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권공비음기

비지정_고문서_원수권공비음기_401-원수권공비음기-001_2011_미술.jpg

저자사항
미상
판사항
탁본
연대/시대
미상
형태사항
권축장,287x112.4㎝(탁본 : 209.4x96㎝),판심 무,1권 1장,계선 무,삽도류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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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설명

기록 내용 간략 기재 - 표제지 위에 한지를 붙여서 메모 해놓음 : 元帥權公碑陰記 / 旣戌카-드2571書에 一?으로 / 同?文部中一部表見 五帝?表見取扱 - 표제지 아래 ② 1403이라고 쓰인 분류표 있음 - 상축과 하축 있음 - 해서체와 예서체로 되어 있음 : 해서체는 “元帥權公碑陰記”로 시작되는 것으로 이항복이 짓고(李恒福記) 김현성이 썼다(金玄成書)고 되어 있음 : 예서체는 “追記幷銘”이란 제목으로 惟 上七年辛丑秋謁~로 본문

기록 내용 간략 기재 - 표제지 위에 한지를 붙여서 메모 해놓음 : 元帥權公碑陰記 / 旣戌카-드2571書에 一?으로 / 同?文部中一部表見 五帝?表見取扱 - 표제지 아래 ② 1403이라고 쓰인 분류표 있음 - 상축과 하축 있음 - 해서체와 예서체로 되어 있음 : 해서체는 “元帥權公碑陰記”로 시작되는 것으로 이항복이 짓고(李恒福記) 김현성이 썼다(金玄成書)고 되어 있음 : 예서체는 “追記幷銘”이란 제목으로 惟 上七年辛丑秋謁~로 본문이 이어짐, 조인영이 짓고(趙寅永讚), 외세손 이유원이 썼다(李裕元書)고 되어 있음 - 여기서 元帥 權公은 도원수 권율 장군으로 보임. <행주대첩비 구비(幸州大捷碑舊碑)> 문화재번호 :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제 74호 시 대 : 조선 선조 35년(1602), 헌종 11년(1845) 소 재 지 : 행주내동(幸州內洞) 규 모 : 초건비(初建碑) - 비신 높이 188cm, 가로 80cm, 두께 19cm 중건비(重建比) - 비신 높이 236cm, 가로 102cm, 두께 41cm 재 료 : 대리석(大理石) 및 화강암 이 비는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권율(權慄)장군이 왜병을 격퇴한 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로서 1기는 선조 35년(1602)에 또 하나는 헌종 11년(1845)에 세운 것이다. 덕양산(德陽山) 정상에 세워져 있는 초건 구비(舊碑)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최립(崔?)이 짓고 글씨는 한석봉(韓石峰)이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다. 비문 끝의 추기(追記)는 이항복(李恒福)이 지었고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이 비는 오래되어 마모가 심해지자 비문을 새로 새기면서 한때 방치되었으나 일제시대 때 비각을 다시 세워 보전 하였다. 그 이후 비각이 훼손되자 1970년에 비각을 새로 개축하였다. 비문은 1593년 행주산성 대첩의 경과와 권율 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다. 충장사 앞의 새로 세운 비는 헌종 11년에 종전의 비문을 그대로 옮겨 놓으면서 규모를 훨씬 크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문의 뒤에는 추기(追記)를 다시 새겨 넣었는데 비문은 조인영(趙寅永)이 짓고 이유원(李裕元)이 썼다. 그 내용은 기존의 기록에서 누락된 장군의 사적과 행주 기공사 중창기(紀功祠 重創記)를 아울러 기록하였다. 이 비의 지대석은 장방형인데 넓고 큼직하여 안정감이 돋보인다. 비신은 흑생이 가미된 화강암으로 ‘원수권공 행주대첩비’란 전자가 뚜렷이 남아 있다. <해서체로 된 이항복이 지은 비음기 - 원문 / 해석> 元帥權公碑陰記 公卒旣殯。其宗人之從事於軍者。見余泣且言曰。公在軍。?取一卷子若有所箚錄者。曰我死。有壻李議政在。必能誌我墓。以此銘我足矣。余發其?。得所謂卷子者。有記其幸州之役。天朝總督軍門大司馬宋應昌咨奬本國者曰。權某扼守孤危。時抗大敵。板蕩忠臣。中興名將。繼而兵部尙書石星奏之。則天子嘉之。有?諭本國者曰。今觀全羅斬獲數多。該國人民尙可振作。其下又記丙申上敎。有云卿忠勞茂著。勇略超世。名聞天下。威?敵國。元帥之任。捨卿伊誰。及入對。勞之曰。非卿。國家何以得至今日。又曰。今時事粗安。?卿之功是賴。殄殲兇賊。奠安國家。