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 욕지도유적(統營 欲知島遺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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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경상남도 기념물(지정명칭은 통영 욕지도패총). 경상남도 통영군 욕지면 동항리 528, 529에 위치한다. 1988년, 한국전력공사 욕지면출장소 건물을 짓던 중에 유적이 파괴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통영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32㎞ 떨어져 있는 섬으로, 동서 약 6.5㎞, 남북 3.7㎞, 면적은 14.95㎢에 이른다. 통영군 내 가장 큰 섬으로 해안선은 굴곡이 매우 심하다. 인근 수역에서는 방어, 참치, 감성돔, 멸치 등이 잡힌다. 연평균 기온 14.7℃, 연강수량 1400mm로 해양성기후를 보이며, 온대 및 아열대작물인 밀감, 고구마 등이 재배된다. 이와 같은 온화한 기후와 기온, 알맞은 강우량, 충분한 수산자원 등의 자연조건은 신석기시대인에게도 적합한 환경이었다. 섬의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치우쳐 해발 392.4m의 천황봉이 우뚝 솟아 있고, 이를 중심으로 동쪽 사면의 말단부에 촌락이 군집되어 면소재지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의 면소재지 일부 지역은 과거에 바닷물이 들어왔던 곳으로 이를 매립하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유적이 해발 6∼10m 사이에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적이 조성될 당시의 해수면은 유적 앞까지 미쳤던 것으로 판단된다. 욕지도 면사무소 앞이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패총지구이며, 분포면적은 21,080㎡에 달한다. 발견 당시 표토에서는 홍도, 무문토기 등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현재는 경작지로 형상이 변경되었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퇴적양상은 대체로 Ⅰ층에서 Ⅳ층까지 4개의 자연층위로 구분된다. Ⅰ층은 현지표층으로 경작층이다. Ⅱ층은 흑색부식토와 패각층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나, 패각층 먼저 형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조사당시 설치된 E·F·G열 피트에서 확인된 돌무지시설 I과 2기의 무덤이 이 층에 해당하며, 각종 토기, 석기, 몸돌, 격지 등이 집중 출토된다. Ⅲ층은 흑갈색진흙층으로 A₃피트의 돌무지시설Ⅱ가 포함된 층이다. 융기문토기의 출토빈도가 Ⅱ층보다 높다. Ⅳ층은 생토와 구분되는 무포함층이다. 유구는 무덤이 포함된 돌무지시설 2기와 다 수의 기둥구멍 등이 확인되었다. 돌무지시설Ⅰ은 E3~E5, F3∼F5, G4피트의 Ⅱ층에서 조사되었으며 일부는 D4, D5, C5피트까지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10∼20㎝ 크기의 산돌과 냇돌이 9×6∼7m 범위에 깔려 있고, 돌 틈 사이에 각종 토기·석기·동물뼈 등이 박혀 있다. 돌무지시설 아래에서는 층위상의 변화 없이 두 곳에서 인골이 출토되었다. 당시의 집단무덤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출토된 인골에 따라 1호와 2호무덤으로 명명하였다. 1호무덤은 G4피트에 위치하며 인골은 어른 남자의 것으로서 1점과 대퇴부가 수습되었다. 출토된 상태로 보아 서침하고 있으며, 자연경사면을 따라 머리 쪽이 높은 곳에 위치한다. 묘광은 확인되지 않으며 두향이 바다 쪽을 향하고 있다. 2호무덤은 G4피트와 F4피트에 걸쳐 있으며, 1호무덤의 북동쪽에 인접한다. 이 무덤에서는 연령층이 서로 다른 2구 이상의 인골이 검출되었는데, 하나는 깊은 곳에 잠수를 하여 생기는 외이도골종(外耳道骨腫)이 있는 어른 남자이며 하나는 20세 전후의 여자였다. 두향은 서침으로 머리가 바닥 쪽을 향하고 있으며, 하반신 쪽에 패각층이 형성되어 있어 인골의 상태가 양호하다. 부정형의 묘광의 흔적이 있으나 수직각을 이루지는 않는다. 돌무지시설Ⅱ는 A8피트의 Ⅲ층에서 조사된 것으로 돌 틈과 돌무지 아래에서 융기문토기와 빗살무늬토기가 섞여 출토되었다. 그러나 돌무지시설Ⅰ에서보다 융기문토기의 출토빈도가 더 높은 편이다. 