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 태조왕능 중건신도비 병서
외예 전경연참찬관 여산 송영대 찬
숭록대부 전판돈녕원사 해평 윤용구
1 서
가선대부 규장각부제학 연안 이병관 전
「중화의 으뜸 기운이 모여서 기린과 봉황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선유(先儒)가 후직(后稷)
2을 찬미하여 말한 바로써 그 신성한 사람의 출생은 범인과 다른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가히 생각하건대 대가락국 태조왕의 독생은 그 기적이 후직(后稷)보다 더욱 다르므로 세상의 병필자는 다시 어떻게 칭하랴, 가락국기에 각대강을 말하였다. 후한(後漢) 광무황제 건무 18년 임인(서기 42년) 3월 3일. 가락의 아도간(我刀干)·ᆞ여도간(汝刀干) 등 9간이 무리를 거느리고 물가에서 계음하다가 구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있었으며 공중에서는 또 이상스러운 소리가 있었다. 자주빛깔의 밧줄이 있어 금합(金榼)을 싸서 매고 공중에 다루어 내려왔다. 금합 속에는 황금빛 알이 여섯 개가 있었는데 태양같이 둥글었다. 이에 「아도간」의 집에 모셔 두었다가 이튿날 9간들이 모두 모여서 다시 금합을 열어보았다. 여섯 동자는 각각 껍질을 깨고 출현했는데 용모가 매우 거룩하며 나날이 장성하여 10여 일을 지남에 신장이 9척이나 됨으로 여러사람은 다 이상하게 여겼다. 이 달 보름날에 9간등이 그 먼저 출현하신 한 사람을 추대하여 임금을 삼으니, 총명하고, 먼저 출현하신 연고로서 수로(首露)라 칭하고, 국호를 가락(駕洛)이라고 하셨다. 분산(盆山)의 양지쪽에 도읍을 설치하시고 판도를 정하시고 궁궐을 경영하시고 종묘를 세우시고 다섯 아우는 5가야에 분봉하시며, 왕의 건국 7년(서기 48년) 가을 7월에는 허(許)씨를 맞이하여 왕후를 삼았었다. 처음에 9간 등이 아뢰기를 “왕께서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청하건대 처녀를 선택하여 들이소서.”하니, 왕은 말씀하시되 “짐이 이곳에 하강함은 하늘의 명령이다. 배필로 또한 하늘이 반드시 명령할 것인즉 염려 말지어다.”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7월 7일
3에 붉은 돛대를 달고, 붉은 기(旗)를 휘날리는 큰 배가 서남쪽 바다에 떠서 잉신(媵臣)남녀 수십인이 한 공주(公主)를 모시고 이르름에 왕은 만전(輓殿)을 설치하여 영접하였다. 스스로 이르시되 “제는 아유타국 왕녀로서 성은 허(許)이오 이름은 황옥(皇玉)으로 나이는 26세입니다. 부왕(父王)의 몽중에 황천상제(皇天上帝)가 병령하기를 ‘가락국 원군(元君)은 베필이 없으므로 의당 왕녀를 보내라’고 했습니다. 부왕은 제를 보내는데 돌탑을 배에 실어서 풍도를 진압하게 하시므로 제는 득달한 것입니다.”왕후가 되심에 비덕이 아름다웠고, 내조의 공이 있었다. 왕은 이미 혼인의 예를 바루고는 또 종지(宗支)의 구분을 밝히고, 구부(九部)를 설치하여 관제(官制)를 정하고, 태자(太子)를 책립하여 국체(國體)를 엄중히하고, 우주의 홍황을 개혁하며 인문(人文)을 선포하고 만물을 개발하고 정무를 성취하니, 강토는 날마다 광대하고 사궁(四窮)을 혜율함에 백성들은 가장 평화로웠다.
