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적/용어명 | 민무늬토기(無文土器) |
|---|---|
| 설명 | 민무늬토기의 개념 : 한국 청동기시대의 토기를 일괄해서 일반적으로 ??민무늬토기??라고 하나 민무늬토기(無文土器)라는 용어는 원래 과거 일본인학자들이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는 물론 간토기(磨硏土器)와도 구분하였던 용어이다. 이러한 개념을 충실히 따라서 북한에서는 청동기시대의 토기를 갈색민그릇과 간그릇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지만, 남한에서는 마연(磨硏)이나 채색(彩色) 등의 표면처리 수법에 관계없이 통틀어 민무늬토기라고 한다. 민무늬토기란 문자 그대로라면 무늬가 없는 토기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청동기시대에 속하는 토기 중 지역에 따라서는 평북 신암리토기(新岩里土器)를 비롯하여 무늬가 장식된 예가 많다. 또한 시대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남한에서 실제 사용한 예를 보면 민무늬토기는 청동기시대의 토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B.C. 3세기 이후 철기시대에 후기형식의 민무늬토기, 그리고 B.C. 1세기경 한대(漢代) 철기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을 때도 여전히 민무늬토기가 사용되었다. 심지어는 남한의 원삼국시대 혹은 삼국시대 전기에 타날무늬토기(打捺文土器)와 공반하는 무늬없는 토기, 예를 들어 한강유역의 중도식토기(中島式土器)를 민무늬토기로 보기도 하는데 이 경우 민무늬토기 개념이 지나치게 확대, 적용된 것으로 시대적 의미가 약해지기 때문에 곤란하다. 나아가서 민무늬토기를 시대의 표지유물(標識遺物)로 보아 청동기시대를 대신하여 사용하는 ??민무늬토기시대??라는 개념은 청동기뿐만 아니라, 철기 사용기에 두루 걸쳐 지나치게 포괄하는 시대개념(時代槪念)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아울러 남한지방 위주의 지역적 시대개념이라는 한계가 있어 한국고고학의 범위를 남한에 한정하는 결과를 낳게 됨을 유의하여야 한다. 토기는 집단마다 즐겨 쓰는 그릇모양과 무늬장식이 다르므로, 토기장식 등의 구성요소를 살펴서 집단의 지리적인 활동범위나 그 전파과정(傳播過程)을 추적할 수 있다. 아울러 각기 다른 형식의 속성이나 기종이 복합된 토기를 통해 서로 다른 집단의 문화적 결합을 밝힐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토기 형식의 분류와 분석은 그 일차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데, 형식 이름은 대체로 출토되는 지명을 따거나 특징적인 형태를 근거로 명명한다. 한반도 민무늬토기의 편년은 대체로 지역별로 이루어져 전체적으로 공통된 변천과정(變遷過程)을 기준한 시기구분이 곤란하다. 일반적으로 요하(遼河)와 북한지방에서는 신석기시대 토기에서부터 점진적인 이행과정을 거쳐 민무늬토기로 발전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남한지방에서는 같은 지역의 신석기시대 토기와는 형식상 서로 연결되지 않는 단절된 교체양상(交替樣相)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남한에서 통용되는 민무늬토기의 전?후기 시기구분이 한반도 전역의 청동기?철기시대의 토기변천과 맞물리는 것이 아님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각 지역별로 살펴보면 우선 요하와 압록강 유역에 걸치는 지역의 경우 旅大市 雙?子 유적 출토 토기와 평북 신암리의 토기가 대표되는데, 압록강 이남에서 출토되는 대부분의 토기와 달리 점선, 줄무늬와 꼭지 모양의 돋을 무늬 장식이 있고, 접시와 보시기 또는 단지에 굽이 달린 그릇이 많은 것이 특이하다. 또한 그릇 아가리를 2겹으로 싼 겹 아가리가 특징적인데, 겹 아가리는 旅大市 肇工街 유적 출토토기에서 주종을 이루어서 ??