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용어명 신라 고배(新羅高杯)
설명 고배는 일반적으로 초기 철기 시대(初期鐵器時代)의 두형토기(豆形土器)를 그 조형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이 원삼국 시대(原三國時代)에 와질토기(瓦質土器)에 영향을 주어 고식(古式) 와질토기 단계에서는 영남 일부 지역에서만 제작되다가 이른바 후기 단계인 신식(新式) 와질토기에서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이때 제작된 와질제 고배 중 배신(杯身)이 깊고 큰 것은 반구형(半球形)의 신부에 구연부(口緣部)는 외반하고 대각부(臺脚部)는 ‘八’자상으로 벌어지나 후기로 갈수록 대각의 직경이 줄어들고 길이가 늘어나는 변화 양상을 보인다. 이것이 4세기 초에 발생하는 통형고배(筒形高杯)에 영향을 준다. 반면에 배신이 얕고 편평한 작은 것은 큰 것에 비하여 약간 늦은 단계에 출현하여 후기로 갈수록 배신은 깊어지고 대각부의 직경이 넓어지는 변화를 보이다가 고식 도질토기(古式陶質土器)의 단계에서 외반구연고배(外反口緣高杯)로 변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에 발생한 것으로 이해되어 온 고식 도질토기는 신식 와질토기의 제작 기법과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보이나 토기를 제작함에 있어서 소성 온도의 차이가 심하여 새로운 가마(窯)가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가마에 대한 조사가 미진하여 도질토기의 발생지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현재까지 조사된 결과로 보면 경주·김해·함안 지역을 그 후보지로 볼 수 있다. 원삼국 시대 이들 지역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진한(辰韓)과 변한(弁韓) 지역으로 비교적 강력한 소국이 있었으며, 이들 소국이 성장하여 고식 도질토기 단계인 4세기 대에 경주의 사로국(斯盧國), 김해의 금관가야(金官伽倻), 함안의 아라가야(阿羅伽倻)가 독자적으로 토기를 생산하였다. 따라서 각 소국에서 제작된 고배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것을 신라 조기 양식(新羅早期樣式), 김해 지역에서 생산된 것을 금관가야 양식, 함안 지역에서 생산된 것을 아라가야 양식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식 도질토기라 불리는 신라 조기 양식 토기 중에서 가장 빠 른 고배는 경주 덕천리 59호·66호, 황성동 575-32번지, 울산 중산리 1A-26호 출토품으로 주로 소형이다. 그 특징은 배신이 얕고 대각부가 크게 벌어진다. 같은 시기 대형은 그 형태가 다양하여 경주 봉길리 사토장 가-7호 출토 고배는 대각이 ‘八’자상이나, 월성해자 출토품과 경주 죽동리 1호 출토품은 배신이 깊고 대각이 높은 무개식(無蓋式) 통형고배의 형태이다. 이들은 대략 4세기 중반경으로 편년된다. 4세기 중반 후엽에는 황성동 590-98번지, 월성로 가-6호로 대표되는 대형의 유개식고배(有蓋式高杯)와 경주 황오동 385-10번지, 인왕동 C군 5호 출토품처럼 통형의 무개식고배(無蓋式高杯)가 나타난다. 유개식고배의 경우는 금관가야 지역보다 출현 시기가 늦다는 이유로 가야의 영향이나 교역 관계의 소산으로 생각하기도 하며, 통형 무개식고배의 경우도 함안 지역보다 연대가 늦고 수량이 적어 아라가야 지역에서 이입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빈도(頻度)와 연대의 차이는 인정되지만 현재까지의 자료로 판단해 보면 각 국(國)이 공통적으로 제작하다가 선호도(選好度)에 의해 선택된 결과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리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반에 이르면 공통 양식(共通樣式)의 신라·가야 조기 양식에서 신라 토기(新羅土器)와 가야 토기(伽倻土器)로 분화가 명확히 이루어져 신라만의 독특한 고배가 만들어진다. 성립기 신라 토기 양식은 월성로 가-13호, 황남동 109호 3·4곽, 황오동 100번지 등에서 확인되었다. 이 양식의 토기군 특징은 모든 기종에 다치구(多齒具)로 시문한 밀집파상문(密集波狀文)과 집선문(集線文)의 존재, 단경(短頸)에서 장경(長頸)화로의 전환, 대각(臺脚)의 부착, 투창(透窓)의 교차 배치, 박자에 의해 파생된 문양으로 승문 타날(繩文打捺)에서 격자 타날(格子打捺)로의 변화 등에서 신라 토기 제작 기법의 특성을 볼 수 있다. 