백제가 마한을 격멸함에 죄상을 문책하는 군사를 일으켰고 왜국이 신라를 침범함에 퇴병시키는 서신을 보내었다. 슬기로운 덕화는 넘쳐 흘렀고 위엄있는 덕망은 멀리 덮었으며, 문득 변한의 옛 지역을 차지함에 마한 54국이 다 판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동쪽은 황산하(洛東江)에 이르고 북쪽은 대량주
4에 이르니, 산남(山南)의 모든 소국(小國)이 다 옷깃을 단정히해 와서 조공하였다. 한 환제(桓帝)의 연희 5년 임인(서기 162년)은 왕의 재위 121년이었다. 스스로 근정(勤政)에 노권(勞倦)하시어 태자 거등(居登)에게 전위하시고 지품천
5의 방장산
6 가운데 별궁(別宮)을 축조케하여 허후(許后)와 함께 이거수련(移居修鍊)하면서 자호(自號)를 보주황태왕(普州皇太王)이라 하시고, 왕후의 휘호(徽號)를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라 하셨고, 산을 태왕산(太王山)이라 하고 별궁을 태왕궁(太王宮)이라 했으며, 그 후 28년(서기 189년)에 허후께서 훙어(薨御)하셨다. 왕후께서 아들 열 사람을 두었으니 맏이는 곧 태자(太子:居登)이었다. 황후는 세상을 여의심에 다다라서 왕께 말씀하시되 “제는 하늘의 명령을 받잡고 부왕의 가르침을 받들고 와서 대왕을 모셨으나, 제는 동국의 나그네입니다. 제가 죽으면 성을 전하지 못할 것임에 이를 슬퍼합니다.”고 하시므로 왕께서도 그 뜻을 비하여 두 아들을 명령, 모후의 성을 쫓아서 허(許)씨로 하게 하였다. 그 후 10년 기묘(199년) 3월 23일 왕께서 훙어하시니 한 헌제(漢獻帝) 건안 4년이었다. 보수(寶壽)는 158이오, 왕위에 계심은 38년이며, 능은 구지봉 남쪽의 자좌(子坐)
7이니 납능(納陵)이라 하고, 후능은 그 북쪽 1리의 장소에 있으니 또한 자좌이다. 태자가 즉위하시니 이를 도왕(道王)이라 하고, 성왕 마품·덕왕 거즐미·명왕 이시품·신왕 좌지·혜왕 취희·장왕 질지·숙왕 겸지·양왕 구형에 전위하셨다. 신라가 강성하여 자주 침략하고 공벌함에 백성들의 사상자가 많았다. 왕은 탄식하시되 “나는 사람을 양성하는 자로서 사람을 해치고자 아니하며 또는 종묘 사직이 나로부터 없어짐을 차마 볼 수 없노라.”하시며 왕제 구해(仇亥)에게 양위하시고 태자(太子) 비빈(妃嬪)을 인솔, 제기문물(祭器文物)을 안고 방장산의 태왕궁(太王宮)에 은거하였다. 구해왕(仇亥王)이 신라에 항복하시자 신라는 책봉하여 금관국주(金官國主)를 삼았고 후에 대각간(大角干)을 수여하며 그 지방으로서 금관군(金官郡)을 삼았으니 무릇 10대 11왕이오 역년은 491년이었다.