予惟望之。仍賜廐馬云云等語。皆公手迹宛然。余讀之?然曰。多矣哉。此足矣。彬彬乎文哉。又奚以假辭爲也。?公有命。敢不克遵以光大其寵靈乎。而於碑略之。則又?史氏之或逸也。碑成。遂假其背以記。 원수(元帥) 권공(權公)의 비음기(碑陰記) 공이 작고하여 초빈(初殯)을 마친 다음에 그 종인(宗人)으로 군무(軍務)에 종사했던 사람이 나를 보고 울면서 또 말하기를, “공이 군중(軍中)에 있을 적에 일찍이 마치 차록(箚錄)한 바가 있는 듯한 한 두루마리를 취하여 말하기를,‘내가 죽거든 내 사위 이 의정(李議政)이 있어 반드시 나의 묘지(墓誌)를 쓸 것이니, 이것으로 나를 명(銘)하면 충분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 상자를 열고 이른바 두루마리라는 것을 찾아 내어 보니,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있었다. 즉 천조(天朝)의 총독 군문(總督軍門) 대사마(大司馬) 송응창(宋應昌)이 본국(本國)에 자문(咨文)을 올려 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권모(權某)는 외롭고 위태로운 곳을 눌러 지키면서 수시로 대적(大敵)을 막아 내었으니, 어지러운 나라의 충신(忠臣)이요 중흥(中興)의 명장(名將)입니다.” 하였고, 이어서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공의 승첩 소식을 천자(天子)께 아뢰었을 적에 천자가 공을 가상히 여겨 본국에 칙유(勅諭)한 데에는 이르기를, “지금 보니, 전라도(全羅道)에서 참획한 것이 수다하여 해국(該國)의 인민들이 오히려 진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하였으며, 그 밑에는 또 병신년의 상교(上敎)를 기록해 놓았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경(卿)은 충성을 다한 노고가 성대히 드러났고 용략(勇略)이 세상에 뛰어나서, 명성이 천하에 드높고 위엄이 적국(敵國)을 습복시켰으니, 원수(元帥)의 직임을 경말고 그 누가 담당하겠는가.” 하였고, 공이 입대(入對)함에 미쳐서는 상이 공을 위로하여 이르기를, “경이 아니면 국가가 어떻게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지금 시사(時事)가 조금 편안해진 것은 참으로 경의 공을 힘입은 것이니, 흉적(兇賊)들을 모조리 섬멸하여 국가를 길이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내가 오직 바라는 바이다.” 하고, 인하여 구마(廐馬)를 하사했다는 등의 말들이 있었는데, 모두 공의 수적(手迹)이 완연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읽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훌륭하여라, 이것으로 충분하도다. 문채와 바탕이 갖추어져 찬란한데, 또 어찌 군더더기의 말을 쓸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공의 명령이 있었는데, 감히 그대로 준행해서 임금의 두터운 은총을 빛내지 않겠는가. 그러나 비문(碑文)에 이것을 생략해 버리면 사씨(史氏)가 혹 빠뜨릴까 두렵다.” 하고, 비가 이루어지자 마침내 비의 등쪽에 이 글을 기록하는 바이다. <예서체로 된 조인영이 지은 추기 명 - 원문 / 해석> 追記幷銘」 惟 上七年辛丑秋謁 西陵路高陽領議政臣寅永言故元帥臣權慓幸州破倭事仍言是年乃 宣廟勘勳之年而幸州爲高陽地今 輿衛所由適在是年是地請建祠以?武」 功 上可之於是三營帥臣奉 命董工?年春祠成額曰紀功盖公肇有?豆所也始幕府諸人建碑于此?崔簡易?之文韓石峯濩之書仙源金相國尙容之篆也追記出於公之」 壻白沙李相國恒福而書之者金南窓玄成也字?不可辨公之後孫縝甫與諸宗謀改之要寅永識其?寅永?末也何敢以文字附?易白沙諸公後哉雖然?有舊碑所未錄者其」 ?勳也公居一等 贈?忠仗義迪毅?力宣武功臣議政府領議政永嘉府院君其議謚也屢改爲忠?其立嗣也구仲氏子益慶適房 仁廟丁丑以監察殉于沁今 上甲辰 贈」 左承旨其建祠也任其事者李侍郞啓朝外裔也權侍郞大肯?派也李尙書惟秀忠武公舜臣後時元戒也且如湖南軍善射射必中矢將盡水使李?舟載?以繼之云者載 國朝」 寶鑑以孤軍近大敵不可無柵役諸軍作柵衆志大固云者爲?壤君趙公儆事載其神道碑趙水公中軍也又記寅永王孝文翼公使日本日?人?問公與李忠武之後曰龍蛇之役」 日?兵將皆?於二公至于今以二公名驅疆?而?兒啼及歸奏之 英廟大嗟異 命錄祀孫皆可書也遂系之以銘曰」 奧古東方號莫强國維乙與邯維武之力 聖朝尙文金火迭革載?載?道崇而極有闖者夷封承脩鯨?我八區蕩我三京列鎭?潰莫之敢?天步方窘寤寐干城於喆權公起自」 南牧梨峙小試先折距角? ??纛?按全服?誓北勤後出者戮由稷移禿 ?佩以 命敵挑彌堅截掠??