또한 기종에서도 이단투창고배(二段透窓高杯), 일단투창고배(一段透窓高杯), 대부완(臺附?), 장경호(長頸壺), 단경호(短頸壺 ) 등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고배의 경우 완전한 유개(有蓋)화 및 제형(梯形) 대각에 상하 교차 배치하는 투창의 정형화가 이루어지고, 뚜껑의 경우 밀집파상문의 시문 및 굽형 꼭지에 투창을 뚫는 등의 정형화가 된다. 또 일단투창고배의 기종 정착과대부완 및 유개완(有蓋?)의 제작이 이 시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전기(前期)의 고배는 월성로 가-13호분에서 출토된 유개고배와 무개고배가 있다. 유개고배의 특징을 보면 탑형(塔形)의 꼭지를 부착한 편평한 뚜껑을 가지며 밀집파상문을 시문하였다. 대각부는 제형(梯形)으로 길게 뻗어내리고 굵은 돌대(突帶) 2조를 돌려 3분한 다음 상단과 중단에 제형 투창 4개를 교차(交差)로 배치하였다. 배부는 깊으며 뚜껑받이턱이 강하게 돌출하였고 구연부는 내경한다. 무개고배는 깊은 배신을 지니고 상단에 1조의돌대를 돌려 형식적으로 뚜껑받이턱을 만들었다. 대각부는 제형으로 단부(端部)는 나팔상으로 벌어지고 1조의 돌대를 2개 돌려 3분한 다음 상단과 중단에 각각 장방형투창 4개를 상하 일렬로 배치하였다. 이 고배류는 전기양식을 형성하는 단계로 전체적으로 신라 조기 양식 고배의 전통과 제작 기법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다. 중기(中期)는 신라 토기 양식이 완성된 단계의 고배로 황남동 110호분을 거쳐서 황남대총 남분 단계에서 완성되었다. 이단투창유개고배의 특징을 보면 뚜껑은 대각도치형(臺脚倒置形)의 꼭지를 부착한 신부에 침선을 1조 돌리고 상하단에 집선문이나 사격자문(斜格子文)을 시문한다. 고배는 전기보다 기고(器高)가 낮고 대각부는 절두원추형(截頭圓錐形)으로 곧게 뻗어 내리고 굵은 돌대 2조를 돌려 양분한 다음 상단과 하단에 제형 투창 4개를 교차로 배치하였다. 배부는 꺾인 ‘V’자상을 이루면서 깊으며 뚜껑받이턱이 돌출하였고 구연부는 약간 내경한다. 이 고배류는 미완성된 전기 양식에서 완전히 정형화(定型化)된 신라 고배를 형성한 단계이며, 이후부터 후기 양식까지 이어지며 가야 지역의 고배와 완전히 구분되는 표지적(標識的) 양식이다 . 후기(後期)는 신라 고배가 규격화 및 표준화를 이루는 시기로 금관총·천마총·금령총 등에서 확인되었다. 이 시기의 이단투창유개고배의 특징은 뚜껑은 단추형의 꼭지를 부착한 신부에 침선을 1조 돌리고 상하단에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사격자문·원권문(圓圈文)을 시문한다. 고배는 중기보다 전체적으로 기고가 낮고 배부와 대각부의 길이가 비슷해지며 대각부의 직경이 좁아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대각부는 ‘八’자상으로 벌어지며 외반(外反)하고 중앙에 2~3조의 돌대를 돌리고 양분한 다음 상단과 하단에 제형 투창 3~4개를 상하 교차로 배치하였고, 대각단부는 외측으로 약간 꺾인 형태이다. 배부는 말각(末角)된 반구형(半球形)을 이루면서 깊으며 뚜껑받이턱이 돌출하였고 구연부는 크게 내경한다. 이 고배류의 특징은 문양이 다양하고 화려해지며 압인문(押印文)으로 이행하는고배의 전 단계이다. 이후 후기 신라 토기 양식 고배는 전체적으로 소형화가 이루어진다. 신라의 고배는 형식 분류를 통해 고분을 비롯한 다양한 유적의 상대적인 편년을 결정하는 지표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양식적 분포 범위를 통하여 지역의 경계(境界)와 국가나 정치체의 귀속(歸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일차적인 자료로 고고학의 학문적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유물이다.(박광열)
참고문헌 慶州金冠塚と其遺物 古蹟調査特別報告(濱田耕作·梅原末治, 朝鮮總督府, 1927), 신라고고학연구(이희준, 사회평론, 2007), 경주 금관 총발굴조조사보고서-국역-(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1), 황남대총(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2011)
구분 용어
사전명 한국고고학 전문사전(고분유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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