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용어명 | 공수리 고인돌(楊口 公須里 支石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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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공수리에 위치한다. 1987년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해 파로호의 물을 방류한 뒤 실시된 강원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서 확인되었다. 1987년에는 발견된 10기 중 훼손이 심한 3기가 먼저 발굴조사 되었고, 이전복원을 전제로 한 1992년의 2차 발굴조사에서는 모두 9기가 조사되었다. 파로호로 유입되는 서천변의 충적대지 위에 강물의 흐름과 평행하게 12기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고인돌〔支石墓〕 7호·9호·11호에 대한 1987년의 1차 발굴 결과, 7호는 개석식(蓋石式)이며 덮개돌〔上石〕에 홈구멍〔性穴〕이 파여져 있었고, 9호는 고임돌〔支石〕이 하나만 남아있었으나 탁자식(卓子式)으로 보이며, 11호도 탁자식으로 고임돌이 파괴되긴 하였으나 모두 남아 있음이 밝혀졌다. 덮개돌 밑 적석(積石)은 지름 10∼20㎝ 정도의 강돌〔川石〕로 덮개돌을 중심으로 가장자리 부분은 낮게, 가운데로 가면서 높아지도록 쌓아올렸으며, 쌓은 돌의 범위는 덮개돌의 크기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지름 400㎝, 깊이는 30∼50㎝이다. 이러한 적석은 6호의 경우는 큰 자갈돌을 밑에 고정시키고 덮개돌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기초공사를 하였던 것 같으며, 9·11호의 경우는 고임돌이 확고히 박혀 있도록 하기 위한 보강시설로 보인다. 2차 조사에서 확인된 1호는 탁자식으로 바닥에 붉은 흙을 뿌리고 다진 후 고인돌을 축조하였다. 덮개돌의 크기는 448×228×62㎝이고, 간돌검〔磨製石劍〕 편이 출토되었다. 2호는 개석식이며, 축조 방법은 1호와 같다. 덮개돌의 크기는 176×175×44㎝이고, 간돌화살촉〔磨製石鏃〕 1점이 출토되었다. 3호도 개석식으로 덮개돌의 크기는 266×178×100㎝이며, 간돌화살촉 편 1점이 출토되었다. 4호는 덮개돌 크기가 292×260×98㎝이고 홈구멍이 8개 파여 있다. 5호는 개석식으로 후대에 파괴되어 3등분 되어 있다. 6호는 탁자식이고 덮개돌은 이등분되어 있다. 무덤방〔墓室〕은 강돌과 판돌〔板石〕을 혼합하여 만들었는데 160×100∼120×5 0㎝의 크기이다. 8호는 개석식이며 덮개돌의 크기는 143×119×43㎝이다. 적석 사이에서 간돌도끼 1점이 출토되었다. 10호는 탁자식이며 덮개돌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없어졌고 고임돌은 무덤방의 장축방향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2매가 파괴된 채 쓰러져 있었으며 간돌자귀〔磨製手斧〕 1점이 출토되었다. 12호는 비교적 잘 보존된 개석식으로 덮개돌의 크기는 180×178×42㎝이며 남쪽 바닥 적석 사이에서 간돌화살촉 편 1점이 출토되었다. 이 일대 고인돌이 형식에 관계없이 모두 적석을 갖추고 있는데, 이러한 특성은 북한강 문화권에 속하는 춘천 일대에 분포한 대부분의 고인돌과 같은 것이다. 강원도 문화유산자료. (김규호) |
| 참고문헌 | 고인돌 유적 발굴조사(강원대학교박물관, 상무룡리, 1989), 양구 고인돌(강원대학교박물관, 1992) |
| 구분 | 용어 |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청동기시대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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