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주얼

서남산

천룡사와 최제안(催齊顔)


천룡사터는 남산 고위봉(高位峰) 서쪽면에 있다. 높이 약 500m 되는 정상에서 조금 내려온 곳에서 고원(高原)을 이루고 펼쳐져 있으니 아무리 풍수지리를 모르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이곳이 예사 터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신라때 이 터에는 고사(高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나중에 천룡사(天龍寺)라 했다 한다.

문무왕(文武王) 때에 왔다는 당(唐)나라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이 절을 보고 ‘이 절이 무너지는 날이면 나라도 망하리라’ 했다는데, 신라 말에 절도 없어지고 935년에는 나라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토론(討論) 삼한집(三韓集)」을 인용하여 ‘계림(鷄林) 땅에는 두 줄기의 객수(客水)가 흘러 들고 한 줄기의 역수(逆水)가 흘러가는데, 이 세 물줄기가 천재(天災)를 진압해 주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져 가라앉으리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딴 곳에서 흘러드는 두 물줄기라 한 것은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구 두동면(斗東面, 옛 마등조촌(麻等鳥村)) 남류천(옛 삼정천(三政川))의 두 줄기가 합쳐져 미역내가 되고 기린내[기린천(麒麟川)]가 되어 경주 서쪽으로 흘러 서천(西天)이 된 것을 말한다.
거슬러 흘러가는 역수(逆水)라는 것은 남산 남쪽으로 흐르는 물이 남쪽으로 흘러 별내[성천(成川)]로 들어가는데, 오직 백운 계곡의 물만은 동쪽으로 흐르니 그것이 역수(逆水)인 것이다. 이 세 물줄기가 천재(天災)를 진압하지 않으면 천룡사가 뒤집혀 가라앉을 것이라 했는데 천룡사가 파괴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뜻과 같은 말이다.

또한『삼국유사』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절의 시주자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그 딸들의 이름이 천녀(天女)와 용녀(龍女)였으므로 절 이름을 천룡사(天龍寺)라 했다’고 한다. 곧 딸들을 위해 지은 절이라는 것인데 이 말은 믿기 어렵다. 산정(山頂)에서 내려오는 천룡바위[천룡암(天龍岩)]가 있기 때문이다. 이 바위는 고위봉 정상에 내려온 용(龍)과 흡사하다. 밑에 고개를 처든 바위를 용두암(龍頭岩)이라 한다. 이 용두암은 몸체를 떼어놓고 볼 때 마치 배처럼 생겼기 때문에 운도암(雲棹岩)이라고도 불렀다. 구름 위로 노 저어 간다는 뜻이다. 이 용두암 밑에 우물이 있는데 상당히 깊다. 이 우물의 물맛은 남산에서 최고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사시사철 변함없는 물맛이다. 이 천룡바위가 있는 산이라 해서 천룡산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천룡사는 이 천룡바위 이름을 따서 불려진 이름이라 생각된다. 천룡사는 서라벌 사람인 최제안(催齊顔)이 고려(高麗) 정종(靖宗)의 명을 받들어 1040년(정종 6)에 지은 절이다. 최제안의 증조부가 최은함(崔殷?)이다. 최은함은 늦도록 자식이 없어 중생사(衆生寺) 관세음보살께 정성을 들여 자식을 얻었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 석달도 못되어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쳐들어왔다. 나라에 난리가 났는데 젊은 사람이 방안에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아기가 걱정이다. 어떻게 얻은 아이인데! 최은함은 아기를 안고서 중생사(衆生寺)로 달려갔다.“대성관세음보살께서 점지해 주신 아기입니다. 제가 싸움터에서 돌아올 때까지 보살님께서 아기를 맡아 주십시오.” 최은함은 울며 절하면서 아기를 관세음보살 발 앞에 뉘어 놓고 싸움터로 나갔다. 견훤은 서라벌에서 갖은 행패를 부리다가 보름 만에 돌아갔다. 최은함은 싸움이 끝나자 중생사로 달려왔다. 아기는 여전히 관세음보살 발 앞에 있었는데 금방 목욕한 것 같고, 입에서는 젖냄새가 나고 있었다. 최은함은 관세음보살님께 감사드리며 아기를 데려가서 길렀다. 이 아기가 최승로(崔承老)였고, 그의 아들이 최숙(崔肅)이며 최숙의 아이가 바로 최제안인 것이다. 이렇게 최제안은 불교와의 큰 인연(因緣)으로 세상에 태어났던 것이다. 최은함은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송도(松都)에 가서 왕건(王建)을 섬기며 경순왕을 받들었음으로 해서 최은함의 자손들은 고려(高麗)에서 공신(功臣)의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최제안은 정종(靖宗) 때 시중(侍中)의 벼슬에 올라 경주(慶州) 남산(南山)의 고위봉에 천룡사를 다시 세우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최제안은 쳔룡사를 다시 수축(修築)하여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량)을 개설하였으며, 고려 조정의 명을 받아 신서(信書)의 원문(願文)까지 만들어 절에 보관하였다.