畿旣?熾灣無壅令仗叢則??謀制勝中分衿陣帥宣作殿?統」 前部爲士卒先陽江擊楫直逼郊甸波幸山匪守伊戰時 ?天子憫我乞靈督臣東出如電如霆遂藉浿績其勢建?碧蹄?勝聯絡失形賊且?萃凶?孔張斯戰寡援從厥陸」 ▨▨▨?滅計在逞狂衆寡之懸一着存?公時整暇不撓以??矛礪刃治軍益急背大江是置死法幕府屈策環柵乃立俄有斥報兵不見際穴?束炬攻者悉銳?唇?地非累」 萬▨▨▨▨▨▨▨▨▨手仗初罔▨▨▨▨▨▨▨▨▨▨▨▨▨▨▨▨▨▨▨▨▨▨▨▨三合三敗湖鍊注隊命?及遠前?船給亦賴良?武?武批武鉤武波挫莫支焚」 屍而遁臨陣獲首百以美級自倭之?始有斯捷遑遽南走救猶靡給名姓必問聲威攸▨▨▨▨▨▨莫▨▨▨▨▨▨▨▨▨論賞 帝遣行人華?隆奬 王用三錫師中?」 丈蹟玆偉毅?古敵愾溯麗?上疇與爲對國將中興天以公賚允文允武安危是佩鼓整▨▨▨▨匪?紀功之祠戰地??山靜波晏伊誰云錫 后王萬年罔武有▨」 上之十一年乙巳仲夏大匡輔國崇祿大夫中樞府事趙寅永?」 外十世孫通訓大夫行弘文館應?兼 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南學?授別兼春秋▨奎章閣檢校待?知製 ?李裕元書 八月 日立」 추가하는 기록과 명 지금 임금(헌종) 7년 신축년(헌종 7, 1841년) 가을 서릉에 참배할 때, 길을 고양으로 나갔는데 영의정 조인영(趙寅永)이 옛날 원수 권율이 행주에서 왜군을 격파한 일을 아뢰고 이어서 올해가 선조임금이 공신을 책봉한 해임을 아뢰고 행주는 고양이 되었는데 지금 임금의 행차가 지나는 곳이 마침 올해 그 자리이니 사당을 세워 무공을 정려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셨다. 이에 삼영수(三營帥)인 신이 명을 받들어 공사를 감독하여 그 다음해 봄에 사당이 완성되니 현판을 기공(紀功)이라고 내리셨다. 이에 공은 비로소 제사 받을 곳이 있게 되었다. 처음에 막부의 여러 사람이 이곳에 비석에 세웠으니 바로 간이(簡易) 최립(崔?)의 문장과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와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전액이고 추가 기록은 사위인 백사(白沙)정승 이항복에게서 나왔고 글씨를 쓴 사람은 남창(南窓) 김현성이다. 글씨가 마모되어 분별할 수 없어 공의 후손인 진(縝)씨가 여러 종인들과 함께 고치고 인영에게 그 것을 기록해주기를 요청하였다. 인영은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어찌 감히 간이와 백사 여러 공들의 뒤에 글을 붙일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옛 비석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또한 있다. 공신에 책록됨에 공은 일등공신으로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의정부영의정 영가부원군이고 시호를 의논함에 여러 번 고쳐서 충장공(忠莊公)이 되었다. 그 후손은 둘째 형님의 아들 익경(益慶)을 취하여 아들로 삼았는데 인조 정축년(인조 15, 1637년) 감찰로서 강화도에서 순절하고 지금 임금 갑신년(헌종 10, 1844년)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사당을 건축할 때 그 일을 맡은 사람은 외손인 시랑 이계조(李啓朝), 방계 후손인 시랑 권대긍(權大肯),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인 상서 이유수(李惟秀)이니 그 때 훈련대장이다. 또 호남의 군사는 활을 잘 쏴서 쏘면 반드시 명중하였고 화살이 다 떨어지자 수사 이빈(李?)이 화살을 배에 싣고 와서 대 주었다고 하는 것이 국조보감에 실려 있고 외로운 군사로 대적과 가까우니 책(柵)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어 여러 군사가 책을 만드니 모든 사람들의 뜻이 크게 견고하게 되었다는 것이 풍양군 조경(趙儆)의 일을 기록한 신도비에 실려 있으니 조공은 권공의 중군이었다. 또 기록할 것은 인영의 조부인 문익공(文翼公 : 조엄)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일본사람들이 공과 이충무공의 후사에 대해 묻고는 “임진왜란 때에 일본의 군사들이 모두 두 공에게 섬멸되어 지금까지도 두 공의 이름만 들으면 학질도 쫓아내고 아이의 울음도 멈추게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돌아와서 보고하니 영조가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는 후손에게 벼슬을 줄 것을 명령하였다. 이러한 일이 모두 기록할 만한 것이다. 