자오꽁지에식토기(肇工街式土器)??로 명명된다. 자오꽁지에식토기 속성은 한반도 남해안과 제주도에까지 퍼져 신석기시대 말기의 빗살무늬토기와 결합하는데 방사성탄소연대자료로 보아 B.C. 1500~1000년에 속한다. 대동강 유역에서는 신흥동식토기(新興洞式土器)로 대표되는데, 넓은 입 지름에 바닥이 매우 좁아 팽이처럼 생긴 팽이형독형토기가 특징적이다. 또한 겹 아가리를 하고 짧은 빗금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공반되는 항아리형토기(壺形土器)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겹아가리의 특징은 앞서 자오꽁지에식의 토기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신흥동식토기는 같은 지역의 빗살무늬의 반란형(半卵形)토기로부터 발전한 것이 금탄리(金灘里) 유적의 층위적 발굴에서 확인된 바 있다. 두만강 유역에서는 회령 오동(五洞)에서 출토된 오동식토 기(五洞式土器)로 대표되는데, 보통의 갈색 민무늬토기와 함께 붉은간토기(紅陶)가 공반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갈색토기는 살짝 밖으로 벌어진 아가리에 입 지름이 넓은 민무늬의 독형토기(甕形土器)가 표지적(標識的)이고, 아가리에 구멍무늬(孔列文)나 입술면에 톱날장식(口脣刻目)이 있거나, 동체에 꼭지나 나무그루 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예도 있다. 붉은간토기에는 항아리형과 깊은 바리형(鉢形)이 있는데 앞서 구멍무늬장식의 갈색토기와 함께 남한지방으로 전파되어 남한식 토기의 주종을 이룬다. 구멍무늬와 입술면의 톱날장식은 시베리아의 신석기시대 토기에서 많이 보이는 장식요소로, 신석기시대 토기에서 점진적으로 민무늬토기로 발전한 요하 유역 토기와 계통상의 차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압록강 중류 유역의 공귀리식토기(公貴里式土器)는 평안북도 강계시(江界市) 공귀리(公貴里), 시중군(時中郡) 심귀리(深貴里), 노남리(魯南里), 중강군(中江郡) 토성리(土城里) 등에 분포하고 있다. 토기의 형태는 화분형의 납작밑(平底)토기에 혹꼭지가 달린 것, 짧은 목의 고구마형 그릇에 구멍꼭지가 달린 것의 2가지가 기본적이다. 태토(胎土)에는 모래, 운모가 섞이고 색조는 흑갈색이다. 모두 바닥이 몹시 작은 것이 특색이며, 화분형 토기 중에는 함경도 토기의 영향을 받아 아가리(口緣部)에 공렬(孔列)을 돌린 것도 있다. 즉, 두만강 유역의 오동식토기 속성이 보이는 한편 요하~압록강 하류~대동강 유역의 토기 속성인 겹 아가리의 토기(二重口緣土器)도 있어 두 지역으로부터 문화적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여 준다. 한강 유역의 토기는 역삼동식토기(驛三洞式土器)가 대표적인데, 앞서 두만강 유역의 토기에서 보이는 구멍무늬 아가리와 붉은간그릇토기가 특징적이고, 입술면에 톱날장식이 함께 새겨져 있다. 구멍무늬장식은 항아리형토기에는 이용되지 않고 주로 깊은 바리의 아가리에 장식되며, 붉은간그릇토기는 작은 단지 모양의 토기가 많다. 민무늬토기의 지역적 발전 : 대체로 본격적인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 사용기가 되면 민무 늬토기의 분포권은 더욱 확대되어 북으로는 송화강 유역, 남으로는 금강, 영산강 그리고 낙동강 유역뿐만 아니라 멀리 제주도까지 이른다. 우선 요하에서 압록강 하류에 이르는 지역에 있어서 비파형동검 사용기의 표지적인 토기로는 의주 미송리(美松里) 동굴유적에서 처음 확인된 미송리형토기(美松里型土器)가 있다. 전형적인 미송리형토기는 표면을 마연하고 납작 항아리 양쪽 옆에 손잡이가 달렸으며, 폭이 넓게 올라가다가 다시 안으로 오므라들면서, 동체와 목에 묶음식 대선문(帶線文)을 두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미송리 항아리형토기와 공반하는 깊은 바리에는 전 단계에 유행하였던 겹아가리가 많다. 이 지방의 미송리형토기는 다른 지방으로 퍼져 송화강 유역에서는 시투안샨쯔형(西團山子型), 청천강 유역에서는 묵방리식(墨房里形) 등으로 지역화하여 나타난다. 