그 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주인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주국(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柱國) 최제안은 쓴다. 동경(東京) 고위산의 천룡사는 쇠잔하여 파괴된 지 몇 해나 되었으므로 불제자(佛弟子) 최제안은 특히 성수무강(聖壽無彊)하시고 나라가 평안하고 태평하기를 원하여 전당?낭각(殿堂?廊閣)과 방사?주고(房舍?廚庫)를 모두 이룩하고 돌부처와 이소불(泥塑佛)을 몇 불(佛) 조성하여 석가만일도량을 새로 설치하였다. 이미 나라를 위해 절을 수선(修繕)하여 세웠으니 관가에서 주지를 임명함이 옳겠으나 도량의 주지가 바뀔 때마다 도량의 스님들이 안심할 수 없다. 납입전(納入田)의 수입으로 사원을 운영하는 본보기로는 팔공산 지장사(八空山 地藏寺)와 같은 절은 납입전이 200결(結)이 있고, 비슬산 도선사(毗瑟山 道仙寺)는 20결이 있고 서경(평양)(西京(平壤)) 사면의산사(山寺)들도 각각 20결이 있으니, 모두 유직?무직(有職?無職)을 물론하고 모름지기 계(戒)를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이를 뽑아서 절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여러 차례를 계속하여 주지로 삼아 분향수도(焚香修道)하여 왔다. 불제자 최제안은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하여 우리 천룡사에서도 또한 절의 많은 스님 가운데서 재주와 덕이 뛰어난 고승(高僧)을 뽑아서 주지로 임명하여 길이 분향수도하게 하려한다. 이 일을 문자로 자세히 기록하여 강사(岡司)(절에서 법회의 식사를 맡아보는 스님)에게 맡겨두니, 당시의 주지를 처음으로 삼으면 유수관(留守官)의 공문을 받아 도량의 여러 스님들께 보이라. 스님들은 각각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중희(重熙) 9年 6月 日에 관직을 갖추어 앞과 같이 서명하였다. 중희 9년은 고려 9대 임금 정종(靖宗) 6년, 곧 서기 1040년이다. 그러니까 천룡사는 고려가 건국한 지 105년만에 고려의 국태민안을 위해서 경주 남산에 지은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절터에는 맷돌 한 짝과 경당(經幢)의 귀부(龜趺)와 석등대석(石燈臺石)이 있는데 모두 고려 초기 최제안이 증축할 때 만든 것이다. 석탑(石塔) 1기는 재건되었는데, 역시 고려 때 것으로 시작되지만 신라 말의 석탑들과 구별이 잘 안 된다.



열반골


옛날 서라벌에 한 각간(角干)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사랑하는 외동딸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마음씨도 고와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꽃다운 나이를 맞이하니 그 아름다움은 마치 꽃구름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비천(飛天)인 듯 하였다. 이렇게 말고 깨끗한 처녀에게 뭇 남자들은 사랑을 호소하고, 더러는 권력 혹은 금력으로 유혹하기도 하며 성가시게 굴었다.

마침내 처녀는 시끄럽고 더러운 속세를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인 열반에 살 것을 결심하고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섰다. 부모님의 따스한 사랑도 여러 사람의 존경도, 화사하게 장식된 향기나는 머리다발도 다 끊어버리고 오직 맑고 청정한 부처님의 나라를 찾아서 들어선 곳이 이 곳 열반골이었다.

금빛으로 수놓은 화려한 옷과 은빛 대(帶)며 요패(腰佩)도 벗어버리고 잿빛나는 먹물옷으로 갈아있었다. 그리고 이 골짜기로 발을 옮겼다. 아무리 머리를 깎고 잿빛나는 먹물옷을 갈아 입었다. 하더라도 숨길 수 없는 것은 꽃피는 나이에 무르익은 살 향기였다. 애티나는 처녀의 살 내음을 맡은 뭇 짐승들이 길을 막고 으르렁거린다. 처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서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계곡에 들어섰다. 처녀의 살 내음을 맡고 맨먼저 나타난 것이 ‘고양이바위[묘암(猫巖)]이다. 담을 넘는 구렁이도 징그러웠다. 그리고 달려오는 작은곰바위[소웅암(小熊巖)], 꼬리를 감추는 여우바위[호암(狐巖)], 심굴궂게 뛰어오는 멧돼지바위[저암(猪巖)], 독수리바위 등 뭇 짐승들이 으르렁거리며 처녀에게 덤벼들었다. 그래도 처녀는 곁눈도 팔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발을 옮겼다. 계곡으로 더 들어가니 계곡은 더 깊어지고 여울물은 더욱 급히 흘렀다. 이곳에는 맹수(猛獸)들이 우글우글거렸다.

먼저 엉덩이를 치켜들고 노려보는 맹호바위[맹호암(猛虎巖)], 산허리로 기어오르는 이무기바위, 큰 입을 벌리고 달려오는 사자바위, 큰 키에 앞발을 들고 내려다 보는 큰콤바위[대웅암(大熊巖)] 등이 으르렁거리고 겁을 주는데 큰곰바위 밑에 작은 거북바위[구암(龜巖)]가 처녀를 걱정하듯이 지켜보고 있다. 처녀는 한결같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계곡으로 들어갔다. 큰곰바위를 지나가니 여울도 바위도 잔잔해지고 조용함이 계속된다. 처녀가 새로운 골짜기에 들어서서 오른쪽을 쳐다보니 이상한 바위가 있다. 높이가 2m 쯤 되고 둘레가 6m쯤 되는 바위더미 위에 꼭 대변 본 것 같은 바위가 있다. 분암(糞岩)이다. 처녀는 이 바위를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이때가지 저런 것을 보면 더럽다고 피해다녔다. 내 몸 안에도 있는 것을 어째서 피해다녔을까. 더러운 것을 피해다닐 것이 아니라 더러운 곳은 깨끗이 해야 한다. 지옥도 피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 때 건너편 산등성이에 있는 노인바위 또는 할미바위로 부르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실상 지장보살바위인 것이다. “아가씨 이제 도가 텄습니다. 내 이제 열반에 모시리다. 이 바위를 타십시오.” 지장보살바위 뒤에 몹시 흔들리는 흔들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타십시오.” 처녀는 흔들리는 구름바위를 타고 흔들흔들 산등성이를 넘어 천룡사에 이르러 산 채로 열반(涅槃)에 들었다 한다. 지금 아이들에게 갱의암을 가리키며 뭘 했으면 좋겠는가고 물으면 한결같이 맘보춤을 추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한다.

