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遼寧式銅劍)
설명 검몸(劍身)의 형태가 비파(琵琶)처럼 생겼다고 하여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라고 부르며, 요녕(遼寧)지방에서 주로 출토되었다고 하여 ??요녕식동검(遼寧式銅劍)??, 고조선과 관련되었다 하여 ??고조선식동검(古朝鮮式銅劍)??, 곡선형의 날을 가졌다고 하여 ??곡인동검(曲刃銅劍)??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검신의 아래 부분이 둥글게 배가 불러 비파형태를 이루며 검신 중앙부에는 돌기(突起)가 있고, 이 돌기 양쪽으로 날이 약간씩 휘어 들어갔다. 슴베가 그대로 연장되어 검신의 중앙부에서 등대(脊突)를 이루며 칼날의 돌기부와 병행한 등대부분에는 마디가 있어 약간 도드라져 있다. 검자루(劍把) 부속은 따로 만들어져 ??ㅗ??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검몸과 검자루를 따로 주조(鑄造)하여 결합시킨 것은 세형동검으로 계승되는 특징이다. 비파형동검은 중국식동검이나 오르도스식의 동검과 달리 자루가 별도로 제작되는 형식으로 주변 민족의 청동단검과 구분되면서 요하(遼河)유역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까지 가장 많이 출토되는 청동유물이다. 또한 요하와 북만주 그리고 한반도의 각 지역별로 구분되는 형태적 차이를 보여주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정하게 변하는 형식적 특징도 갖추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 청동기문화의 변천과정을 살피는데 기준이 되는 표지유물(標識遺物)로서 청동유물 중 가장 많이 연구되어 왔다. 한반도에서는 현재까지 약 40여 자루가 알려져 있는데, 함경도지방을 제외하고 거의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발견되는 유적은 요하 유역에서는 돌무지무덤(積石塚)과 움무덤(土壙墓), 한반도(韓半島)에서는 돌널무덤(石棺墓)과 고인돌(支石墓)에서 출토되고 있다. 최근까지 한반도에서는 고인돌에서 출토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왔는데, 전남지방 보성강유역과 여수반도의 기반식(南方式)고인돌에서 수 점의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바 있다. 해방전에 비파형동검은 그 숫자도 얼마되지 않아서 세형동검의 이형(異形)에 지나지 않고, 전형적인 세형동검(細形銅劍)보다 늦은 형식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다가 19 60년대에 들어와 남한의 김원용(金元龍)과 북한의 정찬영이 비파형동검은 세형동검의 선행(先行) 형식 내지 직접적 조상이라 주장하게 된다. 1960년에 중국 遼寧 十二臺營子에서 한반도 세형동검과 세문경(細文鏡)의 조형(祖形)으로 보이는 비파형동검과 조문경(粗文鏡)이 출토되고, 충남 부여 송국리(松菊里) 등 한반도 여러 곳에서 비파형동검이 발견되면서, 명실공히 세형동검에 앞서는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동검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비파형동검의 형식 분류는 전체길이, 검몸의 폭과 밑부분의 곡선 정도를 기준으로 삼는데, 그러한 분류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어서, 연구자마다 형식 분류의 차이가 나고, 심지어는 그 선후관계에 대해서 정반대의 입장을 보이기까지 한다. 비파형동검의 형식분류는 북한에서 1960년대에 遼寧 旅大市 崗上과 樓上 무덤의 비파형동검을 각각 전형과 변형으로 나눈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남한에서도 1970년대에 김원용의 2대 분류안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송국리식(松菊里式)의 고식(古式)과 十二臺營子式의 신식(新式)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 와서 북한과 남한 모두 3분법의 형식분류가 통용된다. 북한에서는 전형에 앞서 새로운 二道河子-?房式을 설정하여 초기형으로 하고, 앞서 崗上式의 전형을 중기형, 樓上式의 변형을 후기형으로 파악했다. 남한에서 김정학(金廷鶴)도 3분법을 취하여 전기형에 二道河子, 十二臺營子, 중기형에 鄭家窪子 그리고 寺兒堡?亮甲山 출토 동검을 후기형으로 하여 형식 분류를 하였다. 이처럼 남북한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된 비파형동검 형식의 3분법에 따르면 일단 十二臺營子式과 二道河子式이 구분되는 것은 인정되는데, 두 형식의 분류 기준은 전반적으로 길이의 차이와 돌기의 위치가 검끝에서 어느 길이만큼 내려와 있는가 하는 데에 있다. 구체적으로 돌기의 위치가 검끝에서부터 검몸의 1/3, 1/2 이하이라는 치수를 제시하여 분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잣대에 맞추면 鄭家窪子, 용흥리(龍興里) 등의 동검은 1/2 이상의 것이 되며 , 아울러 검몸 아래의 곡선도가 약해지므로 또 다른 제3의 형식인 鄭家窪子式이 자연스럽게 분류된다. 鄭家窪子式은 비파형동검의 검몸 폭도 좁아지고, 또한 이 형식의 요녕지방 출토 검에는 청동제 검자루맞추개(靑銅製 劍把頭飾)가 딸린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하면 결국은 十二臺營子式, 二道河子式, 鄭家窪子式의 3형식이 분류되게 된다. 3분법의 분류방식이 나타나면서 어떤 것이 가장 오래된 형식인가를 따지는 문제가 가장 논란이 되었다. 문제는 요서(遼西)의 南山根-十二臺營子式과 요동(遼東)의 ?房-二道河子式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빠른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전자가 빠르다고 보는 것은 중국학자이고 후자가 빠르다고 보는 사람들은 북한학자들이다. 중국학자나 북한학자들은 검몸은 폭이 넓은 것에서 좁은 것으로, 봉부는 짧은 것에서 긴 것으로 변한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중국학자는 검 전체로 봐서는 길고 큰 것으로부터 짧고 작아진다고 보는 반면, 북한학자는 이와는 정반대로 주장한다. 또한 북한학자는 앞서 검몸(劍身)과 봉부(鋒部)의 속성 상태를 통한 변천 기준을 요녕지방 전체 출토 동검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데, 중국학자는 요동지방 출토 동검은 지방의 특수형이라 하여 예외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있다. 남한에서도 이미 1970년대 중반 이후 김원용과 김정학은 검날 돌기의 위치가 검날 상부에 치우쳐 있는 것이 오래되었다는 점을 들어 二道河子 동검이 十二臺營子 동검보다 이른 시기의 것으로 파악한 바 있다. 결국 유물 속성 상태의 변화순서를 다르게 파악하고, 형식의 차이가 지역성을 반영하는가 아닌가하는 판단에 따라, 동검의 변천과정에 대한 이해가 엇갈리는 것이다.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의 구분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문헌사학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자면 비파형동검은 동호족(東胡族), 세형동검은 고조선족(古朝鮮族)의 것이라고 하거나 혹은 비파형동검은 전기 고조선시기, 세형동검은 후기 고조선시기의 것으로 주장되는 사례가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각각의 동검 형 식이 일정한 종족 혹은 국가 집단이거나 시기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정 집단과 동검이라는 특정 유물의 형식과 연결짓는 것은 일정단위의 유물수준의 고고학자료가 갖는 문화적, 사회적 해석상의 한계를 간과한 것이다.
참고문헌 비파형단검 문화에 관한 연구(황기덕 외,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8), 論中國東北地區含曲刃靑銅短劍文化的遺存 上?下(?楓毅, 考古學報 1982-4?1983-1, 1983), 十二臺營子의 靑銅短劍墓(金元龍, 歷史學報 16, 歷史學會, 1961)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사전(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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