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주얼

동남산

감실불상(龕室佛像)


동남산(東南山) 감실불상(龕室佛像)은 남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라고 추정되는 중요한 문화재다. 그런데도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는 없다. 앞으로 이 불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적어둔다.

1986年 여름 어느날 장곡천(長谷川)라는 일본인이 KBS 방송국 직원과 같이 왔다. 방송국 직원은 나와 한 고향 사람이라 몇번 만난 일이 있지만 장곡천(長谷川)씨와는 처음 본 사이다. 이 사람은 「용왕(龍王)이 찾아온 길(용왕(龍王)の來た道」이라는 책을 쓰기 위해 한국에 답사오는 길이라 했다. 한국에서는 석굴암(石窟庵)불상이 대왕암(大王巖)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는데 자신으로선 그것이 의심스러워 찾아온 것이라 했다. 자기는 석굴암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이 동짓날 해뜨는 방향이 아닐까고 생각한다며 말을 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동짓날을 두려워 했습니다. 낮이 자꾸 짧아져가니 ‘이러다가는 낮이 없는 밤만의 세상이 오지 않을까?’ 두려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동짓날부터 낮이 조금씩 길어져서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니 동짓날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옛날 사람들은 설날보다 동짓날을 더 소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동짓날 해뜨는 방향으로 서 있는 신사(神社)도 절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곳 지명(地名)이 대개 도기(とき)입니다. ‘도기’는 한국말로‘도지’[돋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한국에도 동짓날 해뜨는 방향으로 있는 유적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온 것입니다.”하면서 궁금해 했다.

“네, 이곳에도 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라의 해의 신(日神)이었던 연오랑(延烏郞)과 달의 신(月神)이었던 세오여(細烏女)가 일본으로 간 후 신라가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사신을 일본으로 보내어 두 신을 모셔오려 했으나 두 분은 돌아오지 않고 세오녀가 짠 비단을 주며 제단에 놓고 제사를 드리라 했습니다. 그 비단을 제단에 올리고 제사를 지냈더니 신라에 해와 달이 나타나서 다시 밝아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도 드리던 곳을 ‘도지뜰’이라 했는데, 한자로 쓰면 도기야(都祈野)가 됩니다. 신라문화권에서는 ‘ㅈ’과‘ㄱ’이 같은 음으로 발음됩니다.”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다음에 KBS 차로 장항리사지(獐項里寺止)에 가보았다. 장곡천(長谷川)씨는 나침반을 불상이 앉았던 대좌(臺座)위에 얹어보더니 동짓날 해뜨는 방향이 맞다고 했다. 다음은 골굴암(骨窟庵)으로 갔는데, 골굴암 불상 역시 동짓날 해뜨는 방향으로 앉아 있다고 한다. 결국 감은사지(感恩寺址)를 거쳐 대왕암(大王巖)까지 갔는데, 그 사람의 생각으로는 문무(文武)왕릉(王陵)을 대왕암에 모신 것도 동짓날 해뜨는 방향에 모신 것일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방향에서 석굴암 불상을 향해 선을 긋는다면 경주시(慶州市)내에서는 어디가 초점이 되겠는가고 물었더니 석탈해왕릉(昔脫解王陵)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일본인들 중에는 석탈해가 동쪽에서 왔다하여 일본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인지 이 사람도 석탈해왕릉을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첨성대(瞻星臺)가 아닐까 생각해 봤으나 내 힘으로는 확답을 얻기 어려워서 포기하고 동남산(東南山) 감실불상(龕室佛像)을 생각해 봤다. 앞에 그럴듯한 안산(案山)도 없고 뒤에 주산(主山)도 없는 불상. 늘 그늘 속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이 불상의 얼굴이 밝을 때가 있지 않을까 하여 동짓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1986年 동짓날 새벽이었다.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워 감실불상으로 가보자 했더니 좋아했다. 동짓날 아침 드리는 기도는 효험이 크다는 것을 믿고 있는 아내였기 때문이다. 향(香)을 준비해 가지고 나섰다. 그 날 새벽은 몹시 추워서 긴 수건으로 귀와 얼굴을 싸 동여맸다. 이러한 차림은 어릴 때 고향에서 겨울에 학교 갈 때의 차림인데, 남쪽에 와서는 처음 해보는 모습이다. 어두컴컴한 산길을 더듬어 감실불상 앞에 왔을 때는 동쪽 하늘이 붉으레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불상 앞에서 나침반을 보니 이 불상은 정남(正南)에서 30。서쪽으로 향해 앉아 있었다. 아침해가 솟아오르자 붉은 햇빛은 부처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었다. 어느 마을의 마음씨 좋은 할머니를 닮은 감실 부처님은 아침 햇빛에 물들어 빙그레 미소짓고 있는 것이었다. 자주 본 얼굴이지만 이렇게 화사한 표정은 오늘 처음 보는 것이다. 장곡천(長谷川)씨의 의견은 우리 나라에서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앞에 나무들이 가려서 동짓날 아침에도 그 화사한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다.