신라 때의 바위들을 보며 속세에서 열반으로 도달하는 소설같은 이야기를 엮어놓았으니 불교가 발전했던 시대였음을 감탄케 한다. 이 열반 계곡에는 갱의암 부근에 한 절터가 있고 큰곰바위 밑에도 절터가 있다. 또 분암(糞岩) 밑에도 절터가 있으나 처녀와 관련된 이야기는 없다.



용장사터


용장사는 남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이었다. 그것은 절터의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남산에서 가장 큰 골짜기가 용장골[용장곡(茸長谷)]이요, 그 어귀에 있는 마을 이름이 용장(茸長)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라 토기며 고려청자편, 조선 백자편들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남산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두고 향연을 올렸던 절터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용장사 터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대현(大賢) 스님 이야기와 설잠(雪岑) 스님 이야기밖에 없다. 현 스님은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때 사람이다. 753년(경덕왕 12)에 가뭄이 심하자 왕은 내전에 단을 쌓아 대현 스님을 불러 비를 빌게 하였다.

스님은 재 올린 단에 모든 준비를 다해놓고 기다렸으나 정수(淨水)가 오지 않아 재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공양하는 사람이 늦게야 물을 길러 왔으므로 재를 주관하는 감리(監吏)가 꾸중을 하니 그는 대궐 우물이 모두 말라서 먼 데 가서 길어오느라 늦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대현 스님은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하며 향로를 들어 하늘에 받쳐들고 있으니 잠깐새 우물에서 물이 솟아 나는데, 그 높이가 70자[척(尺)]나 되었다 한다. 그 우물이 금광정(金光井)이다.
이 절에 높이가 16자 되는 석조미륵불(石造彌勒佛)이 있었는데 대현 스님이 때때로 이 미륵불 둘레를 돌면서 기도를 드리면 미륵 부처님도 대현 스님이 도는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한다. 이렇게 신비한 일이 많은 대현 스님은 일찍이 이름을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 했다. 머리가 총명하여 모든 판단이 명백했고 스님이 주장하는 법상종(法相宗)은 이치가 세미(細微)하고 심오했으므로 분석하기 어려웠으나 스님은 여유있게 그 뜻을 분석하여 가르쳤으므로 신라의 많은 후진들은 그 가르침을 따랐으며 중국의 학자들도 자주 이것을 얻어 요목(要目)으로 삼았다 한다.
지금 용장사터에는 돌축대로 된 건축터가 많이 남아 있어 대가람(大伽藍)터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데, 남아 있는 유물은 얼마 없다. 삼층석탑 1기와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 1좌, 마애여래좌불(磨崖如來座佛) 1좌가 있으며 석탑재(石塔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다. 삼층석탑은 금당의 동남쪽에 솟은 큰 바위 봉우리 위에 서있는데 하층기단은 생략되고 상층기단부터 바위 위에 솟아 있다. 상층기단에는 우주(隅柱) 2개와 탱주 1개만 있고 옥개(屋蓋)받침도 모두 4단인 것으로 보아 신라 말기의 탐으로 보이는데, 이 탑의 기상(氣相)은 크다. 하층기단이 생략된 것이 아니고 밑에 있는 바위산이 하층기단으로 보여 밑에서 쳐다보면 하늘의 구름이 걸릴 것 같은 위력을 느끼게 된다. 그 밑에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이 있는데, 이 불상은 대현 스님이 돌던 미륵불이라 생각된다. 불상 대좌가 보통 불상과 다르기 때문이다. 직사각형으로 생긴 자연석을 지대석으로 놓고 북[고(鼓)]모양으로 생긴 기둥돌을 간간이 놓고 쟁반처럼 다듬은 원반석(圓盤石)을 세 겹으로 포개놓고 그 위에 부처님을 모신 대좌다. 그래서 삼륜대좌불이라는 어려운 이름도 생긴 것이다. 이 이상한 대좌는 부처님이 계신 수미산(須彌山)을 본뜬 것이라 생각된다. 밑에 있는 바위산을 수미산(須彌山)이라 보면 산정(山頂) 지대석(地臺石) 위는 사왕천(四王天)이 된다. 그 위에 넓게 놓인 원반석은 구름층에 있는 도리천(?利天)이 되고 중간에 있는 원반석은 야마천(夜摩天)이 된다. 그러면 제일 위에 놓인 연꽃으로 장식된 원반석은 도솔천(兜率天)이 되는 것이니 도솔천은 바로 미륵보살이 계신 하늘 나라다. 이렇게 신라 사람들은 하늘나라의 모습을 남산에 만들어 놓고 미륵부처님을 모셔 위했던 것이다.