나아가 대동강 유역에서는 평양 남경 출토 검은간토기를 미송리형토기로 보기도 한다. 송화강 유역에서는 앞서 말했듯이 미송리형토기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시투안샨쯔형토기(西團山子型土器)가 초기 부여의 표지유물로 보고, 양자 사이에 나타나는 토기형식의 유사성을 들어 고조선과 부여 주민간에 교류와 친분이 있었다고 북한학자들은 주장한다. 한강 유역과 그 이남지방에는 대동강 유역의 신흥동식토기가 지역화한 가락동식토기(可樂洞式土器)가 있는데, 겹 아가리의 빗금무늬가 연속적으로 시문(施文)되고, 전체 그릇 모양은 바닥이 넓어져 팽이형(角形)에서 화분형(花盆形)으로 바뀐다. 같은 한강 상류의 흔암리(欣岩里) 유적 출토토기는 구멍무늬장식의 역삼동식토기와 겹 아가리의 가락동식토기가 공반되거나 두 형식의 토기 속성이 복합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종을 이루는 것은 두만강과 함남지방에서 유행하던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이다. 함남지방 금야(金野) 유적 출토토기로 대표되는 금야식토기(金野式土器)도 구멍무늬장식과 꼭지손잡이가 특징적인데 동해안을 따라 남쪽 울산 검단리(檢丹里)까지 이른다. 흔암리식토기도 남쪽으로 퍼져 제주도 대정 상모리(上慕里) 유적까지 이른다. 한편 금강, 영산강 유역에는 금강의 부여 송국리(松菊里) 유적 출토토기로 대표되는데, 아가리가 살짝 바깥으로 벌어지고 동체가 길쭉한 고구마형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도 붉은간토기 단지와 대접 모양의 토기가 공반된다. 송국리식토기는 원형 집자리, 삼각형돌칼(三角形石刀) 그리고 홈자귀(有溝手斧) 등과 함께 이 지역의 독특한 유물?유적복합군을 이루고 있다. 민무늬토기의 후기 형식과 새로운 토기의 등장 : 요동지방과 청천강 이북에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연(燕)나라 화폐 명도전(明刀錢)과 다량의 철제물이 발견된다. 이는 B.C. 3세기경 전국시대 중국문화가 이 지역에 미쳤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와 함께 중국식 회도기법(灰陶技法)의 토기도 이 지역에 함께 유입된다. 민무늬토기와 달리 돌림판(回轉板)을 이용하여 형태를 빚은 다음 밀폐 가마에서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워낸 것으로 토기를 굽는 온도는 민무늬토기보다 높다. 이와는 달리 전국계 철기의 보급이 미미한 청천강 이남지역의 토기는 민무늬토기 수법을 그대로 계승한다. 그 대표적인 것은 남한지방에 유행하는 수석리-괴정동식(水石里-槐亭洞式)의 점토띠토기(粘土帶土器)이다. 이 토기는 아가리에 점토띠를 붙여 돌려가면서 붙인 것으로 처음에는 단면이 원형(圓形)을 이루다가 후기로 가면서 삼각형으로 변한다. 이 토기형식의 조형으로 주목되는 토기는 요녕지방의 旅大市 二道河子를 비롯한 초기 세형동검(細形銅劍) 출토 유적의 겹 아가리 토기이다. 한편으로 이 점토대토기가 대동강 유역의 신흥동식 겹아가리토기로부터 발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점토대토기와 함께 검은간토기(黑陶)는 대전 괴정동 돌덧널무덤(石槨墓)에서 출토된 것이 대표적으로 긴 목에 둥근 동체(胴體)가 달린 것이다. 이러한 토기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부장된 沈陽 鄭家窪子 무덤에서도 출토되었으며, 점토대토기와 함께 계승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
| 참고문헌 | 청동기?철기시대의 사회와 문화(이청규, 한국사 1, 한길사, 1994), 남한지방 무문토기의 전개와 공렬토기의 위치(이청규, 한국상고사학보 1, 한국상고사학회, 1988) |
| 구분 | 용어 |
| 사전명 | 한국고고학사전(2001) |
만족도조사
유용한 정보가 되셨나요?
- 담당부서 :
- 문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