일천바위


동남산(東南山)에서 가장 우뚝하고 장엄하게 보이는 곳이 일천바위(일천암(一千巖))이다. 일천바위가 있는 산맥은 상사암(相思巖) 부근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뻗은 산맥인데, 일천바위가 있는 곳이 제일 높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 높이 10여 미터가 넘는 바위더미가 솟아있으니 장엄하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아득한 옛날 돌창으로 짐승을 잡아 살던 그 옛날, 무섭게 비가 온일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배반동(排盤洞)?남산동(南山洞)일대는 모두 물에 잠기고 일천바위 봉우리만 물에 잠기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이 봉우리로 기어올라 이 바위를 의지하고 버텼다. 비가 개고 물이 줄어드니 이 바위에 의지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천명이나 되었다. 그래서 이 바위를 ‘일천바위’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또한 미륵골 정상은 '신대배기‘라 하는데 이 곳은 신발 한 번 놓을 자리만 물에 잠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국사골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때 실제사(實際寺)에 영여(迎如)스님이 있었다. 말없이 묵묵히 수양만 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성씨나 집안 내력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스님은 행실과 덕이 높아서 대하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이 말을 들은 경덕왕이 대궐 안에서 불공을 드리려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영여 스님을 모셔왔다. 스님이 대궐에서 불사(佛事)를 다 마치고 지팡이 짚고 절로 돌아가려하자 임금은 사자를 불러 가마로 모셔가게 했다. 대궐의 가마를 타고 절에 돌아온 스님은 절문 앞에 가마를 멈추고 걸어서 절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절문 안에 들어간 스님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연기처럼 없어져 버린 것이다. 사자들은 돌아와서 임금에게 그 일을 아뢰었다. 임금은 이상히 생각하여 다시 스님을 찾아보게 했으나 영여 스님의 모습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경덕왕은 높은 덕이 세상에 알려져서 존경을 받게되자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버린 영여스님을 존경하여 국사(國師)로 추봉(追封)했다.

그 뒤부터 스님이 계시던 그 절을 국사방(國師房)이라 불렀다 하는데, 그 국사방이 있던 곳이 동남산 국사골(國師谷)추정된다.
그러나 이 계곡 안에 있는 세 곳의 절터 중 어느 곳이 국사방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상사바위


굴바위 절터에서 북쪽 계곡으로 200미터 가량 올라가면 정상에 상사바위[상사암(想思 巖)]가 있다. 동남산 기슭에서는 어디에서나 보이는 바위다. 바위 높이는 10여 미터 되는 거 암(巨巖)인데 아주 가파른 산 위에 솟아 있으므로 더욱 높아 보인다.

옛날 이 골짜기의 어귀에 있는 한 마을에 외로운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집안 식구들 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 버리고 할아버지는 혼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너무 외로워 동네 아 이들을 보면 자기 손자처럼 귀여워했다. 그 중에서도 이웃집에 사는 소녀를 퍽 귀여워했고, 소녀도 할아버지를 극진히 따랐다. 할아버지가 80세를 넘었을 때 소녀도 자라서 어느덧 꽃 다운 처녀가 되었다. 처녀는 철이 들면서 외로운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맛있는 음 식 등을 할아버지께 갖다 드리며 기쁘게 해 드렸다. 할아버지는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 이 그 처녀였다.