지금 이 부처님은 머리가 없어졌다. 그래도 대좌 높이를 합치면 약 15자 가량이 되니 옛날 머리가 있을 때는 16자 높이가 되었을 것이다. 곧 장육미륵상(丈六彌勒像)이니 대현 스님이 돌았다는 바로 그 미륵상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이 미륵상의 가사(袈裟)자락은 연화대좌 위로 흘러내려 대좌를 덮고 있다. 불상의 옷자락이 대좌를 덮고 있는 것을 상현좌(裳懸座)라 하는데, 상현좌는 삼국시대 불상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그래서 근래까지 상현좌인 불상은 삼국시대 불상이라 했는데 1942년 황복사(皇福寺) 탑에서 상현좌로 순금불상(純金佛像)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불상은 706년에 조성하여 봉안했다는 명문(銘文)이 같이 나왔다. 8세기 초기까지도 상현좌로 나타난 불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니, 대현 스님이 돌았다는 삼륜대좌불도 이 연대로 보아 무방할 것 같다. 그렇다면 용장사는 성덕왕(聖德王) 초기 쯤에 지어졌고 대현 스님이 주지로 있었을 때는 경덕왕(景德王) 때였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1455년은 조선조 왕실이 피와 눈물로 얼룩진 슬픈 해였다. 15살밖에 안되는 어린 임금 단종이 왕위에 있었으나 그 자리를 탐낸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임금을 보필하는 신하들을 모두 없애고 기어코 그 자리를 빼앗아 옥좌에 앉은 해다. 이 슬픈 소식을 듣고 의분을 못이겨 문을 닫고 삼일 동안 통곡을 하다가 더러운 세상을 비관하여 부푼 꿈을 포기한 채 읽던 책을 불살라 버린 다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방랑생활을 떠난 21세의 청년이 있었으니 그이가 바로 설잠(雪岑) 스님이다. 속명은 김시습(金時習)이고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실천도 되지 않는 학문을 배워서 무엇하랴 하는 판단이었다. 5살에 이미『대학(大學)』을 깨쳤으므로 세상에서 신동(神童)이라 불렀다. 세종대왕께서 소문을 듣고 대궐에 불러들여 ‘삼각산’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였더니, 지은 시가 뛰어나게 그 뜻이 묘했음으로 대왕께서 크게 상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설잠 스님은 집을 떠나서 양주의 수락해상(水落海上)이며 설악산(雪嶽山) 등 나라의 명승지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방랑생활을 계속 하였는데, 경주(慶州)의 금오산(金鰲山, 남산(南山))에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다. 금오산에 온 뒤부터 먼 곳에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바닷가나 들에서 노니면서 매화(梅花)나 대[죽(竹)]를 읊으면서 취한 나날을 보냈다 한다. 스님은 먼저 은적곡(隱寂谷)의 은적암(隱寂庵)에 숨어 지내다 용장사로 옮겼다 하는데, 이 절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지었던 것이다. 설잠 스님은 1482년 승복을 벗고 속세로 환속했다가 149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용장사도 다 허물어지고 일부 유적만 남았는데, 영조(英祖) 때 용장사터에 매월당사(梅月堂祀)를 세우고 스님을 기렸으나 지금은 그 당사(堂祀)도 다 없어지고 모셨정(影幀)만 기림사(祇林寺)에 보존되어 있다. 남산(南山)에 남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신라시대의 이야기이고, 고려시대의 것도 더러 있지만 조선시대의 이야기로는 이 계곡에만 남아 있다. 설잠 스님이 먼저 숨었던 골짜기를 ‘은적골’이라 하고 숨어 있던 암자를 ‘은적암’이라 부르게 된 것도 설잠 스님이 숨어계시던 곳이라는 뜻이라 한다.

  • 설잠 스님의 시
    용장골 깊으니 오는 사람 볼 수 없네
    가는비에 신우대는 여기저기 피어나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 희롱하네
    작은 창가에 사슴 함께 잠들었더니
    낡은 의자에 먼지가 재처럼 깔렸는데
    깰줄 모르는구나, 억새 처마 밑에서
    들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
    용장산동유 불견유인래(勇壯山洞幽 不見有人來)
    세우이계죽 사풍호야매(細雨移溪竹 斜風護野梅)
    소창면공록 방의좌동회(小窓眠共鹿 枋椅坐同灰)
    불각모담반 정화락우개(不覺茅?畔 庭花落又開)


삼화령 미륵불


『삼국유사』에『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이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생의(生義) 스님은 도중사(道中寺)에 살았다. 어느날 늙은 스님이 찾아와서 나를 따라오라며 남산 골짜기에 이르러 풀을 묶어 놓으면서 말했다. “내가 여기 묻혀 있으니 스님은 나를 파내어 산마루의 시원한 곳에 있게 해 주시오.” 생의 스님이 듣고 깨니 그것은 꿈이었다. 꿈이라도 이상하여 친구들을 데리고 남산 골짜기에 찾아가 보니 풀을 묶어 표시해 놓은 곳이 있었다. 그 곳을 파보았더니 그 곳에 돌로 만든 미륵상(彌勒像)이 있었다. 생의 스님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그 미륵상을 삼화령(三花嶺) 꼭대기에 모셔 놓았다. 그리고 그 곳에 절을 짓고 그 부처님을 공양했는데, 사람들은 그 절을 생의사(生義寺)라고 불렀다 한다. 충담(忠談) 스님이 해마다 삼월 삼짓날과 구월 구일날 차를 다려 공양했다는 미륵불이 바로 생의사 미륵불이었다.



생의사터를 찾으려면 우선 삼화령을 찾아야 한다.『삼국유사』「빈녀양모(貧女養母)」라는 이야기가 있다. 화랑(花郞)인 효종랑(孝宗郞)등이 남산 포석정 또는 삼화술(三花述)에서 놀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삼국유사』에는 ‘삼화술’로 적혀 있다. 그렇다면 삼화령(三花嶺)과 삼화술(三花述)은 같은 곳일까 다른 곳일까? 필자는 같은 곳이라 생각한다. ‘술(述)’이라는 것은 우리말 ‘수리’를 한자로 쓴 것인데, 수리는 신라 말로 높다는 뜻이다. 사람 몸에서 가장 높은 곳을 정수리라고 하고 서쪽에서 가장 높은 산을 서수리산(서술산(西述山), 西鷲山) 이라 부른다. ‘령(嶺)’도 높은 고개라는 뜻이니, 수리나 령(嶺)은 같은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삼화는 ‘세 꽃송이’로 보아야 하나 아니면 ‘세 화랑(花郞)’이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까? 삼화를 이두(吏讀)로 읽으면 ‘세 곳’이 된다.
옛날에는 꽃을 ‘곳’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세 곳 수리’로 읽으면 제일 높은 고위봉(高位峰)이 한 곳 수리이고 금오봉(金鰲峰)이 두 곳 수리가 되고 이영재(언양재) 서쪽 높은 봉우리가 세 곳 수리가 되는데, 이 봉우리는 고위봉과 금오봉의 중간에 있다.



