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망양돈대(江華望洋墩)
설명 인천광역시 기념물.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680번지 외포리 포구의 서쪽 구릉 정상에 위치한다. 돈대가 위치하고 있는 구릉의 지세는 서쪽이나 북쪽에 비해 남쪽과 동쪽의 경사가 급한 편이며, 돈대는 서남향이다. 외포항과 황청리 해안선을 조망할 수 있는 돌출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근 황청리 소재 삼암돈대와 건평리 소재 건평돈대에 대응하여 교차사격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돈대 각 면의 길이는 32m 가량으로 정방형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둘레는 130m이다. 석벽의 안팎을 40∼60㎝사이의 화강암 할석을 이용해 퇴물림하여 쌓아올렸고 내부를 잡석과 흙으로 채운 내외 협축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외측의 높이는 3.4∼4m, 내측의 높이는 0.8∼1.3m로 일정치 않다. 석벽의 두께는 4.3m 가량이며, 그랭이질을 한 석재에 사이돌을 넣어 견고함을 더하였다. 남면과 북동면 일부에만 석축이 남아있던 것을 최근에 성첩까지 완전하게 보수·복원하였다. 북벽에 돈대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을 두었으며 남벽에 2좌, 동·서벽에 각각 1좌의 포좌를 배치하였다. 조선 숙종 4년(1678) 강화도 해안에 48개의 돈대를 축조하자는 병조판서 김석주의 건의에 따라 그 해 12월 강화도 마니산과 별립산 등에서 돈대 건립에 사용할 석재를 채석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679년 3월 강원도, 전라도, 충청도, 함경도의 승군 8,000여명을 돈대의 축조에 동원하면서 본격적인 공사가 착공되었다. 4월 김석주는 자신이 대장으로 있던 어영청의 병사 4,000여명을 재차 동원하여 착공한 지 80여일 만에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당시 채취한 석재는 생칡으로 묶어 수레와 배로 운반하였다. 운반된 석재를 다시 다듬은 뒤에 녹로(??)를 이용하여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이때 석축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소나무 메를 이용하여 다져가며 쌓았다. 체성(體城)의 축조를 완료한 뒤 성첩을 조성하였는데 석모도에서 채취한 박석(薄石)을 석회로 붙여가면서 쌓아 올렸다. 돈대에 설치한 문은 판자로 틀을 짠 뒤에 박철(朴鐵 )을 대어 만들어 붙였다. 당초 정포보 만호가 관할하도록 하였으나, 『강도지(江都誌)』에 따르면 숙종 22년(1696)에는 종9품의 망양돈대 별장을 별도로 배치하여 삼암돈대와 석각돈대를 관할하고 있었다. 후에 다시 정포보에 배속되었으며, 내부에 건물을 두어 창고와 수직(守直)하는 병사의 숙소로 삼았다.(배성수)
참고문헌 강화의 문화유적(대한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 2002), 숙종초 강화도 돈대의 축조와 그 의의(배성수, 조선시대사학보 27, 2006)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성곽봉수편) - (성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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