 위치한다. 197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그 존재가 알려져 이후 1997년까지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집자리〔住居址〕 57기, 독널무덤〔甕棺墓〕 6기, 돌널무덤〔石棺墓〕 5기, 움무덤〔土壙墓〕 2기, 토기가마〔土器窯址〕 1기, 환호(環濠), 목책시설(木柵施設)이 확인되었다. 해발 30m내외의 나지막한 구릉성 산지가 깔리면서 주변에 넓은 평야지대가 전개되는 지역인데 중심권의 북서쪽에 해발 261m내외의 높은 산지가 북동-남서방향으로 길게 늘어져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다. 집자리는 평면 원형과 장방형, 그리고 방형으로 구분된다. 내부에는 타원형구덩이〔娥圓形竪穴〕를 갖춘 것이 일반적이고, 화덕자리〔爐址〕는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장방형과 방형의 경우 내부에 화덕자리가 있기도 하다. 원형 집자리는 대체로 지름 350∼530㎝의 크기이며, 장방형보다 깊다. 내부에 타원형구덩이만 있는 것, 타원형구덩이 양끝에 2개의 기둥구멍〔柱穴〕이 있는 것, 그리고 타원형구덩이를 중심으로 주변에 4개의 기둥구멍이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 유물은 토기·석기 등 다양한 편이며, 특히 송국리식토기(松菊里式土器)로 분류되는 구연이 외반되고 동체부가 밖으로 둥글게 부풀다가 바닥에 이르러서 축약되어 저부에 연결된 민무늬토기〔無文土器〕가 많다.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 검은간토기〔黑色磨硏土器〕 등도 있다. 석기는 삼각형돌칼〔三角形石刀〕, 홈자귀〔有溝石斧〕, 돌화살촉〔石鏃〕, 간돌검〔磨製石劍〕, 가락바퀴〔紡錘車〕, 돌도끼〔石斧〕 등이 있다. 이 외에 부채모양청동도끼〔扇形銅斧〕의 거푸집〔鎔范〕도 출토되었다. 돌널무덤은 판돌〔板石〕을 세우거나 깬돌〔割石〕, 또는 강돌〔川石〕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1975년 최초로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출토된 돌널은 풍화암반을 파서 205×100㎝ 크기의 무덤방〔墓室〕을 만들었는데, 머리부분이 발쪽보다 약간 넓은 두광족협(頭廣足陜)의 형태로 시설하였다. 뚜껑돌〔蓋石〕은 크기 260×120×100㎝의 타원형 판돌 1매를 사용하였다. 출토유물은 피장자의 왼쪽 허리 부근에 비파형동검과 돌화살촉, 대롱옥〔管玉〕, 장식옥〔飾玉〕 등이 남아 있었다. 동검의 위치로 미루어 피장자의 머리방향〔頭向〕은 북쪽으로 추정된다. 독널무덤은 모두 6기로 원형의 무덤구덩〔墓壙〕을 파고 그 안에 송국리식토기를 세운 후 한 매 또는 여러 매의 돌을 덮은 형식이다. 독은 무덤구덩에 직립하여 안치〔直置〕되었으며, 무덤구덩과 독 사이가 2∼4㎝ 정도의 간격만 있을 정도로 독 크기에 꼭 맞게 무덤구덩을 팠다. 움무덤도 2기가 조사되었는데 생토면을 파서 움을 조성한 것만 확인되어 있다. 목책시설은 맨 땅에 기둥을 박을 수 있도록 구덩이를 판 것으로 총 길이 430㎝정도가 확인되었지만 원래는 마을 전체를 에워싼 것으로, 전체 둘레 약 2.5㎞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목책시설은 환호에 의해 파괴되어 있기도 하다. 환호는 단면 ‘ U ’자형태로 조성한 것인데 너비가 270∼380㎝이나 넓은 곳은 420㎝에 이르기도 하며, 깊이 110㎝정도이다. 송국리 유적은 타원형구덩이를 갖춘 집자리에 외반된 구연을 가진 토기, 그리고 석기 등 독자적 특징을 갖는 유적이다. 이 유적으로 말미암아 청동기시대의 송국리형문화의 중심지가 금강유역임을 알 수 있기도 하다. 특히 불에 탄 쌀〔炭化米〕도 수습되어 있는데, 생업경제가 농경이면서 논농사까지 영위하였음을 알게 한다. 사적. (이현숙)
참고문헌 송국리Ⅰ(국립박물관고적조사보고 11책, 1978), 송국리Ⅱ(국립박물관고적조사보고 18책, 1986), 송국리Ⅲ(국립박물관고적조사보고 19책, 1987), 송국리Ⅳ(국립중앙박물관, 1991), 송국리Ⅴ(국립공주박물관, 1995)
구분 유적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청동기시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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