이영재는 옛날 언양(彦陽) 방면으로 통하던 고개로서 ‘언양재’가 변해서 ‘이영재’가 되었다고 한다. 임금님의 사자(使者)들은 귀중한 문서를 가지고 다녔을 것이고, 장사꾼들은 돈을 가지고 다녔을 터이니 이 고개를 넘기가 두려웠을 것이다. 이영재 서쪽 봉우리에는 지금도 지름이 2m나 되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놓여 있다. 삼화령은 이영재였고 삼화령 미륵불은 이 큰 연화대좌에 안치(安置)되었던 불상(佛像)이었을 것이다. 연화대좌 밑에 절터였던 돌축대가 남아 있으니 이곳이 곧 생의사터일 것이다. 이곳이 남산 남쪽 골짜기가 되기 때문이다. 연화대좌 밑에 비신(碑身) 없는 비석대좌(碑石臺座)가 있다.
이 절터의 비밀은 이 비석에 실려 있을 터인데 지금 비신이 없어졌으니 답답한 일이다.



석가사와 불무사


서기 660년에 백제 땅을 다 차지하고 668년에 고구려 땅을 차지한 당나라가 신라마저 점령하려고 온갖 심술을 다 부리더니 마침내 674년에 유인궤(劉仁軌)를 대장으로 삼아 십 수만 대군(大軍)이 신라로 쳐들어왔다.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와 백성들이 하나로 뭉쳐 싸우고 싸워 676년에 기어코 당나라 세력을 만주(滿洲)로 쫓아 버리고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이나마 통일되었던 것이다.
변두리 나라에 패한 당나라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신라를 괴롭혔다. 제31대 신문왕(神文王)은 당나라를 달래기도 하고 맞서기도 했는데, 다음 임금인 효소왕(孝昭王)은 통일된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당나라를 달래어 잠재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697년에 당(唐) 왕실(王室)의 번영을 빈다는 명목으로 망덕사(望德寺)를 세웠다.
그 절 낙성재에 왕이 친히 불공을 올렸다. 그 때 누추한 옷차림의 중이 나타나서 “빈도도 이 재에 참석하려 합니다.” 하니 왕은 불쾌했다. 그러나 그래도 스님이니 어찌하랴, 말석에 앉으라 명령하고 재를 올렸다. 재가 끝나자 왕은 그 스님을 불러 말했다.
“비구는 어디 사는가?”
“남산 비파암(琵琶巖)에 살고 있습니다.”
“돌아가거든 국왕이 올리는 재에 참석했다는 말 하지 말라.” 하고 왕은 비웃듯이 중을 바라 보았다.
중은 웃으면서, “네, 잘 알았습니다. 폐하께서도 돌아가시거든 진신사리를 공양했단 말씀 하지 마십시오.”하고 무릎을 치니 중의 몸에서 금빛이 나고 머리 뒤에 두광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는 땅에서 솟아 오르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날아 산으로 가는 것이었다. 왕은 놀랍고 부끄러워 동쪽 산에 올라가서 수없이 절하며 신하들을 시켜 진신석가를 모셔 오도록 했다.



신하들이 말을 타고 삼성곡(三星谷) 또는 대적천원(大?川源)에 있다는 비파암(琵琶巖)에 가 보았더니 진신석가는 들고 가던 바릿대와 짚고 가던 지팡이를 바위앞에 놓아두고 몸체는 바위속에 숨어 버렸던 것이다. 돌아와서 복명(復命)하는 신하들의 말을 듣고 효소왕은 비파암 앞에 석가사(釋迦寺)를 지어 진신석가에 사죄하였고, 숨어버린 바위에는 불무사(佛無寺)를 지어 진신사리를 위하였다. 한 절엔 지팡이를 그리고 또 한 절에는 바리때를 두었다는데 일연(一然) 스님이 와 봤을 때는 두 절은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때는 없어졌다고 했다. 지금은 두 절도 다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 있다.