또한 돌의 크기가 상당히 크고 정연성은 떨어지며, 범위도 사방 3m 가량이어서 돌무지시설Ⅰ과는 외형상 다르다. 돌무지 가장자리 일부에서는 소토가 확인되었다. 보고자는 이 유구를 3호무덤으로 명명하고 있다. 1호·2호 무덤보다는 아래층이다. 돌무지 아래에는 다량의 토기, 석기들이 집중되어 있다. 뗀석기 여러 점과 흑요석제 석촉 2점, 흑요석제 작살 1점이 출토되었다. 한편 이들 돌무지시설에 대해서 돌무지 사이에 각종 생활용 석기와 몸돌, 격지 등이 다량 박혀 있으며 돌무지 아래에서 조사된 기 둥구멍과 소토 등으로 미루어 석기제작소 혹은 임시주거지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연구자도 있다. 4호무덤은 D2피트 북동모서리에서 인골이 검출된 사진만 보고되었다. 상부 교란이 있고 대퇴골 외에는 골편이 없어 유구로 보고하지 않았으나, 대퇴골을 덮고 있는 콩알무늬의 주칠토기, 주위에 없는 큼직한 돌의 존재 등으로 보아 무덤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대퇴골의 상태로 보아 남서침이며 묘광은 확인되지 않는다. Ⅱ층의 바닥 혹은 Ⅲ층의 상부에 속한다. 인골을 덮고 있는 토기는 형태가 특이한 주칠토기이다. 몸통과 거의 직각되는 아가리를 그릇 안쪽에 붙이고 세로로 길쭉한 두립문 모양의 띠를 약간 바라지게 세웠다. 아주 고운 모래질 바탕흙에 안팎면 모두 주칠하였다. 기둥구멍은 공반관계를 알 수 없어 성격이 명확하지 않다. 대부분 정연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 모두 Ⅲ층의 흑갈색진흙층을 파고 설치된 것들이다. D4피트와 E3피트에서 확인된 기둥구멍은 지름 15㎝, 깊이 10∼15㎝ 가량이며, 일정 부위에 집중되어 있는 듯하다. 돌무지시설Ⅰ의 아래층에서 조사된 것은 2호무덤 주위에 집중되어 있다. G3피트에서 조사된 구멍은 지름이 20㎝, 깊이 30㎝ 가량으로 상대적으로 크나 나머지는 소형이거나 깊이도 10∼15㎝로 얕다. 2호무덤의 두개골 북쪽에 인접한 기둥구멍은 바닥에 2매의 소형 판석이 2중으로 놓여 있어 특이하다. 소토 덩어리는 D5피트 Ⅲ층에서 4∼5개소가 확인되었다. 서벽 쪽의 것과 중앙부에 있는 것은 30∼50㎝ 규모로 타원형태를 띠고 있고, 범위도 크며 부분적으로 불탄 정도가 심한 편이다. 두께도 15㎝ 이상 되어 한 번에 굽혀진 것이 아니라 꽤 장기간 굽혀진 것으로 파악된다. 연대도유적 출토 토기들은 1층에서 4층까지 신석기시대 마지막 단계의 이중구연토기나 중기(기원전 2000년경)의 두도태선문(頭島太線文), 압날단사선문, 어골문, 삼각집선문, 능형집선문, 그리고 이른 시기(기원전 4000∼2000년경)의 압인문(押引文)과 융기문토기까지 섞여 있다. 크게 교란되었지만 남해안 신석기시대의 전 기간에 걸쳐 생활했던 유적으로 보인다. 구경이 40㎝가 넘는 대형의 토기들도 많아 당시 이곳 사람들의 살림살이 규모가 컸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평저토기와 원저토기가 공반되고 장경호, 엽맥문(葉脈文)의 저부, 붉은간토기[紅陶]와 무문양의 토기도 많다. 이들은 모두 남해안 신석기유적의 출토양상과 일치한다. 석기 또한 화살촉, 작살, 긁개, 그물추, 찍개, 혼펠스로 만든 도끼, 끌, 자귀, 갈판과 갈돌, 숫돌 등 다양한 종류가 다량으로 출토된다. 재료는 혼펠스가 가장 많고 흑요석제 화살촉과 박편도 두드러진다. 골각기로는 사슴 뼈로 만든 찌르개가 많고 낚싯바늘, 화살촉, 작살, 조개팔찌도 있다. 멧돼지 이빨이나 바다사자 이빨로 만든 장신구도 있다. 멧돼지로 보이는 토제품도 나왔다. 욕지도유적은 신석기시대 유적 중 최초로 인골과 함께 무덤이 나왔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더구나 인골의 분석을 통해 이들의 잠수 행위도 밝혀낼 수 있었다. 욕지도유적은 입지로 보아 물고기잡이나 조개채취 등의 어로생활이 가장 주된 생업이었을 것이나, 출토 유물로 보아 사냥의 비중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유적의 점유연대는 신석기 전 기간이었으나, 중심연대는 태선침선문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중기(기원전 2000년경)로 판단된다.(임학종) |
참고문헌 | 욕지도(국립진주박물관, 1989), 우리나라 남해안지방의 신석기문화연구(신숙정, 학연문화사, 1994), 신석기시대의 무덤(임학종, 한국신석기연구15, 한국신석기학회, 2007) |
구분 | 유적 |
사전명 |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신석기시대편) |
만족도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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