마침내 이어서 명한다. 옛날 동방은 막강한 나라라 불리어 을지문덕장군과 강감찬장군의 무공이 있네. 우리나라는 학문을 숭상하여 병화의 변이 번갈아서 오니 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그치고 하여도 도는 높아져 극에 이르렀네. 틈을 노리는 오랑캐 있으니 큰 돼지, 교룡이라네. 우리 강토 유린하고 우리 세 도성 분탕질하네. 여러 진지 계속 무너지는데 막을 수 없고 임금의 갈 길 군색하여 자나 깨나 나라 구할 간성을 생각하였네. 아아! 권공은 광주목사에서 일어나 이치(梨峙)에서 우선 기용해보니 먼저 적의 예봉을 꺾었도다. 이에 장수의 깃발을 수여하고 이에 전라도를 안무하게 하였다. 북쪽에 향하니 맹세하니 전쟁에서 뒤에 가는 자 베어 죽이리. 직산을 거쳐 독산으로 옮기니 왕이 상방검을 풀어 명령하였네. 적의 도발 더욱 강해져 노략질하고 백성을 죽이고는 도망갔네. 경기지역에 이미 적의 치성한 것을 단속하니 의주의 명령이 막히지 않는구나. 의리를 믿어 용맹하니 하물며 승리를 도모함에랴. 군사를 나눠 금주에 진을 두어 장수 선거이가 후진이 되고 몸소 전방을 통솔하여 군사들의 앞장에 섰네. 양천강을 노를 저어 건너서 곧바로 도성을 핍박하니 저 높은 행주산성 지켜서 싸우지 않으리. 이 때 명나라 천자 우리가 신령에게 비는 것 불쌍히 여겨 동방에 출병하라고 신하들을 독려하니 전광석화 같구나. 마침내 평양의 전공을 이루니 그 형세 물이 쏟아지는 듯 하더니 벽제관에서 승리에 교만한 나머지 그 이어지는 형세를 잃어 버렸네. 적들이 또 무리지어 모이니 흉염이 매우 성대하고 우리의 원군이 적은 것을 업신여기고 -마멸- -마멸- 계책이 미친 짓을 하는데 에 있으니 크고 작은 고을들 한 번에 존망이 달려있네. 공이 이때에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두려움에 흔들리지 않고 창과 칼을 손질하며 더욱 급히 군사를 감독하였네. 큰 강을 뒤로 하여 진을 치는 것 이는 곧 죽음의 법칙이라. 막부가 최선을 다해 계책을 세워 주위에 책을 둘러 세웠네. 잠시 후 척후병이 보고하니 적병이 끝 간 데가 없이 몰려오는데 쇠뇌포와 많은 홰를 가지고 공격이 모두 날카로웠다. 소리를 지르며 사방에 가득하니 몇 만의 계책이 아니 -마멸- 한손에 검을 들고 혹시라도 -마멸- 사졸이 모두 -마멸- 세 번 싸워 세 번 패하였다. 호남의 훈련된 병사 명령이 먼 곳에까지 미쳐 화살상자를 배로 공급하니 또한 훌륭한 장수에게 힘입었네. 우리가 때려서 물리치고 우리가 갈고리와 창으로 격파하니 저들이 기세가 꺾여 지탱하지 못하고 시체에 불 지르고 도망을 가더라. 진지에 임하여 머리를 얻은 것이 백 -마멸- 왜적의 난리에 비로소 이 승첩이 있구나. 황급히 남쪽으로 도망가 구원도 오히려 미치지 못하네. 성과 이름 반드시 물으니 명성과 위업이 -마멸- -마멸- 송응창이 상을 주기를 논하였네. 황제가 사신을 보내 포상함이 융숭하였고 왕께서는 세 번 은총을 내리시니 군중의 장인(주역에 이르는 지략과 덕망을 지닌 사람)이 되었네. 공적이 이에 성대하니 바로 옛날의 적개공신(세조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신)이라. 고려시대 위로 거슬러 봐도 누가 상대가 되겠는가? 국가가 중흥하려고 하늘이 공을 내려 보내니 실로 문무의 덕을 갖추어 나라의 안위를 항상 잊지 않았네. 북을 -마멸- 기공사(紀功祠)는 전쟁터에 뚜렷하구나. 산은 고요하고 물결도 편안하니 이 누가 주신 것인가? 임금은 만년토록 우리 -마멸- 지금 임금(헌종) 11년 을사년 여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중추부사 조인영은 글을 짓고, 외11세손 통훈대부 행 홍문관응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남학교수 별겸춘추 규장각검교대교 지제교 이유원(李裕元)은 글씨를 쓴다. 8월 일에 세움 <권율> 1537년(중종 32)∼1599년(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명장.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1. 관력 아버지는 영의정 철(轍)이며,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 2. 북진 계책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다.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서울의 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하였다. 