경주시(慶州市)에서 포석정 쪽으로 7km 지점에 비파(琵琶)마을이 있다. 비파마을에서 비파계곡의 여울을 거슬러 200m쯤 들어가면 여울 북쪽 기슭에 송림(松林)이 우거져 있는데, 이곳에 돌축대로 된 건축터가 있다. 마을사람들이 이곳을 ‘풀무절터’라 한다. 풀무절터는 ‘불무사터’라는 말일 터인데 좀 이상하다. 불무사는 삼성곡(三星谷) 또는 대적천원(大?川源)에 있다고 했으니 이 계곡 막바지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조선총독부 조사 때 잘못 된 것 같다. 이 절터에서 계곡물을 거슬러 350m쯤 더 들어가면 북쪽에서 흘러오는 지류(支流)가 있다. 이 지류를 마을사람들이 ‘잠늠골’이라 한다. 잠늠골 어귀에도 절터가 있으며 돌축대로 된 두 곳의 건축터가 있다. 고려청자 조각들이 많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시대까지 향연(香煙)을 올린 절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절터의 서쪽을 막아 뻗어내린 백호산맥(白虎山脈)이 절 앞에 머물러 삼각봉을 이루며 솟아있는데, 이 삼각봉 위에 삼층석탑이 서있었다. 6면 입방체로 깨트린 돌을 기단으로 삼아 정교하게 다듬은 아담한 석탑이었다. 탑신(塔身)의 총고(總高)가 3m가 될까말까한 작은 탑이지만 풍기는 느낌은 크다. 기단 윗면은 얼금얼금 다듬어 탑신으로 조화시켰고, 기단 밑부분은 깨트린 채로 우둘두툴 버려놓았기 때문에 산으로 조화되어 산과 탑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신석가(眞身釋迦)가 계신 신성한 골짜기를 지키기 위한 절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절터에서 다시 계곡으로 450m쯤 들어가면 개울을 건너게 되는데, 개울 건너 50m쯤 가면 계곡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가던 길로 바로 가면 용장골이 되니 방향을 바꾸어서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야 한다. 북쪽 골짜기로 200m쯤 들어가면 환경이 아주 달라진다. 무성하던 소나무는 별로 없고 둘러싼 산며래에 흰 화강석 더미가 빌딩처럼 여기저기 솟아 있다. 가파른 산며래는 모래흙으로 되어 있으니 비가 오면 씻겨내려 모래가 계곡에 쌓일 것이다. 대적천(大?川)이 막고 더 갈 데 없으니 원(源)도 멎는다. 수골[약수곡(藥水谷)]과의 분수령이 되는 산등성이에 마을 사람들이 ‘삼형제(三兄弟)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하나는 엎드려 있고 하나는 앉아 있고 하나는 서 있는 듯이 보이는 세 바위를 말한다. 이 바위를 옛날에는 별로 보고 ‘삼성(三星)바위’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삼성골이라 불렀을 것이다.
바위 덩어리들이 가장 많은 북쪽 산벼랑 기슭에 비파처럼 생긴 바위가 서 있다. 높이는 7m쯤 되는데 손잡이 부분이 뒤로 휘어져서 당비파(唐琵琶)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바위가 진신석가가 계셨다는 비파암(琵琶巖)이다. 서라벌 사람들이 이 바위를 얼마나 위했으면 이 계곡 어귀의 마을을 비파마을이라 불렀을까? 이렇게 속세와 단절된 자연이나 잘생긴 바위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신라 사람들의 생각이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겨레의 마음을 길렀던 것이다. 이 바위앞 100m 거리에 석가사터가 있다. 이 곳은 산세가 가파르기에 건축을 세울 만한 자리가 없다. 개울 옆에 높이 5m 정도의 돌축대를 쌓고 작으마한 법당을 세웠다. 그 배경에 여기 저기 기둥돌들이 서있어 신비롭다. 배경되는 산허리에 있는 높이 7m쯤 되는 바위 위에 6m×3.5m 너비의 공간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불무사(佛無寺)터로 짐작된다. 많은 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절은 바위속에 숨어계신 진신석가에게 공양하는 절이었으나 이름 그대로 불상은 모시지 않았던 것이다. 개울가에 두어곳 건축터로 보이는 곳이 있으나 너무 파괴되어 확인할 수 없고, 정상 부근에서 뻗어내린 산맥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각각 삼층석탑이 서 있었다. 밑의 탑은 어느 때 누구인가가 허물어뜨리고 무덤을 썼다. 삼층 옥개석은 계곡으로 굴러떨어져 있고 1?2층 옥개석은 산 벼랑에 굴러 있다. 다른 탑재들은 무덤 축대로 이용되고 있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위의 탑은 옥개석 두 개가 남아있을 뿐이다. 나무꾼 아저씨가 있길래 물었다.
“이 계곡을 어째서 비파골이라 합니까?”
“이 골짜기가 아늑하지 않습니까. 도적놈들이 도적해가지고 이 골짜기에 들어와서 우선 잠늠골에서 한잠자고, 그리고 이 곳에 와서 허리끈 풀어놓고 먹고 마시고 비파를 타면서 놀았답니다. 그래서 비파골이지요.”
정상 부근에 이 계곡을 내려다보는 도깨비바위가 있다. 어느 때는 진신석가가 계시는 성지라 하더니 어느 때는 탑을 허물고 죽은 사람을 위하더니, 또 어느 때는 도적놈들 소굴이 되었는가…
인정도 변하고 인심도 변함에 도깨비바위가 계곡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 있다.



금송정과 장구터


남산에서 제일 큰 봉우리가 냉곡암봉(冷谷岩峰)이다. 금오봉 정상에서 북쪽으로 525m쯤 떨어진 곳에 정상(468m)보다 약 100m 낮은 높이로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아있다.
북쪽 봉우리를 상사암(想思巖)이라 하는데, 사라에 병든 사람들이 빌면 해결해 준다하여 태고로부터 많은 젊은 남녀들이 찾던 바위다. 그 바위 남쪽면은 산아당(産兒堂)인데, 아기를 얻으려는 어머니들이 찾아 다니는 곳이다.
북쪽 봉우리에는 남산에서 제일 크다는 여래좌불(如來坐佛)이 새겨져 있다. 그 정상에는 금송정(琴松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신라의 악성(樂聖) 옥보고(玉寶高)가 금송정에서 거문고를 탔더니 봉황새가 날아와서 춤을 추다가 금송정 앞바위에 앉아 쉬었다.
그래서 북쪽 봉우리의 제일 높은 바위를 봉생암이라 부른다.