그러나 어느 해 봄, 처녀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어느 날 방안에 앉아 처녀 를 생각하고 있는데 살그머니 문이 열리면서 그토록 기다리던 처녀가 들어오고 있었다. 할 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워 이름을 외치며 일어났으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그 후로도 할아버지의 눈에는 처녀의 환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뜨면 천장에 처녀 가 나타나고, 감으면 머리 속에 처녀가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처녀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 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저 자식처럼 귀여워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처녀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안돼!”
할아버지는 머리를 저었다.
“이제 며칠 후면 낙엽지듯이 사라져갈 몸이 새싹처럼 피어날 처녀를 사랑하다니!, 안될 일이지.”
하고 잊으려고 다짐해 보아도 헛일이었다. 처녀를 그리워 하는 마음은 어느새 뱀처럼 기 어나와서 혀를 널름거리며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처녀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양심과 처녀를 아내로 삼고싶다는 욕심이 머리 속에서 싸우고 있으나 끝내는 무서운 욕망이 할아버 지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말았다.

고민하던 할아버지는 어느날 이 골짜기에 들어와서 처녀가 이사간 마을을 바라보다가 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다.

이 할아버지의 혼은 큰 바위가 되어 처녀가 살고 있는 마을을 늘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부터 처녀는 무서운 꿈을 꾸게 되었다. 눈만 감으면 큰 뱀이 몸을 감고 혀를 너울거리며 덤벼드는 것이었다. 놀라 일어나면 꿈이었으나 너무나 소름끼치는 꿈이었다. 처녀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서 야위어갔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는 할아버지가 처녀를 못 잊고 죽어서 그리 워하던 그 마음이 상사뱀이 되어 처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라고 수근댔다.

오랫동안 잠을 못 자고 괴로움에 지친 처녀가 어느 날 잠깐 잠이 들었는데, 몸을 감고 있던 뱀이 할아버지로 변하면서
“아무리 잊으려해도 잊을 수가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래도 잊지 못해 이렇게 괴롭히고 잇다”
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하고는 국사골로 들어가 바위가 되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꿈을 꾸었다.

처녀는 자기를 생각하다가 죽은 할아버지가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처녀는 할아버지가 가던 길을 따라서 국사골 정상에 있는 할 아버지 바위에 올라섰다.
“할아버지! 인간 세상에서는 나이 때문에 소원을 못 이루었으니 나이를 아니 먹는 바위 가 되어서 소원을 풀어드리오리다.”
하고는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처녀의 영혼은 또 하나의 바위가 되어 큰 바위 곁에 나란히 섰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바위를 가리켜 ‘상사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 남쪽바위 허리에 보이는 붉은 반점은 처녀의 핏자국이라 한다.



서출지(書出池)


철와골 입구 남쪽 동리(洞里)가 안마을이다, 안마을은 큰 연못을 기고 오손도손 모여 앉 은 절다운 마을이다. 연못에는 이악당(二樂堂)이라는 정자가 마치 물속에서 솟아나온 듯한 돌기붕 위에 서있다. 반은 땅에 있고, 반은 물 위에 떠 있는 丁자형으로 된 정자다. 둥글둥 글 떠 있는 연잎 사이로 날개를 편 듯 멋지게 추녀의 양 끝이 들려올라간 이끼 낀 기와지붕 이 물속에 어른어른 비치는 풍경이 운치있지만, 여름이면 못둑에 해묵은 백일홍이 꽃을 피 워 진분홍 꽃구름이 피어오르는 듯한 정경도 장관이 아닐 수 없다.

이 연못에는 유명한 전설이 전해온다. 신라의 역사가 발전기에 접어들 무렵, 소지왕(炤 知王)이 즉위한 지 10年 되던 해, 곧 488年 정월 15日이었다. 임금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천 천정(天泉亭)에 행차했다. 임금이 가마에서 내렸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어대더니 쥐가 사람처럼 말을 했다.