이광이 수원과 용인 경내에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들을 공격하려 하자 극력반대하면서 자중책을 말하기도 하였다. 즉, 서울이 멀지 않고 대적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적은 적과의 싸움에서 도내의 병력을 모두 소모할 것이 아니라,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서 서로(西路)를 튼튼히 하여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보장한 다음에 적의 틈을 살피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장인 이광이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취하여 대패하고 선봉장 이시지(李詩之)·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장수들이 전사하였으나, 오직 혼자만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하여 후사를 계획하였다. 한편, 남원에서 1천여명의 의군을 모집하여 다시 북진, 금산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맞아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싸웠다. 이 싸움에서 황진이 총을 맞아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군사들을 독려하여 왜병을 격퇴시켜 호남을 보존하였다. 그해 가을 이치싸움의 공으로 곧 전라감사에 승진하였다. 12월에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길에 올라 직산에 이르러 잠시 머물다가, 체찰사 정철(鄭澈)이 군량미 마련 등에 어려움이 있으니 돌아가 관내(管內)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잠시 주저하였으나 북상하라는 행재소의 전갈을 받고 북진을 계속하였다. 3. 독산성전투 그러나 앞서 용인에서 크게 패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 바로 북상하는 것을 피하고,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였다. 대병이 그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성에 주둔한 왜병을 풀어 삼진(三陣)을 만들고 오산 등 여러 곳에 진을 친 다음 서로 오가게 하며 독성산성의 아군을 밖으로 유인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책을 굳게 하여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을 펴가면서 그들에게 타격을 가하자 몇 날이 지난 다음 영책(營?)을 불사르고 도성으로 물러났다. 적이 퇴각할 때 정예기병 1천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하여 많은 왜병을 베었다.그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하여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근교 서쪽 가까이로 옮기기로 하고 먼저 조방장 조경(趙儆)을 보내 마땅한 곳을 물색하도록 하여 행주산성을 택하였다. 조경에게 명하여 2일간에 걸쳐 목책(木?)을 완성하게 하고 이어 독성산성으로부터 군사를 옮기는 작업을 개시하였다. 대군의 행렬을 위해서 그는 독성산성에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많은 군사가 계속 남아 있는 것같이 위장한 뒤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그는 행군중에 휘하병 가운데 4천명을 뽑아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금천(衿川: 지금의 始興)에 주둔하게 하고 도성의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4. 행주산성전투 이때 휴정의 고제(高弟) 처영(處英)이 의승병(義僧兵) 1천을 이끌고 당도하였으나,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명 미만이었다. 