옥보고는 이곳에서 신선(神仙)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금송정 북쪽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기암(碁巖)이라 한다. 옛날에 신선들이 바둑을 두던 바위다. 지금도 경주 시내가 한눈에 보이니, 옛날 절들이 별처럼 많았고 탑들이 기러기 줄지어 가듯이 많았다는 17만호의 대도시 서라벌도 발아래 속세로 보여 가히 신선들이 노닐던 곳이라 하겠다.
이 바위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을 배실(拜室)이라 한다.『삼국유사』의「진신수공(眞身受供)」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효소왕(孝昭王)이 절한 곳은 이 계곡이었을 것이다.『삼국유사』에는 동쪽 산에 올라가서 절했다 하는데, 망덕사(望德寺) 동쪽에는 산이 절을 올리고 신하들을 비파암으로 보낸 것으로 이야기해야 맞는다. 이 계곡에는 세 곳의 절터가 있는데, 마을사람들이 ‘장구터’라 한다. 신선들이 장기를 두던 곳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장기를 두었다는 곳은 정사에 있는 기암이다.
남산의 대부분 유적들은 불교 유적들인데 냉곡암봉 정상에 있는 두 유적만이 도교(道敎)의 이야기로 얽혀져 있다.



금광사와 명랑스님


명랑(明朗) 스님은 632년(신라 선덕여왕 1)에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배워 635년에 본국으로 돌아오는 도중 서해 바다의 용궁(龍宮)에 납치되었다.
용왕이 법문을 청하길래 법을 설(說)해 주었더니 용왕은 황금 천 냥을 스님께 시주하였다. 스님은 그 금덩어리를 갖고 물밑으로 해서 땅밑으로 걸어서 자기집 우물로 솟아나왔다.
그 후 살던 집을 절로 고치고 용왕께 시주받은 황금으로 탑과 불상들을 장식하니 그 빛이 찬란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절을 금광사라 불렀다.

그런데 1926년에 조선총독부가 발간한『경주남산(慶州南山)の불적(佛蹟)』에서는 식혜골[식혜곡(識慧谷)]의 사제사(四祭寺)를 금광사라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사제사터를 금광사터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금광사터로 정한 이유로 ‘근방에 금광평(金光坪)이라는 땅이 있고 금광제(金光堤)라는 못이 있으니 이 터가 금광사터일 것이다’라고 했다.



1979년 무렵 어느 개인이 금광못을 사서 물을 뽑아 버리고 밭을 만들었는데 그 못 속에서 절터가 발견되었다. 불상 대좌며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이며 불상편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식혜골 절터에서는 ‘사제사(四祭寺)’ 명문(銘文)이 있는 수막새와 암막새가 많이 발견되어 박물관으로도 갔고 또 일본사람들도 많이 가져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식혜골 절터는 바로 사제사터이고, 금광못 속에서 발견된 절터를 금광사터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나정


나정(蘿井)의 본이름은 내울(내을(柰乙))이었다. 고허촌장(高虛村長) 소벌도리는 가끔 촌의 경계로 돌아다니며 이상이 없나 살폈다. 어느날 양산(楊山)에 올라섰을 때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내울에 비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내울 우물 옆에 흰 말이 절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조심조심 가봤더니 인기척에 말은 길게 울며 하늘로 올라가고 말이 있던 자리에는 붉은 알 하나가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알을 깨어봤더니 그 알 속에서 잘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다.
소벌도리는 아기를 안고 쇠샘(동천(東泉)) 에 가서 씻겼더니 몸에서 광채가 났으며 길짐승 날짐승들이 춤을 추며 아기의 탄생을 축복했다.
소벌도리가 아기를 데려다가 정성스럽게 길렀는데, 이 아이 13살이 되었을 때 육부촌장(六部村長)들의 화백(和白)회의에서 육촌을 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이 아이를 첫임금으로 삼으니 그가 곧 박혁거세(朴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었다.

『삼국유사』에는 임금이 된 해를 B.C 69년 3월이라 하고,『삼국사기』에서는 B.C 57년 4월이라 했다.『삼국유사』의 69년은 내울에서 태어나던 해이고,『삼국사기』의 57년은 임금이 된 해일 것이다.



천관사터


명장 김유신(金庾信)은 젊어서 천관(天官)의 집으로 드나들었다. 어머니 만명부인(萬明夫人)은 유신이 어려서부터 사람 사귀는데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다.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을 사귈 일이지, 거짓말하고 비겁한 사람은 사귀지 말라”고 했다.
유신은 어려서부터 이 말을 명심하였다. 그러나 사춘기에 들어 천관이라는 처녀의 집으로 자주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머니께 들켜 유신은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유신아, 너의 아버지가 어떠한 사람이었고 할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느냐. 나라가 위급할 때 언제나 앞장서서 나라의 기둥이 되었던 분들이다. 지금 신라는 이기지 못하면 죽어야 되는 어려운 때다. 이 늙은 어미는 네가 나라의 기둥이 되어 주기를 밤낮으로 기도드려 바라고 있는데, 네 심신을 닦아야 하는 이 나이에 천한 여자들과 희희낙락하고 있다면 너의 앞날이 뻔하다. 그런 너를 보고 어찌 내가 평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겠느냐” 하고 눈물을 닦는 어머니를 보았을 때 유신의 등골에 식은 땀이 흘렀다.
“어머니, 이제부터 천관의 집에 발을 끊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믿어도 되겠느냐?”
“네, 믿어 주십시오, 어머니.”
굳게 다짐한 유신은 그 후부터 천관의 집에 발을 끊고 심신 훈련에만 열중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친구집에서 술을 마시고 거나한 기분으로 말을 타고 집으로 오다가 말 안장위에서 잠이 들었다.
말이 명마라 우리집 주인이 기분이 저러할 때 저 집에 잘 가더라 하고 타박 타박 발을 옮겨 간 곳이 천관의 집이었다. 귀에 익은 말발굽 소리에 천관이 뛰어나와 “이제 오십니까?”하고 반가이 맞았다. 눈을 뜬 유신은 기가 막혔다. 사나이가 어머니와 그렇게 굳게 약속해 놓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다니…. 말없이 서있던 유신은 삼환태도(三環太刀) 칼자루를 잡았다. 뽑아든 칼은 은빛 무지개를 그리며 말 목을 내리쳤다. 주인을 섬기다가 억울하게 죽은 말머리는 뒹굴어 있고 샛빨간 피는 낭자하게 땅을 적셨다. 유신은 피 자국을 밟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인정없는 사나이, 어쩌면 저렇게도 무뚝뚝한 사나이가 있을까’ 천관은 유신을 원망하며 원가(怨歌)를 지었다는데 그 노래는 전하지 않고 있다. 천관은 김유신을 잊으려 했으나 잊을 수 없었고 미워해 보려 했으나 미워지지도 않았다. 천관이 눈을 뜨면 천장 위에 김유신이 나타나고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김유신이 나타나고 이불을 쓰면 이불 속에 김유신이 나타난다. 못이룰 사랑에 고민하던 천관은 끝내는 약을 먹고 죽었다. 김유신은 뜻을 위해 사랑을 끊었지만 천관은 사랑을 위해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관이 죽었다하여 누가 그리 애달파 했겠는가. 아까운 청춘이 이슬처럼 사라졌던 것이다.