“이 까마귀 가는 곳을 살피십시오”
임금은 이상히 여겨 장수 한사람을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다. 장수는 까마귀를 따 라 이곳저곳 쫓아 다니다가 남산 동쪽 기슭에 있는 양피촌(壤避村) 못가에 이르러 큰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았다. 두눈에 불을 튕기면서 엎치락뒤치락 하며 무섭게 싸우는 것 을 보는 동안 장수는 그만 까마귀가 간 곳을 놓쳐버렸다.

임금님의 명을 어긴 죄는 크다. 장수는 정신이 아찔하여 어떻게 하면 까마귀 간 곳을 찾을 수 있을까 하고 못가에 앉아 궁리하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못 가운데서 크게 물결이 일더니 풀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처벅처벅 장수 앞으로 다가오더니,
“장수께서는 이 글을 임금님께 전하시오.”
하며 글이 써 있는 봉투를 건네주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장수는 꿈만 같아서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 보았다. 틀림없이 손에는 봉투가 쥐어져 있고 물 위에는 노인이 사라 져 들어간 파문(波紋)이 아직도 둥글둥글하게 남아 있었다.
“살았다! 까마귀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준 것이구나”
하고 장수는 급히 천천정을 향해 뛰어갔다. 임금이 봉투를 받아보니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라고 적혀 있었다. 이때 나랏일을 예언하는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은 평민이고 한 사람은 임금님을 가리킴이오니 열어보시는 것이 옳을까 합니 다.”
여러 신하들도 그럴듯하게 생각하여 열어보기를 간청했다. 임금은 여러 신하들에 의견 에 따라 봉투를 뜯어 종이를 펴 봤더니, ‘거문고 갑을 쏘라(사금갑(射琴匣))'라고 쓰여 있었 다.

왕은 급히 대권로 돌아가서 왕비의 침실에 세워 놓은 거문고갑을 향하여 화살을 날렸 다. 쿵 하며 화살이 금갑(琴匣)에 박히자 그 속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금갑을 열어봤더 니 왕실 내전(內殿)에서 불공(佛供)을 보살피는 승려가 죽어 있었다. 승려는 왕비와 짜고 소 지왕(炤知王)을 해치려고 거문고갑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왕비는 곧 사형되었다.
이렇게 그 글처럼 두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임금이 살게 되었다.

그 후부터 나라에서는 정월 보름날을 오기일(烏忌日)로 정하고 제사를 드리게 했다. 이 때 오곡밥을 조금씩 담 위에 놓는데, 이러한 풍속은 까막까치를 위함이라 한다. 그래서 매월 첫째 돼지날(해일(亥日)), 쥐날(자일(子日)), 말날(오일(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여 무슨 일이든 하지 않고 집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 풍습이 전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못 이름을 서출지 (書出池)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동리 노인들에게 들어보면 실제로 서출지는 이곳에서 400미터 남쪽에 있는 양피못[양피제(壤避 堤)]이라 한다.



염불사(念佛寺)와 양피사(讓避寺)터


옛날 신라시대 서라벌의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避里)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 피 리사(避里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그 마을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 절에 한 스님이 있었는데, 그다지 밖에 나오는 일이 없었고 누구에게나 자기 일에 대해서 말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그가 어느 집안 자손인지, 어디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스님은 하루에 몇번씩 시간을 정해 염불을 외웠다. 그 소리가 맑고 부 드럽고 한결같이 낭랑하여 화난 사람이 들으면 화가 풀리고, 초조한 사람이 들으면 마음이 좋아지고, 들뜬 사람이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근심 잠긴 사람이 들으면 근심이 사라졌다.


어머니 자장가에 아이들이 잠자듯이 스님의 염불 소리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를 주고 기쁨과 희망을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공경하여 염불사(念佛師)라고 불렀다.

그러던 어느날, 염불 스님이 돌아가시니 사람들은 슬퍼하여 그의 초상(肖像)을 흙으로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모시고 그가 살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師)로 고쳐 불렀 다. 이 절 가까운 곳에 또 다른 절이 있었는데, 그 절 이름은 양피사(壤避寺)라 했으니 역시 마을 이름을 따라서 부른 것이다.

아름다운 소리로써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었다는 염불 스님이 계시던 염불사는 남산리(南山里) 남쪽 마을에 그 터가 남아 있다

<윤경렬(尹京烈),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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