그뒤 정예병을 뽑아 도성에 보내어 도전하니 적장들은 이치싸움에서 대패한 경험이 있고, 또 독성산성에서의 치욕을 경험한 탓으로 일거에 침공하여 멸하지 않는 이상 큰 위협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도성에 모인 전군을 총출동시켜 총대장 우키타를 위시해서 3만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왜병은 7대로 나누어 계속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성이 함락될 위기에까지 직면하였으나, 일사불란한 통솔력과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대패한 적은 물러가기에 앞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모아 불을 질렀으나, 그밖에도 유기된 시체가 2백구에 달했고 타다 남은 시체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권율의 군대는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갑주(甲胄)·도창(刀槍) 등 많은 군수물을 노획하였다. 이것이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이다. 5. 정유재란시의 활동 그뒤 권율은 왜병의 재침을 경계하여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하였다. 그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회담이 진행되어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휴전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다.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하여 영남에 주둔하였는데, 1596년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바로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하였으나 도어사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 그해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이유원>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묵농(?農)?임하노인(林下老人)이다.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헌종 7년(1841) 정시문과에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규장각대교를 거쳤으며, 헌종 11년(1845)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고종 초에 좌의정에 올랐으나 대원군과 반목하여 고종 2년(1865)에 수원유수로 좌천되었다. 그해 말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대전회통 大典會通≫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고종 10년(1873) 대원군이 실각하자 영의정이 되었고, 영중추부사로 서임되었다. 세자책봉 문제로 일본과 결탁하였고, 고종 12년(1875)에는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李鴻章)을 회견하고 세자책봉을 추진하였다. 고종 16년(1879) 영의정으로 있을 때 이홍장으로부터 서구열강과 통상수호하여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받았다. 이듬해(1880) 치사하여 봉조하가 되었으나 그 다음해(1881)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 신섭(申)의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얼마 뒤 풀려나서, 고종 19년(1882) 전권대신으로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임하필기 林下筆記≫?≪가오고략 嘉梧藁略≫?≪귤산문고 橘山文藁≫를 남겼다. <이항복李恒福>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 고려조 대학자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참찬 몽량(夢亮)의 아들이며, 경기도 포천 출신이다.