김유신은 그 후 뜻을 세워 660년(신라 무열왕 7)에 백제의 항복을 받고 668(문무왕 8)에 고구려의 항복을 받으니 형식상으로는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유신은 그 공로로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신라 최고의 벼슬에 올랐다. 이 때 김유신은 백발이 성성한 노(老)태대각간이었다. 노태대각간은 먼저 어머니 무덤을 찾았다.
“어머니, 삼국이 통일되었습니다. 안심하시고 평안히 계시옵소서.”하고 어머니를 위로한 다음 발을 옮긴 곳은 천관의 집이었다.
“천관은 나 때문에 죽었어. 내가 아니었다면 천관은 죽지 않았을거야.”김유신은 뜻을 세우기 위해 천관을 잊은 척 했을 뿐이었지 아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어찌하랴. 김유신은 천관이 살던 집을 절로 고치고 극락세계의 부처님인 아미타삼존을 모시고 촛불을 밝히며 향을 사르고 부처님 앞에 합장해 천관이 왕생극락하기를 빌었다. 김유신의 손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가. 나라를 위해서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 날리듯 하던 대장군이 자기 때문에 죽은 가련한 여자를 위해서는 부처님 앞에 엎드려 그의 왕생극락을 빌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정경이다. 몸을 닦아 힘을 기르고 학문을 닦아 마음의 덕을 넓히는 것은 화랑도(花郞徒)들의 수련이었다. 강한 힘과 부드러운 덕을 조화시키며 살아온 것은 우리 겨레의 정서(情緖)인 것이다.

지금 천관사터는 논밭으로 되어 있고 불상 대좌편과 주춧돌 몇 개가 논뚝에 박혀있을 뿐이다. 이곳에 있던 탑재(塔材)들은 지금 경주고등학교 정원에 있다고 한다. 천관사는 소중한 사적(史蹟)이다. 아무 유물이 없다 하더라도 그 자리만이라도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인용사와 김인문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고 문무왕의 동생이다. 김인문은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에 통달한 대학자이며 붓을 들면 명필이었고 칼을 들면 대장군이었으니, 고구려 정벌 때는 김인문이 군사들을 이끌고 일선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악기(樂器)를 들면 풍류객이었다 한다.

김인문은 삼국통일을 이루는 동안 일곱 번 중국 당나라로 왕래하면서 신라에 이롭도록 외교에 힘썼다. 당나라는 고구려가 항복하던 668년까지는 신라를 이용할 가치가 있었으므로 신라를 괴롭히지 않았는데, 고구려가 항복한 때부터 신라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670년에는 당나라에 가있는 신라 사람들을 가두기 시작했다.



김인문도 갇힌 몸이었으나 당나라 임금을 달래도 보고 당나라 정세를 고국에 알리기도 했다. 일마다 트집을 잡고 심술을 부리던 당나라는 674년에 유인궤(劉仁軌)를 대장으로 삼아 십 수만 대군으로 신라를 쳐들어왔다. 신라는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섭게 싸웠다. 싸움 중에 적국의 감옥에 갇혀 있는 김인문이 걱정이었다. 신라 사람들은 대궐인 신월성(新月城) 건너편에 인용사(仁容寺)를 세워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열어 김인문의 안녕을 축원했다. 피나는 전쟁 삼년 끝에 당나라는 우리땅을 다 차지하겠다는 야욕을 버리고 만주(滿洲) 요동(遼東)으로 도망갔다. 전쟁에 패한 당나라의 고종(高宗)은 이를 갈며 심술을 부렸으나 별 수 없었다. 신라에서도 당나라를 달래기 위해 망덕사(望德寺)를 세웠다. 그 소식을 듣고 당 고종은 마음이 풀려서 김인문 이하 신라 사람들을 감옥에서 석방시켰다. 망덕사는 당나라 왕실의 번영을 기도하는 절이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나온 김인문은 당나라에 그대로 남아서 신라에 이롭도록 외교를 펼쳐나갔다. 694년(효소왕 3)에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돌아가니 인용사에는 다시 아미타불을 모시고 그의 왕생극락을 비는 절로 고쳤다.

지금 인용사터에는 무너진 석탑 1기 뿐이나, 신라 사람들의 정성어린 아름다운 절이었던 것이다.

<윤경렬(尹京烈),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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