그러나 역사에 나타난 자는 동일하지가 않으니, 양왕은 태자 세종(世宗)에게 전위하시고, 세종(世宗)은 왕제 무력(武力)에게 전위하시고, 무력(武力)은 신라에게 나라를 전하시니 곧 진 문제(晉文帝) 천가 3년 임오(서기 562년)이었다. 신라 진흥왕은 국빈으로서 대우하고, 후에는 가락으로써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삼았고, 식읍(食邑)을 봉하여 선대 향사를 받들게 하고, 신주(新州)
8 대총관(大摠管)을 배하여, 뒤에는 각간(角干)에 이르렀다고 하니, 실상은 11대·12왕·521년이라고 이른다. 무력(武力)의 아드님은 도독(都督) 서현(舒玄)이오, 서현(舒玄)의 아드님은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金庾信)이었다. 이로부터 그후 신라·고려·조선 3조정을 거쳐서 근20년 사이에 김허(金許) 양 성은 장상 훈업(將相勳業)과 도덕 문장(道德文章) 및 절행(節行)의 선비가 손가락을 일부러 꼽지 못할만큼 역사책에 빛나니, 이 어찌 태조왕께서 공을 세우시고 덕을 쌓으신 여음(餘蔭)이 아니랴! 옛날 진흥왕의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가락국 태조왕은 생민(生民)의 첫 임금으로서 동시대를 개혁하고 산해(山海)를 웅거함으로 이에 허왕후께서 오셨고 창업수통(刱業垂統)하였으니 슬기로운 덕화와 거룩한 공적은 천추에 휘황하다. 지금 그 2능이 다 고도(故都)에 있으니 초목(초동, 목민) 때문에 황폐토록 할 수 없으며 향화(香火)도 밝았다가 꺼졌다가 하므로 주간(州干)을 시켜 수리하게 하고 밭 20이랑을 주게 하라.”고 하였으며, 문무왕은 태조왕의 외손으로서 2능을 보수하고 치제하게 하였고, 고려 문종 26년(1026년)은 곧 태조왕의 즉위하신 구갑(舊甲)이므로 지김주사(知金州事)인 김양일(金良鎰)을 특명하여 능침을 보수하고 향사를 갖추게 하니 양일 이내 비문을 찬술하였다. 조선왕조 중엽에 이르러 전례(典禮)의 미치지 못한 데가 많았다. 고을사람이 이르되 신성한 임금은 감히 제향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매년 동지 한 차례의 제사에 후손 의성현령 김계금(金係錦)과 문민공 김일손(金馹孫)이 추원보본하는 예절에 정성을 극진히 하였고, 선조 13년(1580년)에 관찰사 허엽(許曄)이 2능을 중수하여 제의(祭儀)를 갖추었고 선조 25년(1592년)에 왜병이 능침을 범하다가 신병(神兵)에게 소멸당하였다. 이에 고을사람이 함께 달려가서 이를 봉축하였고, 인조 25년(1647년)에 순찰사 허적(許積)이 더욱 보수하여 비석을 건립함에 그 후를 이어서 미수 허목(許穆)이 또 비문을 지었고, 영조 21년(1745년)의 명령에 “2능은 함께 제향하라.”고 하였으며, 영조 23년(1747년)에는 능역 및 제각을 개수했으니, 영조 25년(1749년)부터 영조 50년(1774)년까지 무릇 세 차례나 치제하였다. 정조시대의 전후 하교(下敎)는 숭보의 의의가 멀리 뛰어남을 볼 수 있으니, 위토전을 획급하고 제각을 중수하고 능감을 설립하고 향을 내려주고 제반 의절은 한결 삼성사(三聖祠)·숭령전(崇靈殿)·숭덕전(崇德殿)의 성규를 의거하게 하며, 정조 26년(1792년) 8월에는 또 김해부사를 파견하에 치제했으니, 그 제문에 이르시되 “성군(聖君)이 나라를 창업하심에 하늘이 배필을 정해주셨다. 나의제물을 흠향하시고, 내 백성을 복되게 하소서.”하므로 인하여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삼았으며 위토전을 내려주고 생뢰(牲牢)를 지정하여 향사의 제도를 한결 개창하는데 그 일을 감동한 자는 후손 김세묵(金世黙)이었다.