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기에 ‘오성대감’으로 알려졌으며, 이덕형이 그의 죽마고우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엄한 교육을 받았다. 선조 4년(1571)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영의정 권철의 아들인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 1575년 진사과에 오르고 1580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한림에 오른 뒤 성균관 전적?이조좌랑?직제학?우승지?호조참의 등에 임명되었고,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여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으며, 형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이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등을 거쳐 의정부 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주청하였고, 1594년 전라도의 민란을 진압하였으며, 도원수 겸 체찰사로서 남도를 돌며 민심을 수습하고 <안민방해책 安民防海策>을 올렸다. 영의정 겸 영경연?세자사를 역임하였고, 1601년 호종(扈從) 1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다음해 정인홍 등과 맞서 성혼을 비호하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을 사퇴하였다. 1608년 좌의정 겸 체찰사에 제수되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배향을 반대하는 정인홍 일당과 대결하다가 1613년 인재를 잘못 천거했다는 이유로 체직되었고, 왕비를 폐위하자는 주장에 맞서다가 광해군 10년(1618)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鐵嶺 높은 峯에 쉬여 넘 져 구름아/ 孤臣寃淚를 비 삼아 여다가/ 님 겨신 九重深處에 려 볼가 노라”의 <철령가 鐵嶺歌>는 당시 북청으로 유배가는 그의 심정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널리 유행되었다. 그해 관작이 회복되고 포천에 예장되었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지어 제향하고, 효종 10년(1659) 화산서원(花山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당색에 물들지 않고 초연히 중립을 지킨 강직한 인품이 그의 시문에 그대로 나타났으며, 신흠은 그의 초연한 기상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저서로 ≪백사집≫이 있으며, <유연전 柳淵傳> 등을 지었다. 시호는 문충(文忠). <김현성 金玄成 1542년 ~ 1621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여경(餘慶), 호는 남창(南窓). 목사 언겸(彦謙)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진사 중경(重卿)의 딸이다. 1564년(명종 1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교서관정자(敎書館正字)와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양주목사 등을 거쳐, 1617년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시·서·화에 두루 능하였는데, 그림보다는 글씨에 뛰어났으며 특히 시에 능하였다고 한다. 글씨는 조선초에 유행하였던 우아하고 균정된 모습을 지닌 송설체(松雪體)를 따랐다. 현재 전하는 그림은 없고 서예 유작으로 행서(行書)로 쓴 「주자시(朱子詩)」가 남아 있다. 또, 금석문으로는 「숭인전비문(崇仁殿碑文)」·「이충무공수군대첩비문(李忠武公水軍大捷碑文)」·「조헌순의비문(趙憲殉義碑文)」·「신숭겸충렬비문(申崇謙忠烈碑文)」·「정언유격묘비문(正言柳格墓碑文)」 등 다수의 작품이 전하고 있다. 저술로는 『남창잡고(南窓雜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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