고종 15년(1879년)에 대호군(大護軍) 허전(許傳)의 진걸(陳乞)하는 상소로 말미암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정케 하였다. 제각을 개축하여 숭선전(崇善殿)의 액호를 내리고, 향사는 옛 제도와 같이 하고, 참봉을 설치하되 김·허 양 성의 교대추천으로 제수(除授)받게 하며, 고종 17년(1880년)에 본부사 김의성을 파견해 치제고유(致祭告由)하였고, 고종 21년(1884년)에 신도비를 세웠으니 허전(許傳)의 찬술한 바이다. 순종황제 융희 3년(1909년) 남순(南巡)할 때는 김해군수 이시철(李是哲)을 파견하여 치제하였다. 그후 15년 갑자(1942년)에 현임 참봉 김영두(金瀯斗)는 본군수 이장희(李章喜)와 협의하고 또 여러 종족과 널리 의논하여 크게 능침을 보수하였다. 공사를 일으켜 해를 넘기니 일은 번창하고 비용도 거대했으나 무릇 납능(納陵)의 후손은 모두 정성을 다하고 물력으로 다했다. 심지어는 상설(象設)
9을 스스로 담당하여 갖추는 자도 있었으니 이에 능침의 대소 석의(石儀)는 아름다운 장관으로 고쳐졌다. 간절히 논하건데 가락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에 위치하여 태조왕이 하늘의 명령을 받으실 초기에는 지역이 편소함에 마냥 등(藤)나라가 제(齊)나라·초(楚)나라의 사이에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러나 국토를 개척하고 증식하고 국경을 견고히 하여 스스로 강력해서 인의(仁義)를 높이고 예악(禮樂)을 숭상하여 문질(文質)이 빈번하게 가관하므로 백성은 평안하고 향국(享國)은 연장했으니, 주 문왕(周文王)의 사방 백리로써 일어난 자와 거의 근사할 것이다. 아! 자못 하늘의 명령일 것인 저, 명문으로 말한다.
아득한 상고시대의 제왕(帝王)은, 소의 머리였거나 뱀의 몸둥이였다.
그 출생은 들은 이도 없으며, 사람의 윤리를 연유함도 않았다.
금알이 상서로운 증조를 발했으니, 그 슬기로움은 어떠했으랴.
금관(金官)지방에 임금이 없으므로, 특별히 신이(神異)한 사람을 내려보내다.
천제(天帝)가 부지런히 남쪽을 돌아보시고, 백성에게 임금을 세워주셨다.
덕화는 순비기(循蜚紀)와 같았었고, 풍속은 옛 순후함을 따르셨다.
잘 비강함에 부지런 했었으니 국민은 걱정과 가난이 없었도다.
초(楚)나라에 웅역(熊繹)이었고
10, 빈(邠)나라에의 공류(公劉)
11이었다.
창을 휘두르고 강토를 개척하시니, 공명과 사업이 날로 새로웠다.
신라도 초기에는 기대어 살았으며, 백제는 진실로 강대한 이웃이었다.
우리를 굳세게하여 용맹을 떨치시었고, 우리를 겸손히 하여 인덕을 베풀어셨다.
실직곡(悉直谷) 음즙벌(音汁伐)
12 두 나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음이 없었거니와
한기부주(漢祇部主) 보제(保齊)는 복고(伏辜)를 당했으니, 감히 존귀한 국빈께 거만한 탓이었다.
변한 마한 지방의 24국은 어느 나라도 신복(臣服)하지 않았으리요.
비유하면 호칭하지 않은이도 경복했으며, 사나운 짐승들도 다 길들였도다.
비록 노혼기(老惛期)를 경과해서도 만전의 국사를 친히 돌보셨도다.
또한 내찬(內贊)의 도움을 충당하시니, 미덕(美德)을 짝하고 상세히 살피시었다.
함께 장수(長壽)의 지역을 건너셨으니, 정치의 덕화는 이미 도달하였다.
점차 요(堯)임금의 노권(老倦)을 깨달아시고,
13 이에 순(舜)임금의 순수(巡狩)를 정지하셨다.
14
방장산(方丈山)
15에 들어가서 수련하심은 신선의 진리를 추모하심 이었다.
에 들어가서 수련하심은 신선의 진리를 추모하심 이었다.
과질(瓜瓞)은 면면(綿綿)하시고
16, 종사(螽斯)는 진진(振振)하도다.
17
12대의 자지손엽(子枝孫葉) 빛나시니, 오백년의 세월이 가까웠었다.
역대의 조정에서 높이 복덕했으니, 조두(俎豆)의 제물을 항상 진설하도다.
만세에 이르고 천추에 이르도록, 영원히 밝은 제향을 흠향하시리!
가락기원후 1886년 정묘(1927년) 8월 일
후손 김성학 세움